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루터의 독일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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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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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평]마틴 루터에 대한 관심을 가지던 때에 우연히 알게되었다. 이 책은 마틴루터가 얻은 보화라고. 마틴 루터도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 책을 우연히 어느 수도원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비천한 죄인을 깨닫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얼마나 큰 도움을 주시는가 생각해 본다. 책은 짧은 분량이나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좋은 책이 더 번역되기를..
[구매자평]마틴 루터에 대한 관심을 가지던 때에 우연히 알게되었다. 이 책은 마틴루터가 얻은 보화라고. 마틴 루터도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 책을 우연히 어느 수도원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비천한 죄인을 깨닫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얼마나 큰 도움을 주시는가 생각해 본다. 책은 짧은 분량이나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좋은 책이 더 번역되기를..
(작성일 2017.11.01)
박상수
루터신학의 기초가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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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익명의 작자에 의해서 쓰여진 본서(本書)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활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대단히 심오한 영성의 책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루터가 이 책의 서문에서 '온갖 귀한 참 지식과 신령한 지혜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내가 이제까지 배웠고, 배우고 싶었던 것 중에) 성경과 어거스틴 말고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그리고 만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 이 책만큼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없었다'고 말하며, 신앙에 있어서 이 책의 소중한 가치를 시사해 주었다. 특히 이 글이 처음 쓰여진 14세기 중엽은 사회적 상황(지진·태풍·흑사병)과 종교적 상황(신뢰성 격감)이 커다란 위기 속에 있었고, 특히 당시의 독일 신비주의를 교회의 교리에 저촉된다며 많은 사람이 이단으로 정죄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익명으로 출판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있다. 그러나 이 소책자의 단순하고도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나타난 영적 지침의 심오함을 발견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방법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1516년에 이어 1518년에 상세한 서론을 덧붙여 출판하게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중세는 교회의 조직이 기독교의 실질적인 중심부를 차지하고 스콜라 철학이 정신적인 중추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프랜시스의 실천적 경건이나 독일의 신비주의 또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 독일의 엑크하르트는 논리나 제도의 압력을 초월한 인간 본성에 폭발하는 영혼의 불꽃을 깨닫도록 권고했다. 그는 피조물의 유한성을 초월한 모든 것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일하며, 하나님과 합일(合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리는 최고의 복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에 조명을 받고 그분의 사랑에 불타게 되면, 자신의 유한성을 이탈함과 동시에 그때부터 자기 속에 자기 대신 그리스도가 사심(갈2:20)으로 참 자아를 실현하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신화(divinization)'이며 '완전한 행복'의 경지라고 하였다. 바로 엑크하르트의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자가 스트라스부르그의 요한 타울러(Johana Tauler)였다. 타울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고 또 가르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곤경은 곧 하나님이 계신 장소요 사랑을 계시하는 장(場)이다. 타울러는 독일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는데, 루터는 바로 타울러를 이 책의 저자로 지목하고 있다. Ⅱ.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제1장은 이 글의 전체적인 주제에 해당한다. '온전한 것이 무엇이고 부분적인 것(온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사람은 부분적인 것을 버린다'는 사도 바울의 말(고전13:9∼12)로 그 답을 대신한다. 태양이 언제나 가까이 비취고 있어도 장님은 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온전하신 분이 가까이에 있어도 사람들의 '피조물됨'과 '자아 중심', 그리고 '욕망' 때문에 그분과 교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이렇게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무시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 온전하신 이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끊임없는 교통을 이룰 수 있다. 또 신비주의의 일반적 사유처럼 신인 합일에 대해 설명할 때 인간 영혼의 신성을 담보로 하여 말하지 않고, 인간 죄성의 심각한 상태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화했다는 조건에서 그 합일이나 인간의 신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3장). 그리고 영혼이 신화된다는 명제 대신 '현재의 시간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죄에 대해서는 '피조물이 변함이 없고 선하신 분으로부터 변하고 돌아서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온전한 것에서 부분적인 불완전한 것으로 변하고 전락해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2장).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치유(타락의 개선)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 없이, 또 하나님은 인간 없이 개선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성질을 취하여 인화(人化)되셨고 또 인간은 신화(神化)되었던 것'이다(3장). 영혼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을 보고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긍정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8장). 당시에 루터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11장은 루터에게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인 듯 싶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천국에 이르기 전에 지옥을 먼저 방문해야 했는데 이것은 또한 인간의 영혼의 행로이기도 하다'로 시작되는 이 장(章)은, 루터가 경험한 소위 '탑 속의 체험'을 연상케 하며,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로우신 은혜로 인간의 애통과 회개를 통한 의인화(義認化), 곧 루터의 '칭의론'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12장에서는 주님이 주신 내적 평안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평안 곧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단계, 즉 '정화의 단계(via purgativa)'와 '조명의 단계(via illuminativa)', 그리고 '연합의 단계(via unitiva)'의 순서를 거쳐야 함을 이야기한다. 13장부터 29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생활의 방식과 형태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기독론(Christology)일 것이다. '아담 안에서 멸망하고 죽었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새로 생겼으며, 아담 안에서 살고 생겼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고 죽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참 순종과 불순종이다. 그렇다면 참 순종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자기 중심, 자기에의 관심을 버려서...이 순종은 아담 안에서 죽고 없어졌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고 회복되었으며, 불순종은 아담 안에서 살고 생겼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13장)'. '사람들은 '옛 사람'과 '새 사람'에 관해 말을 하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옛 사람은 아담, 불순종, 자아를 뜻하며,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순종을 뜻한다...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중생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14장)'. 한편 30∼36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善)의 의미와 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罪)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빛은 단순한 선을 증거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선(God)이란 무엇인가? 이제 이를 주목하라. 하나님은 단순한 선하심(goodness), 내적 지, 참 빛이신 동시에 또한 한 의지, 사랑, 의로우심, 진리, 그리고 모든 덕의 근본이 되신다. 이 모든 것이 다 다른 것이면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이며, 어떤 특별한 선도 피조물이 없이는 인식되거나 실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선은 행위 없는 실존과 근본일 뿐이기 때문이다(30장)'.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 안에 죄를 남겨둔 채 살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죄를 없애기 위해 죽기를 원하시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고난보다 인간의 죄를 인해 더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기 때문이다(35장)'. 끝으로 37장에서 끝까지는 온전한 생활에 이르기 위한 사람의 마음가짐, 곧 예절과 질서, 그리고 사랑과 의지 등을 참 빛에 비추어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보상을 목적으로 율법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즉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 이상은 모르는 자들이며, 그렇게 함으로만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자들이다...사람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생활의 옷을 입는다...그리스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 날까지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생활로부터 떠날 수 없다. 그가 수천 번 죽어 피조물이 그 위에 덮쳐와 고통을 줄지라도 그는 이 모든 것을 참게 되고 결코 그 생활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그리스도의 생활로서 그 이상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필요한 무엇을 그것으로 만들어 낸다든지, 그것으로 어떤 무엇을 얻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한 사랑에서 그 생활의 고귀함 때문에, 또 그 생활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생활하는 것이다(종합)'. 이 소책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가는데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루터가 통과한 양심의 고통의 지옥(11장)이나, 생사를 건 하나님을 위한 투쟁, 그리고 그 내적 고통과 외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가능함을 확신케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그의 앞에 버티고 있던 기득권 층의 영적 교만과, 또한 범람하는 이단사상 같은 반교회적이고 반도덕적인 '거짓 자유(23장)'에 맞서 참 빛 되신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sola fide)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경험한 영적 체험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영적 체험의 결정적 동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지 않을까 라고 나는 추측해본다. Ⅲ.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도전이기도 하다. 첫째는, 온전한 것을 위한 '자기부인의 삶'이다. 셀 수 없이 이 말을 되새겨도 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도사리며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는 욕망과 교만이라는 지옥의 통로에 나는 늘 서있다. 나는 늘 홀로 '어떤 사람(창32:24)'과 힘에 겹도록 씨름을 해보지만, 여전히 그 그림자는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 하여금 두 가지 면에서 좋은 점을 제공한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늘 긴장을 풀지 못하도록 한다. 적어도 그 존재는 혹시라도 누릴지 모르는 영적 나태함을 몰아내어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씩 나로 하여금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짜여진 틀과 거기에 동화된 내 자신을 향해, 늘 그랬듯이 연민의 눈물과 정의의 울분을 참지 못한 채 내뱉고 만다. 나로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적 나약함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내 자신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순종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도전을 받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면서 너무 힘든 말이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닌 까닭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나, 믿음 없이 받는 성만찬이나, 순종 없이 주님을 따른다는 고백과 같은 값싼 은혜가 아니다. 우리의 순종 회피는 교활한 세계애(世界愛)인 것이다. 행위 없는 순종은 허위이며 광신(狂信)이다. 우리가 때로 순종치 않으면서 그 책임을 부족한 신앙으로 돌리며, 그럼 왜 부족한 신앙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부족한 순종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책임전가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비겁한 신앙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희롱(戱弄)일뿐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과, 온전히 자신을 주께 드려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삶! 그것이 정말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로 그 삶이야말로 회개하여 의롭다 인정받은 자가 성화를 이루는 삶이요, 또 그 길이야말로 이 책에서 말하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닐까!
Ⅰ. 익명의 작자에 의해서 쓰여진 본서(本書)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활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대단히 심오한 영성의 책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루터가 이 책의 서문에서 '온갖 귀한 참 지식과 신령한 지혜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내가 이제까지 배웠고, 배우고 싶었던 것 중에) 성경과 어거스틴 말고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그리고 만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 이 책만큼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없었다'고 말하며, 신앙에 있어서 이 책의 소중한 가치를 시사해 주었다. 특히 이 글이 처음 쓰여진 14세기 중엽은 사회적 상황(지진·태풍·흑사병)과 종교적 상황(신뢰성 격감)이 커다란 위기 속에 있었고, 특히 당시의 독일 신비주의를 교회의 교리에 저촉된다며 많은 사람이 이단으로 정죄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익명으로 출판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있다. 그러나 이 소책자의 단순하고도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나타난 영적 지침의 심오함을 발견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방법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1516년에 이어 1518년에 상세한 서론을 덧붙여 출판하게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중세는 교회의 조직이 기독교의 실질적인 중심부를 차지하고 스콜라 철학이 정신적인 중추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프랜시스의 실천적 경건이나 독일의 신비주의 또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 독일의 엑크하르트는 논리나 제도의 압력을 초월한 인간 본성에 폭발하는 영혼의 불꽃을 깨닫도록 권고했다. 그는 피조물의 유한성을 초월한 모든 것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일하며, 하나님과 합일(合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리는 최고의 복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에 조명을 받고 그분의 사랑에 불타게 되면, 자신의 유한성을 이탈함과 동시에 그때부터 자기 속에 자기 대신 그리스도가 사심(갈2:20)으로 참 자아를 실현하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신화(divinization)'이며 '완전한 행복'의 경지라고 하였다. 바로 엑크하르트의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자가 스트라스부르그의 요한 타울러(Johana Tauler)였다. 타울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고 또 가르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곤경은 곧 하나님이 계신 장소요 사랑을 계시하는 장(場)이다. 타울러는 독일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는데, 루터는 바로 타울러를 이 책의 저자로 지목하고 있다. Ⅱ.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제1장은 이 글의 전체적인 주제에 해당한다. '온전한 것이 무엇이고 부분적인 것(온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사람은 부분적인 것을 버린다'는 사도 바울의 말(고전13:9∼12)로 그 답을 대신한다. 태양이 언제나 가까이 비취고 있어도 장님은 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온전하신 분이 가까이에 있어도 사람들의 '피조물됨'과 '자아 중심', 그리고 '욕망' 때문에 그분과 교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이렇게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무시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 온전하신 이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끊임없는 교통을 이룰 수 있다. 또 신비주의의 일반적 사유처럼 신인 합일에 대해 설명할 때 인간 영혼의 신성을 담보로 하여 말하지 않고, 인간 죄성의 심각한 상태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화했다는 조건에서 그 합일이나 인간의 신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3장). 그리고 영혼이 신화된다는 명제 대신 '현재의 시간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죄에 대해서는 '피조물이 변함이 없고 선하신 분으로부터 변하고 돌아서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온전한 것에서 부분적인 불완전한 것으로 변하고 전락해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2장).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치유(타락의 개선)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 없이, 또 하나님은 인간 없이 개선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성질을 취하여 인화(人化)되셨고 또 인간은 신화(神化)되었던 것'이다(3장). 영혼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을 보고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긍정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8장). 당시에 루터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11장은 루터에게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인 듯 싶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천국에 이르기 전에 지옥을 먼저 방문해야 했는데 이것은 또한 인간의 영혼의 행로이기도 하다'로 시작되는 이 장(章)은, 루터가 경험한 소위 '탑 속의 체험'을 연상케 하며,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로우신 은혜로 인간의 애통과 회개를 통한 의인화(義認化), 곧 루터의 '칭의론'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12장에서는 주님이 주신 내적 평안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평안 곧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단계, 즉 '정화의 단계(via purgativa)'와 '조명의 단계(via illuminativa)', 그리고 '연합의 단계(via unitiva)'의 순서를 거쳐야 함을 이야기한다. 13장부터 29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생활의 방식과 형태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기독론(Christology)일 것이다. '아담 안에서 멸망하고 죽었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새로 생겼으며, 아담 안에서 살고 생겼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고 죽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참 순종과 불순종이다. 그렇다면 참 순종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자기 중심, 자기에의 관심을 버려서...이 순종은 아담 안에서 죽고 없어졌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고 회복되었으며, 불순종은 아담 안에서 살고 생겼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13장)'. '사람들은 '옛 사람'과 '새 사람'에 관해 말을 하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옛 사람은 아담, 불순종, 자아를 뜻하며,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순종을 뜻한다...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중생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14장)'. 한편 30∼36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善)의 의미와 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罪)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빛은 단순한 선을 증거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선(God)이란 무엇인가? 이제 이를 주목하라. 하나님은 단순한 선하심(goodness), 내적 지, 참 빛이신 동시에 또한 한 의지, 사랑, 의로우심, 진리, 그리고 모든 덕의 근본이 되신다. 이 모든 것이 다 다른 것이면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이며, 어떤 특별한 선도 피조물이 없이는 인식되거나 실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선은 행위 없는 실존과 근본일 뿐이기 때문이다(30장)'.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 안에 죄를 남겨둔 채 살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죄를 없애기 위해 죽기를 원하시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고난보다 인간의 죄를 인해 더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기 때문이다(35장)'. 끝으로 37장에서 끝까지는 온전한 생활에 이르기 위한 사람의 마음가짐, 곧 예절과 질서, 그리고 사랑과 의지 등을 참 빛에 비추어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보상을 목적으로 율법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즉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 이상은 모르는 자들이며, 그렇게 함으로만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자들이다...사람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생활의 옷을 입는다...그리스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 날까지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생활로부터 떠날 수 없다. 그가 수천 번 죽어 피조물이 그 위에 덮쳐와 고통을 줄지라도 그는 이 모든 것을 참게 되고 결코 그 생활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그리스도의 생활로서 그 이상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필요한 무엇을 그것으로 만들어 낸다든지, 그것으로 어떤 무엇을 얻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한 사랑에서 그 생활의 고귀함 때문에, 또 그 생활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생활하는 것이다(종합)'. 이 소책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가는데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루터가 통과한 양심의 고통의 지옥(11장)이나, 생사를 건 하나님을 위한 투쟁, 그리고 그 내적 고통과 외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가능함을 확신케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그의 앞에 버티고 있던 기득권 층의 영적 교만과, 또한 범람하는 이단사상 같은 반교회적이고 반도덕적인 '거짓 자유(23장)'에 맞서 참 빛 되신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sola fide)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경험한 영적 체험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영적 체험의 결정적 동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지 않을까 라고 나는 추측해본다. Ⅲ.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도전이기도 하다. 첫째는, 온전한 것을 위한 '자기부인의 삶'이다. 셀 수 없이 이 말을 되새겨도 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도사리며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는 욕망과 교만이라는 지옥의 통로에 나는 늘 서있다. 나는 늘 홀로 '어떤 사람(창32:24)'과 힘에 겹도록 씨름을 해보지만, 여전히 그 그림자는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 하여금 두 가지 면에서 좋은 점을 제공한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늘 긴장을 풀지 못하도록 한다. 적어도 그 존재는 혹시라도 누릴지 모르는 영적 나태함을 몰아내어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씩 나로 하여금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짜여진 틀과 거기에 동화된 내 자신을 향해, 늘 그랬듯이 연민의 눈물과 정의의 울분을 참지 못한 채 내뱉고 만다. 나로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적 나약함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내 자신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순종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도전을 받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면서 너무 힘든 말이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닌 까닭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나, 믿음 없이 받는 성만찬이나, 순종 없이 주님을 따른다는 고백과 같은 값싼 은혜가 아니다. 우리의 순종 회피는 교활한 세계애(世界愛)인 것이다. 행위 없는 순종은 허위이며 광신(狂信)이다. 우리가 때로 순종치 않으면서 그 책임을 부족한 신앙으로 돌리며, 그럼 왜 부족한 신앙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부족한 순종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책임전가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비겁한 신앙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희롱(戱弄)일뿐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과, 온전히 자신을 주께 드려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삶! 그것이 정말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로 그 삶이야말로 회개하여 의롭다 인정받은 자가 성화를 이루는 삶이요, 또 그 길이야말로 이 책에서 말하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닐까!
(작성일 200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