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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영 목사님
온라인 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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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목회 23년째 되던 해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 안식년을 가지면서 주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한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제가 배우고 가르쳤던 내용을 제 삶으로 가져오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늘 이야기하고 설교했던 것은 “주님이 사랑이시고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었는데, 정작 제 자신은 그걸 많이 누리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안식년 기간에는 아침에 묵상을 시작하면 끝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뒤에 정해진 스케줄이 없으니까요. 안식년 동안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깊이’라고 해서 뭘 집요하게 파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떠오른 생각을 빨리 정리하려 하지 않고, 내게 어떤 감정,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살핀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더, 더 가까이》라는 책 이름은 새벽에 기도하면서 주님이 제 마음에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아기가 웃으면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그것이 웃음이 가진 본질이잖아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그렇게 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보면 다가가고 싶고, 다가갈수록 아이의 미소와 기쁨이 마음에 더 다가오잖아요.
사실 주님이 그렇게 (아기처럼) 계신 분이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친밀함은 우리 안의 소원이지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 친밀함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출판사에서도 제가 안식년을 다녀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기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책으로 쓰면 좋겠다고 해서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분들이 관계를 중시하는 분들이라는 게 추천사를 써주신 중요한 이유에요. 영문으로 번역된 제 책을 보지 않고서 추천사를 쓸 수가 없는 분들이거든요. 많이 알려지고 공적인 분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분들에게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 분들이라는 점이에요. 일(레노바레 사역) 때문에 저를 만나시지만 절대로 일 때문에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셔요. 그래서 리처드 포스터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사역하실 때, 제게 보내주신 메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잠깐 하다 그만 둘 일은 영원히 하지 말고 영원히 할 일만 계속하자.”
어떤 일의 성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셔요. 그러니까 한국에 오시면 아무리 바쁘셔도 꼭 저를 만나고 가시고 함께 시간을 가져주시고, 그렇게 해서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셔요.
사실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아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본인이 가진 고민을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말해주십니다. 일 년에 한번은 꼭 만나야 돼요. 이사회 참석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의무처럼 만남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관계는 만남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미국 가서 뵈면 “아침 같이 하자” 그러셔요. 포스터 목사님의 사모님이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거든요. 그 일로 본인의 어려운 마음도 나눠주셔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덴버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본인 안에 있는 고민을 말씀하셨어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요?”라고 했을 때, 그분 안에 혼돈이 있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십자가 위의 예수님도 혼돈을 겪으셨다는 것이죠.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마음을 이어가는 관계를 만드시는 것이죠.
사실 제가 추천사를 받을 만해서 써주셨다기보다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책을 냈다니까 축복하는 마음으로 써주신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게 좀 깊은 주제이고 간단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분명한 게 하나 있지요. 고난은 어려운 거라는 사실입니다. 자잘한 고난보다 진짜 센 고난을 만나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고난은 하나님 음성의 증폭기(amplifier)”라고 C. S. 루이스가 표현했듯이, 우리가 정말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해결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니까요. 그래서 고난이 친밀함으로 가는 중요한 길인 것 같습니다. 괴로움 속에서 우리가 기댈 것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 고난을 직면하면 이뤄지는 것이죠.
그런데 고난이 있는 삶이 있고 고난을 대면하는 삶이 있는 것 같아요. 고난을 쳐다보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주님 말고는 붙들 분이 없고, 그 모든 일에 또 내 문제가 담겨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좌절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제가 그런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언젠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구시렁대며 ‘하나님이 이런 것도 안 도와주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주님이 제 곁에서 같이 괴로워하시고 저와 더불어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들이 해결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저를 지탱해주시고(sustaining) 같이 계셔주시는 사랑의 모습이었어요. 그것이 제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열쇠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냐. J. I. 패커 같은 분이 그런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우리가 지식적으론 이해가 되잖아요. 누구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직접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이 현대인들에겐 너무 얕은 것이죠.
사실 현대적 사고라는 것이 17,18세기 이후에 고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깊이 있는 생각이기보다 주로 맞느냐 틀리냐를 확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실험을 했더니 참이다 혹은 기대하는 결과가 안 나왔으니 틀린 지식이다라는 식이지요. 아주 중요한 과학적 기반에서 출발한 지식이긴 하지만 삶의 문제를 다루기엔 너무 얄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지식은 지식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끝나버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삶으로 그 지식을 가져오는 것은 ‘활용’이라는 측면밖에는 없습니다.
헨리 나우엔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을 대할 때 소유해야 될 자산이나 이용해야 할 자원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멈춘다고 말이죠. 그게 아니라 자연을 나와 더불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여지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특별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내용이 어떤 명제로 있는 것과 그분을 아는 내용이 내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 하고의 차이거든요.
우리가 말을 하다 보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명료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마음을 다루는 말을 요즘엔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우리가 학교에서 주로 배우고 수업한 것이 계산하고 정리하고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쪽이어서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에요. 그런데 아는 정보를 가진 것이 있고 앎이 일으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앎을 일으키는 기쁨이 있으면 앎을 즐거워하게 되요. 그런 걸로 분간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친밀감도 그런 거잖아요.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그래서 대상을 좋아하니까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이거든요.
한마디로 답을 말하면 성령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성령의 역사가 인침(도장을 찍음)이라고 그러잖아요. 문서가 있는데 도장을 찍어서 효력을 가지게 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지식이 내 삶에 효험이 있도록 하시는 이가 성령님이란 말입니다. 그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지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게 좀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기도 같아요. 그래서 말씀과 기도를 늘 이야기하는데, 생각을 주님 앞에서 꺼내보는 게 기도잖아요. 그런 기도의 과정을 가지다 보면 내가 그 지식 또는 내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으면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고 반면 너무나 기다렸던 말씀이었다라는 사람도 있지요.
감성이 영혼의 주소라고 표현하는데, 이런 부분들을 다루는 훈련을 안 해서 그렇지 낯설고 이상한 건 아니에요. 또 마음으로 내려오는 것이 특별히 무슨 새로운 지식이 번쩍 뜨이고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안에) 있던 거예요. 그것이 내 삶에서 내 기쁨으로 발견되고 삶으로 살아가고 싶은 게 되는 것이지요.
첫 번째로 사랑에 이끌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예로 무지개의 사랑으로 저를 (남아공에서) 안식년을 가지도록 이끄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제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죠.
우리가 친밀함을 소원한다고 친밀해지는 건 아니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 소원은 있지요. 하나님과 친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그것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그대로, 대상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이끌려서 친밀해지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동의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이끌리는 것이 내게는 친밀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갔을 때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 같은 성경책을 보고 간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정리된 책을 갖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해요.
저는 ‘명제적 진리의 정리의 중요성’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축복이에요. 보수적 신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놀라운 축복이죠. 신앙을 정리해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글자로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를 의지하면 죽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3장 6절).
바울이 이 말씀을 왜 썼을까요? 문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말씀은 나의 내면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음성입니다. 그걸 우리가 말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문자, 하나님의 글이라고 말하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을 글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우리나라 말이 아주 최고에요. 영어로 ‘Word’는 그 어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우리가 오랫동안 말씀이라고 이야기했던 그것, 하나님이 내 영혼에 건네시는 그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것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다가가는 친밀함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해요.

세 번째로 언약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사랑과 언약이 어찌 보면 같은 것이긴 해요. 그런데 사랑에 이끌리는 정서(감정)가 있다면 언약은 확정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친밀함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고정해놓으신 것을 우리더러 보라는 것이지요.
사랑에 이끌리고, 그 사랑이 내 영혼에 건네는 언어(말씀)로 다가오시고, 하나님이 전능하신 왕으로서 확정하고 진행하신다는 믿음의 기반 위에서 친밀함은 시작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목회를 하면서 지도한다는 일에 그다지 자신이 없어요. 목자에 대한 그런 기대가 틀린 건 아니에요. 제가 경험한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너무 많이 보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은혜가 있다면, 신앙생활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체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또 같이 공유하는 체험 속에서 나누는 게 신앙생활 아니겠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이 폭력적이지 않으세요. “너 이거 모르지? 알아야 해!” 이렇게 지시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고민과 더불어 묻혀 계시기도 하시잖아요. 어떤 때는 우리의 무지 속에 그냥 묻혀 계실 때도 있잖아요. 우리가 그 무지를 깨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도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는 그런 긴 시간의 기다림이 있잖아요.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라스 윌라드 목사님이 하신 이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관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듀얼 모드’(dual mode)라는 표현을 했는데 우리에게 이중으로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 갓피플에서 저를 인터뷰하고 있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건 뭐에요? 제가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세요?” 하고 하나님께 묻고 있거든요. 이처럼 하나님과 묻고 살아가는 게 신앙생활이죠.
교회 나오는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자면 인격적인 동행이 아니겠어요? 그 동행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대화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라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게 실질적인 영적 성장에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정리하는 노력보다는 마음을 나누려는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냥 읽어가다 보면 논리적으로나 구성면에서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물론 논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핵심을 마음을 움직이는 데 두었거든요. 그래서 책 읽기의 다른 방법을 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책을 보면 목차 먼저 보고 대충 읽고 말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거든요. 그건 정보를 얻으려는 태도에요. 그런데 정보를 얻으려는 태도로만 책을 읽으면 그 책의 가치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보면서 저자인 저를 느껴보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앞부분에 제 이야기도 나눈 것입니다. ‘도대체 한 목회자가 목회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얼 느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런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저와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하나님과 더, 더 가까이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더 가까이 - 날마다 더 주님과 친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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