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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목사님
온라인 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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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선지자와 선지서를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지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요나는 다 알고 있죠. 더 놀라운 건, 저는 중학교 때 교회 나왔는데 교회 나오기 전에도 다윗이나 삼손, 요나 이야기는 들어봤어요. 이야기로 썼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요나서를 이야기체로 썼을까요? 선지서 중에는 모든 사람이 꼭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조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예수님의 표적이잖아요. 요나서를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셔서 어린아이부터 모두가 알도록 이야기체로 쓰신 것이죠. 그래서 요나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룻기와 요나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정한 책 제목들에 특징이 하나 있어요. 앞서 나온 《넌 내가 책임진다》는 룻기에 대한 책이고 요나서는 《내가 널 쓰고 싶다》잖아요. 여기에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 쪽보다 하나님 쪽을 드러낸 것이에요. 룻기에서도 사실 이삭 줍는 사람은 룻이잖아요. 인간적인 열심을 강조할 수 있지만 사람이 열심히 한다고 꼭 복을 받는 건 아니잖아요. 열매 맺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룻을 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죠. 그리고 사실 우리가 보면 ‘요나는 진짜 쓸 만한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무슨 선지자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목사 중에 목사가 안 믿는 보통 사람보다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내가 요나서를 보면서 놀란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한 번도 화를 안 내시는 거예요. 저는 누가 내게 이렇게 덤비면 마지막에는 진짜 몽둥이를 들 텐데 하나님은 끝까지 설득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가 인간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든 택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주의 마음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요나서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실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처럼 하나님 반대편에 서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위해 설득하고 쓰시려는 열심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간다면, 요나처럼 벗어나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얼마나 멋있게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젊은 날의 혈기나 힘을 요나처럼 고집부리는 데 데 쓰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세상과 싸우고 열방과 싸우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라는 거예요. 그래서 책 제목을 《내가 널 쓰고 싶다》라고 정한 것입니다.
저는 ‘고집’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자녀를 키워보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알거든요. 자식 버리는 부모 없잖아요. 그런데 옆집 애가 잘못하면 우리가 뭐라고 해요? 다 칭찬해요. 공부 못해도 “착하고 건강하면 그만이죠” 그러잖아요. 내 아이가 아니라서 그래요. 내 아이는 건강하고 착하기만 해선 안 되고 진짜 사람다워야 하잖아요. 저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보인 거예요. 그런데 저도 저의 청년 시절을 돌아보니까 부모의 마음을 잘 몰랐어요. 제가 예수님을 믿고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게 뭐냐 하면, 제가 너무 어려울 때 부모님에게 “저를 왜 낳았어요?” 하고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가슴이 아픈 거예요. 부모의 마음을 몰랐잖아요. 내가 지금 하나님께도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놓치고, 내가 지금 필요한 일에 대한 고집에 얽매어 요나처럼 “나를 차라리 바다에 던지세요. 죽어도 못 해요!” 이런 마음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교회에서 설교할 때 요나서 2장은 하나님이 쓴 게 아니라 요나가 썼다고 말했어요. 요나서 1장에서 이방인들이 “이 풍랑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고 말할 때 요나의 방법이 “나를 바다에 던지라” 아니었습니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내가 니느웨로 가면 된다”고 했으면 되는 거였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풍랑 잠재우고 보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요나가 “죽어도 안 가” 하고 물에 빠졌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죽일 수도 없고 쓰기는 해야겠고, 그러니 2장을 만든 거예요. 그걸 경험시켜야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농담 삼아서 한 말이, “2장에서 요나를 토해냈는데 만약 또 반항했으면 3장, 4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었을 거다.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바다란 바다는 다 빠졌을 거다” 했어요. 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인생에는 하나님께 사용되는 인생, 하나님께 대들고 고집부리는 인생,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마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쓰실 텐데, 우리를 붙잡으면 놓지 않으실 텐데, 그건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하시는 것이니까, 다만 그 하나님의 능력이란 우리가 순종할 때 발휘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순종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요나서가 보여주는 요나의 그 고집과 하나님의 설득을 말하고 싶어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를 입었지만 사실 죄인들이잖아요. 죄가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드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쉽게 고집 부리고, 죄에 빠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거든요. 아마 그게 요나와 마음이 통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가 아무리 성숙했다 해도 아마 누구든지 삶의 과정 속에 한번쯤은 요나처럼 하나님께 “주님 나 이거는 안 돼요. 이거 포기 못해요” 했을 거예요. 이런 고집이 다 있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성도가 있어요. 주내힘교회나 둘로스선교회나 마커스나, 제가 사역하는 모든 곳을 보면 어디든 고집 부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참아줬는데 하나님이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그 질문에 해답을 어디서 받았냐 하면요, 한번은 “남국아! 너도 참 어지간히 고집 부린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는데, 너는 그 사람이 고집 부린다고 너도 또 내 앞에 와서 똑같이 고집 부리냐? 쟤는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고 치고, 너는 목사란 놈이 나한테 그러니까 나는 너 때문에 죽겠다!” 이런 마음을 탁 주신 거예요. 그때 느낀 게 ‘야, 저 사람이 나랑 똑같구나!’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생각하는 어느 순간에 ‘내가 문제였구나’라는 걸 아마 한번쯤은 느끼기 때문에 요나가 낯설지 않고, 내가 이 시대의 요나가 아닌가 하는 고백을 모두가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뭘 시킬 때 “목사님, 교회가 멀어서 힘들어요” 하는 반응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먼 게 아니라 네 집이 먼 거다. 네 중심의 문제다”라고 말해주지요. 사실 이게 민수기 13장 이야기 아니에요?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하나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흘렀어요. 거기에 광대한 족속이 있었죠. 주님이 그런 게 없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 중심이냐 인본주의 중심이냐에 따라 우리 반응이 달라지는 거죠. 인간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믿음의 눈이 없었잖아요. 나는 이 시대에도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 중심성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교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인간 중심이면 하나님 앞에 못 가요. 제가 창세기를 보다가 놀란 게 뭐냐 하면 가인이 아벨에 대한 시기가 있었잖아요. 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 뭐라 그러셔요? 죄를 다스리라고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직접 말씀했잖아요. 그런데 동생 아벨을 죽이잖아요. 하나님이 직접 말하고 하나님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게 내 중심이 되면 하나님과 관계없구나 하는 걸 느낀 겁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 설교를 한다, 직분을 가진다 그래도 그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걸 증명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위하는가, 하나님 때문에 내 것을 내려놓는가?’ 그것이 중요하지요. 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을 위한다면 자기가 사라져야죠. 그래서 제 사역에 있어 모토가 되는 말씀이 있어요. 그게 세례요한의 말씀이에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런데 우리는 망하려 안 해요. 내가 잘 되려고 그러니까 결국 주님과 교회를 죽이는 거예요. 그걸 회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 마음이 요나서를 보면 들게 되지요.
저는 고난은 싫어요. 그런데 고난은 있어야 해요.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선교사 모임 기도회에서 아프리카에서 고난 받는 간증을 했어요. 거기에서 사회를 맡은 분이 “우리가 이 아프리카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 고난을 없애주시고” 이렇게 기도제목을 내니까 이 선교사님이 별안간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을 했어요.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저는 고난을 없애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라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한 것입니다.” 저는 고난이 내가 얼마나 하나님 편에 들기 싫어하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고난이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고난이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한국교회는 지금 고난이 아니라 평안을 좇고 안심을 좇아서, 덩치는 커졌는데 힘을 잃었어요. 사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은 고난을 좇았거든요. 고난을 좇았는데 주의 영광이 드러났어요. 우리에게 이런 거 있잖아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이건 내 십자가야” 그러는데, 그건 내 십자가 아니고 자기가 잘못한 거고요!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받을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참고 가는 것, 자기 영광을 내려놓는 것, 그게 십자가거든요.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제 후배 하나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는 이담에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도 하고 가난한 사람 돕고 싶대요.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냐 하면 “너 진짜 가난해봐야겠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가난은 싫대요. 그래서 제가 이랬어요. “그러면 너 나쁜 놈이야. 가난해봐야 돈이 귀한 것도 알고 가난한 자를 베풀 줄도 알게 되지. 너, 그 말은 실제로 말하면 네가 돈 많이 벌고 싶다는 말이잖아! 주님 빙자해서 너를 드러내고 싶잖아!” 우리가 주님의 표적이 되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내가 주님 좇으면 돈도 내려놓아야 돼. 건강도, 내가 좋아하는 것도 포기해야 돼” 하는 자기 욕심이 그 안에 가득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주님의 표적이 되는 게 얼마나 영광인가, 나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 이런 주님 쪽의 마음이 없는 거예요. 실제로는요. 제가 목사가 되어 너무 감사한 게 있어요. 물론 기독교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다시 태어나도 “너 목사 될래?” 그러면 저는 감사해요. 왜냐하면 설교단 위에 올라가 하나님 말씀 전할 때마다 이런 마음이 들어요. ‘나 같은 놈이 주의 말씀을 전한다니!’ 그런데 나 같은 놈이 전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드러나면 안 되잖아요.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어떤 때 고난에 빠뜨리고 해서 힘든데, 그런데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야 저런 놈이 말씀을 전하네!” 하면서 표적을 만들더라고요. 내게 진짜 주님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주님의 표적이 되는 것을 기뻐할 텐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 바벨탑을 쌓고 싶은 거지요. 내 이름을 내자는 것이지 실제로는 쓰임받기 싫은 거예요. 욕심이에요. 내려놓아야죠.
요나가 박넝쿨 없어진 것에 대해 화를 내잖아요. 사람들이 “그깟 박넝쿨 하나 가지고 그러냐?” 말하는데 저는 이게 마음에 깊이 이해가 가요. 제가 집회 끝나고요, 하나님이 붙잡아주셔서 많은 청년들에게 은혜 주고 인정도 받았어요. 대단한 거잖아요. 그런데 차 타고 돌아오다가 누가 휙 끼어들 때 “저 씨!” 이렇게 말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조금만 불편하면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서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이지 내가 잘 해서도 아니고요. ‘내가 멋있는 놈이 아니구나, 여전히 나는 불편한 놈이구나. 그런데 이렇게 만든 하나님이 놀랍구나!’ 우리가 이런 두려움이 없으면 안 될 거 같아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목사의 가장 큰 죄는 성적, 물질적 타락이 아니고 ‘나태함’이라는 말을 했어요. 나태하면 박넝쿨 하나에도 우리가 하나님 반대편에 설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 교인에게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담임목사인 저를 위해 기도할 의무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딱 한마디면 돼요. “우리 담임목사님, 하나님 두려워하는 목사님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박넝쿨 하나 없어져도 하나님께 덤비잖아요. 그런데 그게 제 안에서 순간순간 올라와요. 그런 게 우리인 것 같아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나태하지 않으려는 경건을 지켜가야지, 아니면 한순간에 훅 날아갈 수 있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저는 요나서를 보면서 회개 많이 했고 또 거룩하게 살려는 다짐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책을 쓸 때 성경에 대한 책을 계속 쓰고 싶어요. 이 책 하나 읽으면 적어도 뭔가 좀 남게 말이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요나서를 쓰게 됐는데, 왜 쓰게 하셨는가 생각했어요. 신앙이 자라려면 무엇보다 자기 걸 내려놓고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자라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선지서 중에서 요나서를 쓰게 했는가를 생각할 때 “먼저 고집을 내려놓으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열심과 마음을 좀 봐라. 하나님이 옳다는 걸 좀 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방향성을 돌이키지 않으면 어떤 지혜와 지식과 달란트를 줘도 그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요나서를 쓰게 하지 않으셨는가 싶어요. “요나가 그랬어. 요나가 박넝쿨 보고 화냈어”라고만 하지 말고 ‘내가 요나였다면 나는 어떻게 여기서 반응했을까?’ 생각하고, 요나서를 덮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내가 하나님 사랑에서 얼마나 반대편에 섰는지를 깨닫고 고집을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에게 표적이 된 것처럼, 내가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표적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 좋겠어요.

내가 널 쓰고 싶다 - 나보다 나를 더 쓰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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