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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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평 ( 실구매자 평점 1996점 )  
신형만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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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비교신학 시리즈에 관심을 갖을 때에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혹은 설교를 준비하다가 부딪히게 되는 신학적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 중에서도 여러 학설이 있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내용이 일치하기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내용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온 비교신학은 굉장히 적절하고 근본적인 내용을 닮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또 그 내용을 서로 주고 받는 학자들의 이름도 마음에 든다.
[구매자평]비교신학 시리즈에 관심을 갖을 때에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혹은 설교를 준비하다가 부딪히게 되는 신학적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 중에서도 여러 학설이 있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내용이 일치하기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내용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온 비교신학은 굉장히 적절하고 근본적인 내용을 닮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또 그 내용을 서로 주고 받는 학자들의 이름도 마음에 든다.
(작성일 2020.10.26)
반드시 알아야 할 칭의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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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칭의 문제는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님에는 분명한듯 합니다. 본서는 칭의에 대해 다섯가지 관점을 다룹니다. 가장 정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으로 부터 가장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이라 불리우는 톰라이트 계열의 관점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칩니다. 때로는 첨예할 수 있으나, 때로는 서로가 형제우애의 겸손으로 토론에 임합니다. 칭의와 성화라는 이 땅에서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긴장에 대해 이 책은 나름대로의 생각할 거리를 주는것 같습니다.
[구매자평]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칭의 문제는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님에는 분명한듯 합니다. 본서는 칭의에 대해 다섯가지 관점을 다룹니다. 가장 정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으로 부터 가장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이라 불리우는 톰라이트 계열의 관점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칩니다. 때로는 첨예할 수 있으나, 때로는 서로가 형제우애의 겸손으로 토론에 임합니다. 칭의와 성화라는 이 땅에서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긴장에 대해 이 책은 나름대로의 생각할 거리를 주는것 같습니다.
(작성일 2020.05.26)
임정민
칭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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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새 관점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내가 요즘 절실히 느끼는 바는, 오늘날 이 한국이라는 땅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선민의식에 젖은 몇몇 개혁교회를 볼 때 나는 바울의 이 말이 여전히 적실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그렇지만 새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이방인일 뿐이지, 유대인일 수 없는 것 아닐까. 새 관점은 오늘 우리와 상관 없는 옛날 얘기만 하고 그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중세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종교개혁마저 쓸모없었던 일로 여기는 거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뇌피셜이다.
[구매자평]새 관점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내가 요즘 절실히 느끼는 바는, 오늘날 이 한국이라는 땅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선민의식에 젖은 몇몇 개혁교회를 볼 때 나는 바울의 이 말이 여전히 적실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그렇지만 새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이방인일 뿐이지, 유대인일 수 없는 것 아닐까. 새 관점은 오늘 우리와 상관 없는 옛날 얘기만 하고 그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중세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종교개혁마저 쓸모없었던 일로 여기는 거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뇌피셜이다.
(작성일 2020.02.01)
김민성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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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칭의논쟁은 이전에 한번 읽어보았는데, 새롭게 책을 발견하여 구매해보았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차이점에 대해서 배우며 읽어 나아갈 때, 각 학자들의 주장하는 바를 알며 비교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교리적인 궁금함을 해결하거나 이와 관련하여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편하게 읽기보다는 연구나 학업을 위해서 구매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구성은 아주 좋습니다!
[구매자평]칭의논쟁은 이전에 한번 읽어보았는데, 새롭게 책을 발견하여 구매해보았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차이점에 대해서 배우며 읽어 나아갈 때, 각 학자들의 주장하는 바를 알며 비교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교리적인 궁금함을 해결하거나 이와 관련하여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편하게 읽기보다는 연구나 학업을 위해서 구매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구성은 아주 좋습니다!
(작성일 2020.01.05)
오승민
현대 칭의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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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현재 칭의에 관한 논쟁은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등이 선구자가 된 새관점 학파와 전통에 속한 개혁주의자들이 뜨겁게 진행하고 있다. 그것에 대하나 자세한 내용을 마이클 호튼, 제임스던 등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카톨릭, 성공회 등 다른 교파들의 칭의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고 서로가 비평하는 형식을 담음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론이 어디까지 연구 되었으며 각 독자가 칭의에 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구매자평]현재 칭의에 관한 논쟁은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등이 선구자가 된 새관점 학파와 전통에 속한 개혁주의자들이 뜨겁게 진행하고 있다. 그것에 대하나 자세한 내용을 마이클 호튼, 제임스던 등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카톨릭, 성공회 등 다른 교파들의 칭의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고 서로가 비평하는 형식을 담음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론이 어디까지 연구 되었으며 각 독자가 칭의에 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성일 2018.10.04)
한경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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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칭의논쟁이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지금, 이 책은 칭의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오늘날 칭의에 대한 관점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각자의 신학적 뿌리에서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해야 하며 또 그리 했을 때의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칭의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혹 또 연구하고자 하면 본 책을 추천합니다.
[구매자평]칭의논쟁이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지금, 이 책은 칭의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오늘날 칭의에 대한 관점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각자의 신학적 뿌리에서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해야 하며 또 그리 했을 때의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칭의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혹 또 연구하고자 하면 본 책을 추천합니다.
(작성일 2018.09.13)
이상민
칭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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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20-30년 전부터 불어닥친 바울신학의 새 관점 학파들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목숨걸고 지켜왔던 칭의의 교리가 위기에 처해 있은 시기가 되었다.그리고 청교도들의 성경적 복음, 칭의, 구원론과는 너무 동떨어졌던 왜곡된 복음에 대항하여바른 진리를 지켜왔듯이 지금도 칭의교리의 왜곡이 심각한 시점이 되었다.그래서 이 책을 구입하였다. 칭의 논쟁에 대해 더 정확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구매자평]20-30년 전부터 불어닥친 바울신학의 새 관점 학파들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목숨걸고 지켜왔던 칭의의 교리가 위기에 처해 있은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성경적 복음, 칭의, 구원론과는 너무 동떨어졌던 왜곡된 복음에 대항하여
바른 진리를 지켜왔듯이 지금도 칭의교리의 왜곡이 심각한 시점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하였다. 칭의 논쟁에 대해 더 정확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작성일 2018.06.20)
KIMJIHOON
칭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접근 방식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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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그동안 개신교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왔었기 때문에 사실 다른 복음주의 계열의 기독교인들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각 분야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신학자들이 함께 하나의 주제로 토론을 하는 과정을 보면서관점을 넓히는게 매우 중요함을 배웠다.본인은 개혁주의의 칭의론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다. 하지만, 개혁주의라고단점이 없을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혁주의 칭의론이 100점에 가까울까?그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개혁주의 진영의 칭의론이 종교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약간 딱딱하고,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이 책을 읽은 본인은 정통 개혁주의의 칭의론이 카톨릭이나 새관점 보다는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정확하고 성경적인 칭의론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종교개혁이란 상황에서 나온 칭의론이기 때문에 "칭의의 법정적인 측면"만너무 강조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때문에 로마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행위심판(모든 것을 행한대로 심판하고, 평가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칭의론 때문에 칭의가 가져오는 여러 다른 아름다운 모습들을 소홀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개혁주의 칭의론의 법정적 선포 개념 때문에,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로 연합되는모습을 소홀히 했고(동방정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인협력적 개념), 이로 인해서 어찌보면성도들에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작은 면죄부를 가져다 준게 아니가 싶기도 했다.그리고, 법정적인 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성화는 부차적인 과정으로, 그다지 필수적이지 않는, 여분의 과정처럼 받아들여지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분명히 다른 칭의론 보다 훨씬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을 잘 대변한다. 하지만, 우리가가진 칭의론이 더욱 정확하고 성경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진 장점에만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바로 편식하는 신자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온전한 형태의 신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학자들이 다른 신학자들을 대상으로작성한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대를 살아 가면서 칭의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는 모든 성도/목회자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그리고, 개혁주의의 속한 목회자들이라고 해도 열린 마음으로 다른 진영에 속한신학자들의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또한,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잘못전달되어온 (지적인 동의만을 가리키는)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재고되길 바란다.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 행동/사랑/희생/회개를 떼어 놓을 수 없는역동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구매자평]그동안 개신교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왔었기 때문에 사실 다른 복음주의 계열의 기독교인들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각 분야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신학자들이 함께 하나의 주제로 토론을 하는 과정을 보면서

관점을 넓히는게 매우 중요함을 배웠다.

본인은 개혁주의의 칭의론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다. 하지만, 개혁주의라고

단점이 없을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혁주의 칭의론이 100점에 가까울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개혁주의 진영의 칭의론이

종교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약간 딱딱하고,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본인은 정통 개혁주의의 칭의론이 카톨릭이나 새관점 보다는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정확하고 성경적인 칭의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이란 상황에서 나온 칭의론이기 때문에 "칭의의 법정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때문에 로마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행위심판(모든 것을 행한대로 심판하고, 평가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칭의론 때문에

칭의가 가져오는 여러 다른 아름다운 모습들을 소홀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개혁주의 칭의론의 법정적 선포 개념 때문에,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로 연합되는

모습을 소홀히 했고(동방정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인협력적 개념), 이로 인해서 어찌보면

성도들에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작은 면죄부를 가져다 준게 아니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법정적인 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성화는 부차적인 과정으로, 그다지 필수적이지

않는, 여분의 과정처럼 받아들여지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분명히 다른 칭의론 보다 훨씬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을 잘 대변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칭의론이 더욱 정확하고 성경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진 장점에만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바로 편식하는 신자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온전한 형태의 신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학자들이 다른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대를 살아 가면서 칭의의 문제

로 인해 고민하는 모든 성도/목회자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리고, 개혁주의의 속한 목회자들이라고 해도 열린 마음으로 다른 진영에 속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또한,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잘못

전달되어온 (지적인 동의만을 가리키는)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재고되길 바란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 행동/사랑/희생/회개를 떼어 놓을 수 없는

역동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작성일 2017.03.27)
김동현
칭의의 여러가지 관점들에 대해 정리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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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서구 교회에서는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수년전부터아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것이 칭의 논쟁인거 같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거듭남과 회심의 가치가 점점 퇴색되어져 갔는데이제 21세기에는 칭의의 개념마저 흔들려고 하고 있으니 혼란스럽기도 합니다.이책은 5가지의 관점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특히 제임스 던의 바울의 새관점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다른 의견들과비교가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칭의에 대해 좀더 연구하고 고민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구매자평]서구 교회에서는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수년전부터
아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것이 칭의 논쟁인거 같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거듭남과 회심의 가치가 점점 퇴색되어져 갔는데
이제 21세기에는 칭의의 개념마저 흔들려고 하고 있으니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이책은 5가지의 관점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제임스 던의 바울의 새관점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다른 의견들과
비교가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칭의에 대해 좀더 연구하고 고민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작성일 2017.01.13)
곽요환
믿고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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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요즘 개신교에서 신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다양한 부분들의 중요성이 조명되고 있다.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공적인 삶","선교적 삶 또는 교회"가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는 "칭의"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일것이다. 그런데 바울신학의 새관점연구는 보수적 칭의관에 도전이 될만하다. 요즘 다양한 칭의논쟁이 있다. 기독교 신앙에 초석인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한 정립과 깊은 사유를 통해 반석위에 놓인 믿음 되어가게 하지는 않을까?
[구매자평]요즘 개신교에서 신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다양한 부분들의 중요성이 조명되고 있다.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공적인 삶","선교적 삶 또는 교회"가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는 "칭의"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일것이다. 그런데 바울신학의 새관점연구는 보수적 칭의관에 도전이 될만하다. 요즘 다양한 칭의논쟁이 있다. 기독교 신앙에 초석인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한 정립과 깊은 사유를 통해 반석위에 놓인 믿음 되어가게 하지는 않을까?
(작성일 2015.11.28)
조희석
칭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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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칭의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일이다.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롭게 된 증거를 보고자 한다.개혁신학부터 NPP까지 다양한 저자들의 칭의에 대한 견해를 다루고 있으며,여러 신학의 토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이다.신앙적 입장이 다를 경우,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하는 점도 있다.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인간 이해의 한계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깨닫도록 한다.
[구매자평]

칭의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롭게 된 증거를 보고자 한다.

개혁신학부터 NPP까지 다양한 저자들의 칭의에 대한 견해를 다루고 있으며,

여러 신학의 토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이다.


신앙적 입장이 다를 경우,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하는 점도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인간 이해의 한계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깨닫도록 한다.



(작성일 2015.08.27)
박종철
칭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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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인으로서 저는 호튼의 입장에 있습니다. 마이클 버드는 자기 스스로를 일컬어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견지한다, 언약신학 체계를 따른다, 리폼드라고 합니다. 그런 분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전가에 관한 해석에 비판적입니다.  그런 버드에게 진보적 개혁파니 리폼드니 하는 말은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개혁파면 개혁파지 진보적 개혁파? 그런건 없습니다.버드는 168p,222p에서 바울에게 있어 "의"의 개념이 법정적일뿐 아니라 변화시키는 의라는 자기 주장을 위해 슈라이너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슈라이너가 98년에 자신의 BECNT 로마서 주석을 쓸 때만 해도 케제만과 슈툴마허의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였지만, 3년후 2001년 출판된 자신의 바울신학 책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였습니다.(그 책 301쪽) 2008년에 나온 그의 신약신학 책에서도 바울의 의와 칭의 개념은 법정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그 책 338쪽) 버드가 슈라이너 말고 다른 학자를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했었어야 합니다. 학자로서의 부주의함이 보입니다.믿음은 신실함 또는 순종이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을 동일시하는 것은 천주교회적 오류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 안으로 들어가셔서 성취하신 의를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아담을 언약적 머리로 한 행위언약에서 우리가 실패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모두 순종 하셨으며, 행위언약의 위반으로 죄인들이 죽어야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받아 주셨음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존이 믿음 임을 잊지 마십시오.겉으로는 개신교에 속해 있을지 모르나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순간, 16세기의 천주교 트렌트 공의회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죄로 오염된 부패한 행위로 자기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과 구원을 흥정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효력이 없어서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일에  덧붙여져야 할 것 같은 인본주의적 생각을 내려 놓으십시오.참된 믿음의 열매인 행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앙이 진정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가치합니다.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연합으로부터 은혜언약의 이중 은혜인 칭의와 성화를 선물로 받습니다.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령께서 그 사람의 본성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셔서, 성화의 열매가 필연적으로 있도록 일하시며 성화에 힘쓰도록 이끄십니다.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칭의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불완전한 성화는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원인이 아닙니다.칭의와 성화를 혼동하여 뒤섞는 순간,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자기 의를 추구하게 됨을 꼭 잊지 마십시오.이신칭의 교리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걸려 있는 중대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파선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9)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0)
장로교인으로서 저는 호튼의 입장에 있습니다.
마이클 버드는 자기 스스로를 일컬어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견지한다, 언약신학 체계를 따른다, 리폼드라고 합니다. 그런 분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전가에 관한 해석에 비판적입니다.  그런 버드에게 진보적 개혁파니 리폼드니 하는 말은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개혁파면 개혁파지 진보적 개혁파? 그런건 없습니다.
버드는 168p,222p에서 바울에게 있어 "의"의 개념이 법정적일뿐 아니라 변화시키는 의라는 자기 주장을 위해 슈라이너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슈라이너가 98년에 자신의 BECNT 로마서 주석을 쓸 때만 해도 케제만과 슈툴마허의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였지만, 3년후 2001년 출판된 자신의 바울신학 책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였습니다.(그 책 301쪽) 2008년에 나온 그의 신약신학 책에서도 바울의 의와 칭의 개념은 법정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그 책 338쪽) 버드가 슈라이너 말고 다른 학자를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했었어야 합니다. 학자로서의 부주의함이 보입니다.

믿음은 신실함 또는 순종이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을 동일시하는 것은 천주교회적 오류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 안으로 들어가셔서 성취하신 의를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아담을 언약적 머리로 한 행위언약에서 우리가 실패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모두 순종 하셨으며, 행위언약의 위반으로 죄인들이 죽어야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받아 주셨음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존이 믿음 임을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개신교에 속해 있을지 모르나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순간, 16세기의 천주교 트렌트 공의회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죄로 오염된 부패한 행위로 자기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과 구원을 흥정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효력이 없어서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일에  덧붙여져야 할 것 같은 인본주의적 생각을 내려 놓으십시오.
참된 믿음의 열매인 행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앙이 진정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가치합니다.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연합으로부터 은혜언약의 이중 은혜인 칭의와 성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령께서 그 사람의 본성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셔서, 성화의 열매가 필연적으로 있도록 일하시며 성화에 힘쓰도록 이끄십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칭의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불완전한 성화는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원인이 아닙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여 뒤섞는 순간,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자기 의를 추구하게 됨을 꼭 잊지 마십시오.
이신칭의 교리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걸려 있는 중대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파선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9)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0)
(작성일 2015.07.10)
신재원
단순 참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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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1. 전통적 개혁파_마이클 S. 호튼 2. 진보적 개혁파_마이클 F. 버드3. 바울 신학의 새 관점_제임스 D. G. 던4. 신성화_벨리-마티 카르카넨5. 로마 가톨릭_제럴드 오콜린스 & 올리버 P. 래퍼티칭의에 대한 다섯가지 관점을 다루는 책입니다. 4, 5번은 논외로 치더라도, 2, 3번의 경우도 완전히 개혁파의 칭의론에서 벗어난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어차피 그들의 칭의론을 따를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리 언급을 하는 것은 요즘 개혁파라 스스로 말하는 분들도 2, 3번의 견해에 상당히 호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교신학 신학시리즈를 구입할 때는 약간 돈이 아까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호튼은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을 어찌 설명하나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3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선 결국엔 전통파의 언약관으로 반박을 해야하는데, 호튼의 언약관은 전통적 언약관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최소한 저에게는 이도 저도 아닌 책이 되어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견해를 담고 있기에 참고용으로 소장 가치는 인정합니다.
[구매자평]

1. 전통적 개혁파_마이클 S. 호튼 
2. 진보적 개혁파_마이클 F. 버드
3. 바울 신학의 새 관점_제임스 D. G. 던
4. 신성화_벨리-마티 카르카넨
5. 로마 가톨릭_제럴드 오콜린스 & 올리버 P. 래퍼티

칭의에 대한 다섯가지 관점을 다루는 책입니다. 4, 5번은 논외로 치더라도, 2, 3번의 경우도 완전히 개혁파의 칭의론에서 벗어난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어차피 그들의 칭의론을 따를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리 언급을 하는 것은 요즘 개혁파라 스스로 말하는 분들도 2, 3번의 견해에 상당히 호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교신학 신학시리즈를 구입할 때는 약간 돈이 아까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호튼은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을 어찌 설명하나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3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선 결국엔 전통파의 언약관으로 반박을 해야하는데, 호튼의 언약관은 전통적 언약관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최소한 저에게는 이도 저도 아닌 책이 되어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견해를 담고 있기에 참고용으로 소장 가치는 인정합니다.


(작성일 2015.07.02)
조상신
요즘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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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 이슈인 바울 신학자들 안에 새관점과 전통적인 관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칭의론에 대한 논쟁을 다룬 책입니다. 신학적인 내용들이 그렇기에 담겨있지요. 이 책은 나름 결론을 내리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소개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참 궁금하고 빅이슈여서 구입했는데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매자평] 이슈인 바울 신학자들 안에 새관점과 전통적인 관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칭의론에 대한 논쟁을 다룬 책입니다.

 신학적인 내용들이 그렇기에 담겨있지요.

 이 책은 나름 결론을 내리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소개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참 궁금하고 빅이슈여서 구입했는데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성일 2015.06.18)
박창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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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구원론을 강의하기 위해서는 칭의론의 역사 속에 등장한 신학적 쟁점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가톨릭과 개혁주의,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복음주의와 새관점학파 사이의 논쟁을 이해해야만 칭의론의 올바른 이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그 스펙트럼의 기본 구조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많은 쟁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은 이 주제에 탁월한 서적이며 칭의 신학을 잘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신학 패러다임의 종횡을 균형지게 연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처럼 그 신학의 스팩트럼을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뽑아낸 서적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으며 칭의론의 관한 연구에 필수적인 책이라 생각합니다.반드시 일독을 추천합니다.
[구매자평]

구원론을 강의하기 위해서는 칭의론의 역사 속에 등장한

신학적 쟁점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가톨릭과 개혁주의,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복음주의와 새관점학파 사이의 논쟁을

이해해야만 칭의론의 올바른 이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그 스펙트럼의 기본 구조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많은 쟁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은 이 주제에 탁월한 서적이며 칭의 신학을 잘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신학 패러다임의 종횡을 균형지게 연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처럼 그 신학의 스팩트럼을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뽑아낸 서적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으며 칭의론의 관한 연구에 필수적인 책이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일독을 추천합니다.


(작성일 2015.06.11)
박진우
기대되는 스펙트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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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오고 있는 스펙트럼 시리즈는 한 관점에만 머물러있을 수 있는 신학생 및 목회자들이 필수로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판사 대표인 김요한 목사님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다양한 관점의 신학이 정당하게 싸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마음껏 펼쳐진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바울의 새관점이라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유익이 있는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바람직한 토론의 장이 될 것입니다.
[구매자평]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오고 있는 스펙트럼 시리즈는 한 관점에만 머물러있을 수 있는 신학생 및 목회자들이 필수로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판사 대표인 김요한 목사님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다양한 관점의 신학이 정당하게 싸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마음껏 펼쳐진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바울의 새관점이라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유익이 있는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바람직한 토론의 장이 될 것입니다.
(작성일 2015.06.03)
하인수
탁월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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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좋은 책은 널리 읽혀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홍수에 물이 갈한것처럼 기독교 관련한 많은 책들이 난무한 가운데 읽어야 하는 양서는 작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 교리인 칭의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정리한 이 책은 진리를 바라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바라보게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융합과 발전을 위한 비판과 의견제시를 바라보면서 성숙한 태도와 인격도 볼 수 있습니다. 강추합니다. 
[구매자평]좋은 책은 널리 읽혀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홍수에 물이 갈한것처럼 기독교 관련한 많은 책들이 난무한 가운데 읽어야 하는 양서는 작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 교리인 칭의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정리한 이 책은 진리를 바라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바라보게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융합과 발전을 위한 비판과 의견제시를 바라보면서 성숙한 태도와 인격도 볼 수 있습니다. 강추합니다. 

(작성일 2015.05.06)
박종광
칭의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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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칭의논쟁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여라가지 생각을 하게해주는 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라는 부분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여러가지의 생각을 하게되지만 그중에서도 여러부분으로 나누어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바라보는 부분에대하여 각자 다른 생각을 하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크게 두가지로 표현합니다. 구원과 더불어 생각하려하는 부분이 가장클것입니다.
[구매자평]칭의논쟁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여라가지 생각을 하게해주는
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라는 부분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여러가지의 생각을 하게되지만 그중에서도
여러부분으로 나누어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바라보는 부분에대하여 각자 다른 생각을 하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크게 두가지로 표현합니다. 구원과 더불어 생각하려하는 부분이 가장클것입니다.
(작성일 2015.04.25)
이태환
칭의에 관한 다채로운 해석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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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저는 본서를 “전통적 개혁파”와 “새 관점”에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호튼과 던의 입장을 세심히 살피려 애썼으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시고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하시며 의롭다 칭하시는 법정적 선언을 믿습니다. 그리고 칭의는 결국 존재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주해가 상당히 약한 호튼의 글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전통적 입장을 변호하는 분들이 칭의에 관한 글을 쓴다면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 빌붙어 전하기보다는 충실한 주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임스 던은 바울의 이신칭의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 관점이야말로 바울 자신이 변호한 관점이고, 칭의에 관한 바울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새 관점이 “새롭다”고 간주된 것은 그것이 강조하는 것들이 바울 자신의 칭의 교리 형성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가르침이 강조하는 양상이 현대적인 주해 안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새 관점”을 “옛 관점”(old perspettive)의 대체자로 간주하지 않아야 하며, “새 관점”은 “옛 관점”에 적대적이거나 대립적이지도 않다고도 밝힙니다.   새 관점은 유대교를 향한 기독교인의 전통적인 태도와 관점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1세기 유대교를 할 수 있는 한 부정적으로 그렸던 전통적인 그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루터는 유대교를 향한 바울의 행동을 중세 가톨릭교회에 맞서는 행동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루터에게는 면죄부를 사는 이들에게 죄 용서를 제공한 중세 가톨릭의 타락이 행위 칭의를 가르친 유대교의 타락처럼 보였습니다. 던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입장이 바울 주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극도로 부정적인 반대 양상으로만 다루면 바울을 타당하게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묘사된 유대교는 유대인들이 이해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던은 전통적으로 유대교에 반감을 가진 기독교가 유대교를 왜곡하고 일그러뜨렸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쿰란 공동체 규칙(11.11-15)을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신실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인간이 존재하며 유지되고 의롭게 됨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새 관점은 유대교의 이러한 관점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칭의 논쟁>은 신학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를 가지고 제시하며, 반대되는 해석에 대해서는 비평합니다. 이것이 본서의 장점이자 구성입니다. 칭의에 관해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입니다.  
[구매자평]

저는 본서를 “전통적 개혁파”와 “새 관점”에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호튼과 던의 입장을 세심히 살피려 애썼으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시고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하시며 의롭다 칭하시는 법정적 선언을 믿습니다. 그리고 칭의는 결국 존재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주해가 상당히 약한 호튼의 글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전통적 입장을 변호하는 분들이 칭의에 관한 글을 쓴다면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 빌붙어 전하기보다는 충실한 주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임스 던은 바울의 이신칭의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 관점이야말로 바울 자신이 변호한 관점이고, 칭의에 관한 바울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새 관점이 “새롭다”고 간주된 것은 그것이 강조하는 것들이 바울 자신의 칭의 교리 형성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가르침이 강조하는 양상이 현대적인 주해 안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새 관점”을 “옛 관점”(old perspettive)의 대체자로 간주하지 않아야 하며, “새 관점”은 “옛 관점”에 적대적이거나 대립적이지도 않다고도 밝힙니다.

 

새 관점은 유대교를 향한 기독교인의 전통적인 태도와 관점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1세기 유대교를 할 수 있는 한 부정적으로 그렸던 전통적인 그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루터는 유대교를 향한 바울의 행동을 중세 가톨릭교회에 맞서는 행동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루터에게는 면죄부를 사는 이들에게 죄 용서를 제공한 중세 가톨릭의 타락이 행위 칭의를 가르친 유대교의 타락처럼 보였습니다.


던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입장이 바울 주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극도로 부정적인 반대 양상으로만 다루면 바울을 타당하게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묘사된 유대교는 유대인들이 이해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던은 전통적으로 유대교에 반감을 가진 기독교가 유대교를 왜곡하고 일그러뜨렸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쿰란 공동체 규칙(11.11-15)을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신실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인간이 존재하며 유지되고 의롭게 됨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새 관점은 유대교의 이러한 관점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칭의 논쟁>은 신학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를 가지고 제시하며, 반대되는 해석에 대해서는 비평합니다. 이것이 본서의 장점이자 구성입니다. 칭의에 관해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입니다.  


(작성일 2015.04.08)
김길호
논쟁을 통해 얻는 유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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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칭의 논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루터)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관점, 정교회(신성화), 로마 가톨릭 이렇게 다섯이다. 이들 다섯 신학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한 첫 번째 칭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한 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관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와 이 개혁파와 입장을 달리하는 넷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난 전통적 개혁파의 속한 장로교 목사로서 마이클 호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려진 무죄 판결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호튼의 말대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성화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는 여기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전 9:27).   바울의 새관점이나 진보적 개혁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신성화는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들은 결국 선행이 구원과 결부되며 칭의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의를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성령과 함께 한 우리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중요한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희미해지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학의 한계는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책에 소개된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짜피 중요한 교의학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이것이 개신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던 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교파의 다양성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 대화하지 않고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런 논쟁을 통해 결국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가진 견해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한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가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 견해들을 읽으면서 특히 바울신학의 새관점과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다섯 관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다. 개혁파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를 통해 이루어가든 나머지 네 관점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라고 하든 결국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칭의론에 대한 이런 균열은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두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연구한 열매들이지 않는가! 인간과 신학의 한계 때문에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의 논쟁을 통해서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서 신학은 서로 배우며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런 대화와 논쟁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칭의 논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루터)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관점, 정교회(신성화), 로마 가톨릭 이렇게 다섯이다. 이들 다섯 신학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한 첫 번째 칭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한 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관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와 이 개혁파와 입장을 달리하는 넷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난 전통적 개혁파의 속한 장로교 목사로서 마이클 호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려진 무죄 판결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호튼의 말대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성화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는 여기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전 9:27).

 

바울의 새관점이나 진보적 개혁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신성화는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들은 결국 선행이 구원과 결부되며 칭의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의를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성령과 함께 한 우리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중요한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희미해지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학의 한계는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책에 소개된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짜피 중요한 교의학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이것이 개신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던 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교파의 다양성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 대화하지 않고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런 논쟁을 통해 결국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가진 견해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한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가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 견해들을 읽으면서 특히 바울신학의 새관점과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다섯 관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다. 개혁파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를 통해 이루어가든 나머지 네 관점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라고 하든 결국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칭의론에 대한 이런 균열은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두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연구한 열매들이지 않는가! 인간과 신학의 한계 때문에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의 논쟁을 통해서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서 신학은 서로 배우며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런 대화와 논쟁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성일 2015.04.07)
이기척
다양한 칭의 견해, 풍성한 구원의 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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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주 목요일이면 캠퍼스에 올라가 복음을 전한다. 대표적인 도구가 사영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하는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마지막에 영접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그 선택의 찰나에 거부하는 영혼도 만나지만 받아들이는 영혼도 만난다. 거부하는 이를 만날 때면 순간 안타까운 맘이 든다. 그런데 영접하겠다고 할 때면 감사하기도 하지만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 짧은 시간에 영접기도를 따라한 저분에게 정말 구원이 임했는지 사실 혼란스러울 때고 종종 있다. 구원이 행위 없이 입으로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군대에서 집단으로 몇 천 명 세례를 준다는 발표를 마냥 좋아해도 되는 것 일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구원일까?   ‘이신칭의’논쟁은 신학적 문제를 넘어 우리 목회의 현장, 개인의 신앙에 이렇듯 직결되는 문제다. 구원이 법정적인지, 관계적인지, 예수에 대한 나의 믿음의 구원인지, 예수의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현재의 칭의가 미래의 칭의를 보장해 주는 지등 덮어 놓고 믿은 주제에 대해 ‘칭의 논쟁’은 자신 있게 논란의 중심으로 이끈다. 다른 견해이지만 설득적이고 타당하다. ‘이신칭의’라는 주제로 역사적인 배경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파부터 진보적 개혁파, 최근의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포함한 5가지 관점으로 큰 그림을 통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다르지만 틀리지 않고 그렇기에 오히려 풍성하고 깊다.   이런 논쟁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스케일로 우리를 넓혀 준다고 믿는다. 우선 구원을 위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행을 하거나 노력할 필요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렇기에 ‘이신칭의’는 우리를 겸손케 한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롬3:26-27)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자는 결코 삶이 방종으로 치닫지는 않게 된다. 은혜를 알기에 감사를 삶속에 표현하게 되고 그것이 순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열매 맺게 된다.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 때까지 ‘이미-아직’의 구도 속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한 가지 관점 속에 자신의 논리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한 풍성한 구도자의 자세를 갖게 될 거라 확신한다.

요즘 매주 목요일이면 캠퍼스에 올라가 복음을 전한다. 대표적인 도구가 사영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하는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마지막에 영접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그 선택의 찰나에 거부하는 영혼도 만나지만 받아들이는 영혼도 만난다. 거부하는 이를 만날 때면 순간 안타까운 맘이 든다. 그런데 영접하겠다고 할 때면 감사하기도 하지만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 짧은 시간에 영접기도를 따라한 저분에게 정말 구원이 임했는지 사실 혼란스러울 때고 종종 있다. 구원이 행위 없이 입으로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군대에서 집단으로 몇 천 명 세례를 준다는 발표를 마냥 좋아해도 되는 것 일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구원일까?

 

‘이신칭의’논쟁은 신학적 문제를 넘어 우리 목회의 현장, 개인의 신앙에 이렇듯 직결되는 문제다. 구원이 법정적인지, 관계적인지, 예수에 대한 나의 믿음의 구원인지, 예수의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현재의 칭의가 미래의 칭의를 보장해 주는 지등 덮어 놓고 믿은 주제에 대해 ‘칭의 논쟁’은 자신 있게 논란의 중심으로 이끈다. 다른 견해이지만 설득적이고 타당하다. ‘이신칭의’라는 주제로 역사적인 배경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파부터 진보적 개혁파, 최근의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포함한 5가지 관점으로 큰 그림을 통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다르지만 틀리지 않고 그렇기에 오히려 풍성하고 깊다.

 

이런 논쟁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스케일로 우리를 넓혀 준다고 믿는다. 우선 구원을 위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행을 하거나 노력할 필요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렇기에 ‘이신칭의’는 우리를 겸손케 한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롬3:26-27)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자는 결코 삶이 방종으로 치닫지는 않게 된다. 은혜를 알기에 감사를 삶속에 표현하게 되고 그것이 순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열매 맺게 된다.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 때까지 ‘이미-아직’의 구도 속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한 가지 관점 속에 자신의 논리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한 풍성한 구도자의 자세를 갖게 될 거라 확신한다.


(작성일 2015.04.07)
이강문
논쟁이 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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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모난 놈은 정 맞기’ 십상이고, ‘말 많은 놈은 빨갱이’로 의심 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심지어 주문하는 음식도 통일시키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하는 비결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무슨 안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보라. 자칫 믿음 없는 사람이란 의심의 눈총이 날아들지 모른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칭의 논쟁』의 부제는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졈이다. 16세기 이후, 교회의 심장이자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조항으로 받아들여지는 ‘칭의’에 대해 이토록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글과 다른 네 입장의 논평으로 정리해 놓은 이 책은 몹시 매력적이다. 논평에 참여하는 입장들은 전통적 개혁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신성화,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다. 특별히 신성화로 대표되는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쉽게 접할 수 없던 부분이라 호기심을 자극한다. 칭의에 대한 이견은 이미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더욱이 교회의 에큐메니컬 상황과 소위 ‘사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젼이라는 바울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더해지면서 칭의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칭의에 대한 논쟁과 질문들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칭의는 법적인가 아니면 효력적인가?’ ‘칭의는 과정인가 순간인가?’ ‘칭의는 분석적인가 종합적인가?’ 각 입장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서주해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에 익숙하지만, 다른 주장들, 특히 진보적 개혁파와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해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칭의에 대한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의 끄트머리 어디쯤인가 보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에 혼돈만을 야기할까 봐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논평자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한다. 다양한 관점에 대한 성찬으로 말미암아 내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 또 다른 입장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다 선명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건설적인 토론 문화가 이 땅과 한국 교회에도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다. 전통적 개혁파 입장을 견지한 마이클 S. 호튼은 한 논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진심 어린 기도는 우리가 성서로 함께 돌아가서 진리의 성령에 의지하여 성서 텍스트와 씨름하는 것이다”(443).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보색끼리 나란히 두면 각각의 색상이 더 부각되는 법이다.


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모난 놈은 정 맞기’ 십상이고, ‘말 많은 놈은 빨갱이’로 의심 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심지어 주문하는 음식도 통일시키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하는 비결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무슨 안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보라. 자칫 믿음 없는 사람이란 의심의 눈총이 날아들지 모른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칭의 논쟁』의 부제는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졈이다. 16세기 이후, 교회의 심장이자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조항으로 받아들여지는 ‘칭의’에 대해 이토록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글과 다른 네 입장의 논평으로 정리해 놓은 이 책은 몹시 매력적이다. 논평에 참여하는 입장들은 전통적 개혁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신성화,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다. 특별히 신성화로 대표되는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쉽게 접할 수 없던 부분이라 호기심을 자극한다.

칭의에 대한 이견은 이미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더욱이 교회의 에큐메니컬 상황과 소위 ‘사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젼이라는 바울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더해지면서 칭의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칭의에 대한 논쟁과 질문들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칭의는 법적인가 아니면 효력적인가?’ ‘칭의는 과정인가 순간인가?’ ‘칭의는 분석적인가 종합적인가?’ 각 입장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서주해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에 익숙하지만, 다른 주장들, 특히 진보적 개혁파와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해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칭의에 대한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의 끄트머리 어디쯤인가 보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에 혼돈만을 야기할까 봐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논평자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한다. 다양한 관점에 대한 성찬으로 말미암아 내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 또 다른 입장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다 선명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건설적인 토론 문화가 이 땅과 한국 교회에도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다. 전통적 개혁파 입장을 견지한 마이클 S. 호튼은 한 논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진심 어린 기도는 우리가 성서로 함께 돌아가서 진리의 성령에 의지하여 성서 텍스트와 씨름하는 것이다”(443).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보색끼리 나란히 두면 각각의 색상이 더 부각되는 법이다.


(작성일 2015.04.07)
김양현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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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는 나를 혼란케 했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게 뭐지? 그 딜레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신학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얕고 좁은 신학체계에 있었다는 것을 곁눈질로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이신칭의’라는 말을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써 천국간다는 말이 우리의 모토였다. 훗날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기 보다는 절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 시인하는 수준, 말로써 예수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이해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다. 어쨌든 천국을 갈 테니 삶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실 천국을 간다는 것도 정확히 맞는 말이 아니었다. 천국은 이미 우리의 삶에 시작된 것이니.)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주제를 루터가 들고 거대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내부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4세기에 절정을 이룬 신학 풍토인 via modrena적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행위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남발되어 헌금 강요, 선한 일 강요-선한 일은 결국 돈과 직결되었다-로 이어졌고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가 강조하고 들었던 무기가 ‘이신칭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에 있다.’ 물론 루터 역시 칭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변화된 지위로서 우리에게 수반되는 선한 행위를 간과하진 않았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오직 믿음’에 있었고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듯 하다.   최근 루터파와 카톨릭은 ‘칭의’에 대한 기초적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고 이는 또 다른 논쟁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제임스 던,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샌더스가 선구자이지만) 소위 ‘새관점’ 학파가 등장하고 이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강조한 이유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재해 왔던 관점의 발견일 뿐이라 주장한다.) 관점을 들고 나타났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논쟁해 왔던 것과 달리,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다. 당시 갈라디아나 안디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정결의식(할례, 음식 규례법 등)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정의 일환으로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게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자들의 시대(16세기)를 지나 1세기 유대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바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에 몇몇 신학자들이 더 뛰어 들었다. 보수적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S. 호튼, 진보적 개혁파인 마이클 F. 버드, 루터파 후예인 벨리-마티 카르카넨,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칭의를 다룬다. 핵심은 두 가지 정도다.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지, 신분의 변화인지, 칭의로 구원이 완성되는지 아니면 칭의와 함께 변화된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다. 또 하나, 과연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에 집중되는가, 아니면 ‘칭의’는 그가 가르친 ‘칭의, 구속, 화해, 양자 삼음, 성령, 연합, 종말론적 선언 등’ 의 한 단면인가? 머리는 더 복잡해 지고 이해력은 한계에 이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혹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 각각의 신학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다 맞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에서 다 맞는 것 아닌가? 기다란 코도 코끼리고, 강한 다리도 코끼리고, 딱딱한 상아도 코끼리 아닌가? 단 그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정적 선언도 맞고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으니 의로운 삶이 뒤따르는 것도 맞지 않는가?   물론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예의 바르고 열려 있다.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과 토론은 전문적 지식과 논증에 기초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의 말을 공감한다.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이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한 신학자의 충고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울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바울 이해라기 보다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다. 바울의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마땅할 게다. 바울조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성령의 지혜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책을 오독할 가능성이 무서워 전혀 읽지 않는다면 그게 더 오해와 맹신을 불러 일으킬 게다. 그러니 도전해 보자.   나는 지금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칭의논쟁’을 읽어 나가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나의 한계에 대한 딜레마요, 예수 닮지 못함에 대한 탄식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30년, 40년을 예수 믿는다 자랑하는(고위 직분자들?)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돋힌 말이요, 삶에 우러나오지 못하는 신앙형태의 딜레마다. ‘칭의’를 다시 가르쳐야 할까? 우리는 ‘칭의’를 과연 알고 있을까? 마크 트웨인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언제쯤 ‘칭의’를 제대로 이해할까?(톰 라이트) 아니 언제쯤 ‘칭의’에 합당한 신자가 될까? 그것이 문제로다.

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는 나를 혼란케 했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게 뭐지? 그 딜레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신학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얕고 좁은 신학체계에 있었다는 것을 곁눈질로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이신칭의’라는 말을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써 천국간다는 말이 우리의 모토였다. 훗날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기 보다는 절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 시인하는 수준, 말로써 예수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이해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다. 어쨌든 천국을 갈 테니 삶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실 천국을 간다는 것도 정확히 맞는 말이 아니었다. 천국은 이미 우리의 삶에 시작된 것이니.)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주제를 루터가 들고 거대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내부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4세기에 절정을 이룬 신학 풍토인 via modrena적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행위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남발되어 헌금 강요, 선한 일 강요-선한 일은 결국 돈과 직결되었다-로 이어졌고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가 강조하고 들었던 무기가 ‘이신칭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에 있다.’ 물론 루터 역시 칭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변화된 지위로서 우리에게 수반되는 선한 행위를 간과하진 않았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오직 믿음’에 있었고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듯 하다.

 

최근 루터파와 카톨릭은 ‘칭의’에 대한 기초적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고 이는 또 다른 논쟁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제임스 던,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샌더스가 선구자이지만) 소위 ‘새관점’ 학파가 등장하고 이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강조한 이유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재해 왔던 관점의 발견일 뿐이라 주장한다.) 관점을 들고 나타났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논쟁해 왔던 것과 달리,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다. 당시 갈라디아나 안디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정결의식(할례, 음식 규례법 등)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정의 일환으로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게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자들의 시대(16세기)를 지나 1세기 유대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바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에 몇몇 신학자들이 더 뛰어 들었다. 보수적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S. 호튼, 진보적 개혁파인 마이클 F. 버드, 루터파 후예인 벨리-마티 카르카넨,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칭의를 다룬다. 핵심은 두 가지 정도다.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지, 신분의 변화인지, 칭의로 구원이 완성되는지 아니면 칭의와 함께 변화된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다. 또 하나, 과연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에 집중되는가, 아니면 ‘칭의’는 그가 가르친 ‘칭의, 구속, 화해, 양자 삼음, 성령, 연합, 종말론적 선언 등’ 의 한 단면인가? 머리는 더 복잡해 지고 이해력은 한계에 이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혹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 각각의 신학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다 맞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에서 다 맞는 것 아닌가? 기다란 코도 코끼리고, 강한 다리도 코끼리고, 딱딱한 상아도 코끼리 아닌가? 단 그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정적 선언도 맞고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으니 의로운 삶이 뒤따르는 것도 맞지 않는가?

 

물론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예의 바르고 열려 있다.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과 토론은 전문적 지식과 논증에 기초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의 말을 공감한다.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이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한 신학자의 충고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울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바울 이해라기 보다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다. 바울의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마땅할 게다. 바울조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성령의 지혜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책을 오독할 가능성이 무서워 전혀 읽지 않는다면 그게 더 오해와 맹신을 불러 일으킬 게다. 그러니 도전해 보자.

 

나는 지금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칭의논쟁’을 읽어 나가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나의 한계에 대한 딜레마요, 예수 닮지 못함에 대한 탄식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30년, 40년을 예수 믿는다 자랑하는(고위 직분자들?)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돋힌 말이요, 삶에 우러나오지 못하는 신앙형태의 딜레마다. ‘칭의’를 다시 가르쳐야 할까? 우리는 ‘칭의’를 과연 알고 있을까? 마크 트웨인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언제쯤 ‘칭의’를 제대로 이해할까?(톰 라이트) 아니 언제쯤 ‘칭의’에 합당한 신자가 될까? 그것이 문제로다.


(작성일 2015.04.06)
김철휘
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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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칭의 논쟁”을 읽고로고스 연구원 김철휘        신학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신학논쟁 중 가장 예민하고 불편한 논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칭의 논쟁”이다.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된 칭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칭의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칭의에 대한 다양한 복음주의적 해석들이 전통적인 개혁파의 칭의적 개념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도전들은 전면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서로의 주장을 각자 비교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칭의 논쟁이 관심을 끈 정도였다.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던 칭의 논쟁을 본서는 수면 위로 당당하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칭의에 대한 5가지 관점을 과감히 제시하였고, 각 관점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기고한 글에 나머지 4명의 신학자들이 논평을 단 획기적인 편집을 하였다.      먼저는 칭의가 선언적, 즉 법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언약적, 관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서신학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칭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는 믿음에 대한 의미이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문구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읽느냐 아니면 주격 소유격으로 읽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된다. 이 논쟁은 곧 칭의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과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감을 주느냐의 논쟁이다.     이 문제만큼 뜨거운 문제가 바로 행위에 관한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우선 종합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행위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기서 행위의 위치는 각 신학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행위가 공로나 삯이 되는 건 경계하고 있다. 결국, 그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어느 시점까지 우리를 보장하는가이다. 즉 현재적인가 아니면 종말론적인가이다.     본서를 읽기 전에 먼저 “드디어 제대로 한 판 붙는구나!” 하는 불손한 기대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의 토론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끝내는 누군가의 의견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는 몹쓸 그림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협하고 공격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신학적 의견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훈훈한 모습이 인상깊었다. 한국의 신학적 토양에서는 비교적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서로를 세워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신학적 의견에 반하는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영역이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기 전에 꼭 읽어야 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영적지식들이 자칫 흐트러지지 않을까라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칭의의 다양한 신학적인 전통과 역사적 관점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깊고 넓은 칭의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 자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잘 모른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관점들이 복음과 칭의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플 뿐이다. 제임스 던이 진보적 개혁파인 버드의 글을 논평한 마지막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바울의 복음 전체를 평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을까?”-p250

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칭의 논쟁”을 읽고

로고스 연구원 김철휘

 

 

    신학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신학논쟁 중 가장 예민하고 불편한 논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칭의 논쟁”이다.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된 칭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칭의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칭의에 대한 다양한 복음주의적 해석들이 전통적인 개혁파의 칭의적 개념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도전들은 전면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서로의 주장을 각자 비교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칭의 논쟁이 관심을 끈 정도였다.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던 칭의 논쟁을 본서는 수면 위로 당당하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칭의에 대한 5가지 관점을 과감히 제시하였고, 각 관점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기고한 글에 나머지 4명의 신학자들이 논평을 단 획기적인 편집을 하였다.

 

    먼저는 칭의가 선언적, 즉 법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언약적, 관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서신학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칭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는 믿음에 대한 의미이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문구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읽느냐 아니면 주격 소유격으로 읽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된다. 이 논쟁은 곧 칭의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과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감을 주느냐의 논쟁이다.

 

   이 문제만큼 뜨거운 문제가 바로 행위에 관한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우선 종합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행위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기서 행위의 위치는 각 신학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행위가 공로나 삯이 되는 건 경계하고 있다. 결국, 그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어느 시점까지 우리를 보장하는가이다. 즉 현재적인가 아니면 종말론적인가이다.

 

    본서를 읽기 전에 먼저 “드디어 제대로 한 판 붙는구나!” 하는 불손한 기대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의 토론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끝내는 누군가의 의견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는 몹쓸 그림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협하고 공격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신학적 의견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훈훈한 모습이 인상깊었다. 한국의 신학적 토양에서는 비교적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서로를 세워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신학적 의견에 반하는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영역이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기 전에 꼭 읽어야 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영적지식들이 자칫 흐트러지지 않을까라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칭의의 다양한 신학적인 전통과 역사적 관점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깊고 넓은 칭의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 자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잘 모른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관점들이 복음과 칭의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플 뿐이다. 제임스 던이 진보적 개혁파인 버드의 글을 논평한 마지막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바울의 복음 전체를 평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을까?”-p250


(작성일 2015.04.06)
이종인
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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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16세기에 치러졌던 칭의 논쟁의 불꽃이 진영의 분열로 인해 정돈되었다 여겼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당시보다 지금이 더욱 다양해진 입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 입장에 서 있던 내게 보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쟁점들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여러모로 자극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진보적 개혁파의 바울서신의 석의와 논리에 관심이 가고 좀 더 깊이 살펴 볼 필요를 가지게 한다. 익숙한 인물인 마이클 호튼과 제임스 던과 같은 인물로 대변되는 다섯 진영의 입장에 대한 진술은 보다 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주는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이전에 관심이 없던 동방정교회 신학의 입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루터파의 법정적 선언과 동방교회의 신성화는 화해불가능한 칭의론의 대립으로 파악되었지만, 1970년대 헬싱키 대학교 투오모 만네르마(Tuomo Mannermaa)교수의 지도아래 생성된 만네르마 학파는 루터파와 동방 정교회의 대화를 낳았고, 이로 인해 루터파와 로마교회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롭다는 선언과 의롭게 만들어 짐을 융합시켰다. 신성화의 입장은 칭의가 성화뿐 아니라 선한 행위를 포함하고 믿음 안에서 이웃들에게 한 명의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는 점에서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에서 강조하던 이웃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베푸는 통로가 되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신성화적 칭의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신학교 수업에서도 칭의론의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게 접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세계적 거장들이 모여서 주제발표하고 패널토의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세미나의 분위기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새 관점에 대한 논의들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다 성실하게 변증할 수 있는 힘도 제공받는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분야여서 달콤하게 와 닿는다. 현대 칭의론의 복잡한 논의들을 일목요연한 정리로 인해 크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더불어 개혁신학적 관점의 칭의론을 보다 견고하게 변증해야 할 과제 또한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16세기에 치러졌던 칭의 논쟁의 불꽃이 진영의 분열로 인해 정돈되었다 여겼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당시보다 지금이 더욱 다양해진 입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 입장에 서 있던 내게 보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쟁점들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여러모로 자극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진보적 개혁파의 바울서신의 석의와 논리에 관심이 가고 좀 더 깊이 살펴 볼 필요를 가지게 한다. 익숙한 인물인 마이클 호튼과 제임스 던과 같은 인물로 대변되는 다섯 진영의 입장에 대한 진술은 보다 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주는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이전에 관심이 없던 동방정교회 신학의 입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루터파의 법정적 선언과 동방교회의 신성화는 화해불가능한 칭의론의 대립으로 파악되었지만, 1970년대 헬싱키 대학교 투오모 만네르마(Tuomo Mannermaa)교수의 지도아래 생성된 만네르마 학파는 루터파와 동방 정교회의 대화를 낳았고, 이로 인해 루터파와 로마교회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롭다는 선언과 의롭게 만들어 짐을 융합시켰다. 신성화의 입장은 칭의가 성화뿐 아니라 선한 행위를 포함하고 믿음 안에서 이웃들에게 한 명의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는 점에서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에서 강조하던 이웃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베푸는 통로가 되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신성화적 칭의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신학교 수업에서도 칭의론의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게 접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세계적 거장들이 모여서 주제발표하고 패널토의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세미나의 분위기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새 관점에 대한 논의들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다 성실하게 변증할 수 있는 힘도 제공받는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분야여서 달콤하게 와 닿는다. 현대 칭의론의 복잡한 논의들을 일목요연한 정리로 인해 크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더불어 개혁신학적 관점의 칭의론을 보다 견고하게 변증해야 할 과제 또한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작성일 2015.04.05)

김상철
네가 칭의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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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가 뭐길래?여름날 저녁, 불빛에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냥, 신학하는 이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하며 날아 와서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칭의는 뭔가?칭의는 논쟁의 소재인가?칭의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떤 이들이 어떤 곳에서 나서서 칭의를 말하는가? 책은 말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옛관점과 새관점으로 편을 나눌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학문한다는게 의심한다는 것이고 의심을 합리적으로 묻고 답하는 학문이 신앙의 주제일 때는 자못 진중해지는가 보다. 책을 읽노라면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묻게 되고 그 지점을 확인하면t서 나조차 의심하게 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그런 나를 말이다. 그 때부터는 내편이 어떤 자인지 찾게 된다. 혼자라는 것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닌가?책을 읽노라면 나를 의심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의심하게 된다. 책은 이런 독자가 생기게 만들었으므로 그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한 것이다.칭의가 뭐냐? 라는 물음에 그것은 단지 속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지, 아니면 결국 그분 앞에 서는 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뭐라고 답하지 못한다. 속함과 머무름을 함께 의미하는 단어인지, 그래서 그 뜻을 살피고,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본문주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주장이 크게 교차한다.5개의 다른 지점에서 등장한 신학자들이 자기 이해의 "칭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단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기록으로 남기는 순간 기록에 갇혀 버리는 형국이지만 칭의란 옛관점과 새관점의 논쟁이 아니라 온전한 성경 이해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옳으면 네가 틀렸다고 해야 하기에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말은 오히려 더 나쁜 것임에 분명하다. 이것이 다만 이해의 측면이나 학문의 측면으로 제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 끝은 훨씬 멀리까지 간다. 책을 읽는 동안 너는 어느 편이냐? 고 묻는 자에게 제대로 답을 하려면 먼저 도대체 몇 개의 편이 있는지 알게 된다. 칭의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생소하지만 그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는 정직한 태도는 가져야 한다. 그런 예의는 차릴 수 있을게다.하지만 칭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가 자칫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바울의 본문을 끌어오는 것은 심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나라는 사실에 당황스럽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삶이 곧 우리의 삶인데, 명확하게 내 편이 아니라서 모두다 "저주받을 놈"쯤으로 취급하려는 자세는 우려스러운게 분명하다. 차라리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이 괜찮은 인용은 아닐런지? 이렇게 말하면 또 욕을 얻어 먹을까?알아가려는,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열고 가슴을 열어 젖히고 다양한 소리를 들을 한다면 칭의 논쟁은 복불복이 아니라 빛아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마당에 나서는 셈이다.

칭의가 뭐길래?

여름날 저녁, 불빛에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냥, 신학하는 이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하며 날아 와서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칭의는 뭔가?
칭의는 논쟁의 소재인가?
칭의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떤 이들이 어떤 곳에서 나서서 칭의를 말하는가? 책은 말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옛관점과 새관점으로 편을 나눌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학문한다는게 의심한다는 것이고 의심을 합리적으로 묻고 답하는 학문이 신앙의 주제일 때는 자못 진중해지는가 보다. 
책을 읽노라면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묻게 되고 그 지점을 확인하면t서 나조차 의심하게 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그런 나를 말이다. 그 때부터는 내편이 어떤 자인지 찾게 된다. 혼자라는 것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닌가?


책을 읽노라면 나를 의심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의심하게 된다. 책은 이런 독자가 생기게 만들었으므로 그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한 것이다.


칭의가 뭐냐? 라는 물음에 그것은 단지 속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지, 아니면 결국 그분 앞에 서는 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뭐라고 답하지 못한다. 
속함과 머무름을 함께 의미하는 단어인지, 그래서 그 뜻을 살피고,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본문주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주장이 크게 교차한다.


5개의 다른 지점에서 등장한 신학자들이 자기 이해의 "칭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단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기록으로 남기는 순간 기록에 갇혀 버리는 형국이지만 칭의란 옛관점과 새관점의 논쟁이 아니라 온전한 성경 이해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옳으면 네가 틀렸다고 해야 하기에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말은 오히려 더 나쁜 것임에 분명하다. 이것이 다만 이해의 측면이나 학문의 측면으로 제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 끝은 훨씬 멀리까지 간다. 


책을 읽는 동안 너는 어느 편이냐? 고 묻는 자에게 제대로 답을 하려면 먼저 도대체 몇 개의 편이 있는지 알게 된다. 칭의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생소하지만 그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는 정직한 태도는 가져야 한다. 그런 예의는 차릴 수 있을게다.


하지만 칭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가 자칫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바울의 본문을 끌어오는 것은 심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나라는 사실에 당황스럽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삶이 곧 우리의 삶인데, 명확하게 내 편이 아니라서 모두다 "저주받을 놈"쯤으로 취급하려는 자세는 우려스러운게 분명하다. 차라리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이 괜찮은 인용은 아닐런지? 이렇게 말하면 또 욕을 얻어 먹을까?


알아가려는,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열고 가슴을 열어 젖히고 다양한 소리를 들을 한다면 칭의 논쟁은 복불복이 아니라 빛아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마당에 나서는 셈이다.


(작성일 2015.04.05)
배상수
믿음과 행함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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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사이에서 칭의 논쟁[부제:칭의에 대한 다섯가지 신학적관점]을 읽고‘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 책 [칭의논쟁]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칭의에 대한 내용들을 잘 꿰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난 이미 틑렸어. 먼저갗라는 초보운전자의 글귀도 떠오른다.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내용을 꿰 볼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판단해 보건대 이 책에 핵심문장은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지금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은 칭의 논쟁의 배후에 숨겨진 이슈는, 구원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 본질과 그 역할에 관한 문제다.(45-46쪽) 칭의에 인간의 의지가 어느 만큼 작용하는가에 대한 설전(舌戰)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함을 포함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내용을 꿸 수 있는 첫번째는 다섯가지 신학적 관점에서 내 위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 포지션을 가지고 다른 관점들을 접할 때 훨씬 이해가 잘된다. 다른 관점 논평자들의 글을 접하며 내 위치의 장단점을 알 수 있다. 난 전통적 개혁파에 서있다. 포지션이 있으니 비판과 다른 관점에서 무얼 말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론 가르치는이의 필요성이다. 독자 스스로 읽어서 소화시키기 어렵다.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의 말이다. 이사야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없을 때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지 깨달을 수 있느냐”(행8:31) [칭의논쟁]이 그렇다. 칭의 논쟁을 먼저 이해한 이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물론 여러 번 읽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많은시간이 필요하다. 각 관점들의 요점을 지도받고 읽을 때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이의 함께 토론하며 읽을때 더 잘 이해할수 있다.꿸수 있는 마지막은 서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한다. 서론에서 ‘칭의 개념의 역사’와 ‘현대 칭의 논쟁’을 잘 요약해 놓았다. 2부를 들어가기 전에 1부를 충분히 읽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헤매지 않는다. 책을 보면서 유익한 점은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바울신학의 새관점에 대해서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던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관점학파에 대해서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빠르게 두어번 읽고 [칭의논쟁]을 꿸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길들을 통해서 칭의를 꿸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믿음과 행함사이에서

칭의 논쟁[부제:칭의에 대한 다섯가지 신학적관점]을 읽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 책 [칭의논쟁]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칭의에 대한 내용들을 잘 꿰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난 이미 틑렸어. 먼저갗라는 초보운전자의 글귀도 떠오른다.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내용을 꿰 볼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판단해 보건대 이 책에 핵심문장은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지금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은 칭의 논쟁의 배후에 숨겨진 이슈는, 구원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 본질과 그 역할에 관한 문제다.(45-46쪽) 칭의에 인간의 의지가 어느 만큼 작용하는가에 대한 설전(舌戰)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함을 포함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내용을 꿸 수 있는 첫번째는 다섯가지 신학적 관점에서 내 위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 포지션을 가지고 다른 관점들을 접할 때 훨씬 이해가 잘된다. 다른 관점 논평자들의 글을 접하며 내 위치의 장단점을 알 수 있다. 난 전통적 개혁파에 서있다. 포지션이 있으니 비판과 다른 관점에서 무얼 말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론 가르치는이의 필요성이다. 독자 스스로 읽어서 소화시키기 어렵다.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의 말이다. 이사야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없을 때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지 깨달을 수 있느냐”(행8:31) [칭의논쟁]이 그렇다. 칭의 논쟁을 먼저 이해한 이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물론 여러 번 읽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많은시간이 필요하다. 각 관점들의 요점을 지도받고 읽을 때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이의 함께 토론하며 읽을때 더 잘 이해할수 있다.

꿸수 있는 마지막은 서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한다. 서론에서 ‘칭의 개념의 역사’와 ‘현대 칭의 논쟁’을 잘 요약해 놓았다. 2부를 들어가기 전에 1부를 충분히 읽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헤매지 않는다. 책을 보면서 유익한 점은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바울신학의 새관점에 대해서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던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관점학파에 대해서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빠르게 두어번 읽고 [칭의논쟁]을 꿸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길들을 통해서 칭의를 꿸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작성일 2015.04.05)
김동훈
칭의 논쟁 조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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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본 저서는 칭의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논문집이다.마이클 호튼과 제임스 베일비, 제임스던, 아티 카르카센 그리고 오콜린스 등 5명의 논문과 그에 대한 논평으로 비교하고 있으며서로를 통하여 보다 깊은 칭의를 논하고 있다.바라기는 이 논문을 살핌을 통하여 겉만 햝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칭의로 들어가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함께 기대한다.
[구매자평]

본 저서는 칭의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논문집이다.

마이클 호튼과 제임스 베일비, 제임스던, 아티 카르카센 그리고 오콜린스 등 5명의

논문과 그에 대한 논평으로 비교하고 있으며

서로를 통하여 보다 깊은 칭의를 논하고 있다.

바라기는 이 논문을 살핌을 통하여 겉만 햝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칭의로 들어가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함께 기대한다.


(작성일 201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