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으로 떠나는 마음 여행
당신의 서늘함을 안아줄 이야기들
<책 소개>
음식으로 떠나는 마음 여행
당신의 불안함과 서늘함을 끌어안아줄 이야기
“지금 이 글을 읽는, ‘잠재적 독자’인 여러분은 혹시,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갓구운 빵 냄새, 고소한 참기름 냄새,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김치찌개 냄새, 걸음을 멈춰 세우는 향긋한 커피 냄새까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있나요?
특별할 것 없이도 마음이 놓이게 하는 집밥, 친구와 함께 먹는 하굣길의 즐거운 분식, 불안한 시절을 버텨내게 한 라면 한 그릇, 낯선 나라에서 낯선 음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깨달음, 상실의 순간, 텅 빈 마음을 채워준 든든한 국밥, 그와 나눈 첫 데이트의 설레는 식탁까지…
사랑하는 사람, 고마운 사람, 그리운 사람, 그리고 미운 사람… 모든 기억을 한순간에 되살아나게 하는 음식, <안녕, 나의 순간들>은 그런 음식에 담긴 마음과 생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녕, 나의 순간들> 저자 고유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
저자 고유는 우리 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식에 담긴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들을 풀어내며 독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한다. 자신의 자리가 없어 불안해 하는 독자에겐 ‘고유의 자리’를 제공할 것이며, 나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운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독자들은 나 자신만의 이야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먹고살아 온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먹고사는 ‘진짜 이유’,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음식은 행복한 추억을 떠오르게 할 것이고 어떤 음식은 우리의 결핍을 정직하게 마주하도록 할 것이다.
<안녕, 나의 순간들>의 저자 고유가 독자들에게 건넨다.
“이제라도 내 삶의 크고 작은 상실을 돌봐주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마음과 조각난 삶의 부분들을 찾아 함께 마음 여행을 떠나보실래요? 그동안 먹고 사느라 애쓴 당신 곁에 따뜻한 차 한잔으로 포근한 국밥 한 그릇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안녕, 나의 순간들>에는 나의 마음을 다루는 매뉴얼이나 거창한 솔루션 같은 게 담겨 있지 않다. 때론 거친 시간을 통과했던 저자 고유가 비로소 자신의 모든 순간들을 향해 “안녕”이라 손짓하며 진솔하게 고백하는, ‘음식으로 떠나는 마음 여행’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독자들 스스로의 마음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1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는 어디일까?’
오래도록 내 마음은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를 찾아 헤맸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짐이나 부끄러움이 되지 않으면서, 타인의 날 선 평가와 얕은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저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자리 말이다.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내 존재가 누군가의 기쁨이고 자랑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다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에야 지난날을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런 일을 왜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어서 많이 속상했겠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좀 더 일찍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혹시라도 그 먼 친척분 말처럼 엄마 아빠가 내 존재를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존재가 어쩌면 젊은 두 남녀에겐 선물이라기보단, 당혹스러움, 혹은 어떤 어려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나는 어쩌면 매일 아침 엄마 밥 냄새를 통해 ‘이곳이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구나’를 확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다 자란 어른이 돼서도 삶에 치이고 마음이 지칠 때면 엄마 밥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전히 엄마 밥엔 내 몫, 내 자리가 있다는 믿음 때문 아닐까? 무거운 내 마음이 편히 놓이는 자리, 나를 위해 기꺼이 밥을 짓고 따뜻한 국을 내어주는 사랑의 수고와 헌신이 보이는 엄마의 식탁에서 나는 여전히 나의 자리, 내 존재를 확인한다.
-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 마음이 놓이는 음식(대상)이 있나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20p 중.
#2
맛없던 김치가 훌륭한 요리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보면서 마치 ‘인생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이 느껴졌다. 행여 김치 자체가 좀 맛이 없대도 부재료와의 연합으로 얼마든지 훌륭한 요리로 완성된다는 게 퍽 위로가 됐달까? 복잡한 과정 없이도 집에 있는 재료를 몽땅 넣고 오래 푹푹 끓여 간만 잘 맞추면 맛있는 한 끼 반찬이 되는 김치찌개. 그렇게 김치찌개는 빈속뿐만 아니라 움츠러든 내 영혼까지 데우는 음식이 됐다. 각 가정의 배경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김치. 출신도 소속도 각기 다 다르지만 한데 어우러져 나름의 맛을 내며 사는 우리네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
파릇파릇한 대로 매력이 넘치는 겉절이, 적당히 발효돼 시큼 달큼 딱 먹기 좋은 잘 익은 김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밥도둑 신김치까지. 각각의 모습과 숙성도에 따라 누구 하나 식탁에서 배제되지 않고 본연 그대로의 맛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땅속 깊이 묻힌 항아리에서 하얗게 내려앉은 곰팡이를 걷어내고 건져 올린 (그 진가를 알지 못하는 이를 만나면 버려지고야 말) 쿰쿰한 묵은지까지.
다양한 김치를 먹으며 ‘우리는 그저 우리의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라는 메시지를 얻는다. 혹 이번 생은 글렀다는 절망에 휩싸여, 나아질 내일이 믿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아직 끝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다. 주변에 돕는 이들과 함께라면 당신도 마침내 훌륭한 요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나만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 또한 누군가에겐 이미 도움이 되고 있으니, 우리 그저 이대로도 존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해 알려 주는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 김치찌개를 먹으며 나는 자주 나의 안녕을 확인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그리고 얼마든지 두번째, 세번째… 다시 나아질 기회가 있다고’.
-당신의 영혼을 데우는 음식(Soul Food)은 무엇인가요?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32p 중.
#3
이후로 나는 엄마와 시장에 갈 때마다 호떡을 억지로 맛있게 먹었다. 내가 아주 장성할 때까지 엄마는 내가 호떡을 좋아한 줄로 아셨지만, 나는 사실 호떡이 싫었다. 다만 그 200원짜리 호떡 한 장과 맞바꾼 엄마의 타인을 향한 사랑, 그 마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우리 딸이 좋아하는 호떡을 사 먹였어’라는 엄마 마음 한쪽의 편안함을 위해, 내 나름 최선의 ‘동역’을 할 뿐이었다.
할머니들은 내가 자라는 동안 한 분 두 분 차례로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살아계셔서 종종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쓸모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말고,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성장하라고. 그래서 너희 엄마처럼 살라고.’
여전히 그곳에, 엄마와 다니던 ‘30년 전통의 2대째 호떡집’이 있다. 그 시절 호떡을 구워주시던 할머니는 더 이상 계시지 않지만, 자녀분들이 만들어 주시는 호떡을 먹기 위해 종종 엄마와 그곳을 찾는다.
천원에 다섯 장이던 호떡이 이젠 두 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호떡을 손에 들면 어떻게 먹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 고민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까?’에 관한 것이다.
내가 중요한, 가끔은 나만 중요하다고 부추기는 듯한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살고 싶은지? 나의 곁이 필요한 이는 누구인지? 나는 누구 곁에 있고 싶은지? 그리고 나는 이 호떡 한 장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일 수 있는지?
그날의 나는, 달랑 (좋아하지도 않는) 호떡 한 개만 사주는 엄마가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시절, 그런 삶을 사는 엄마의 딸로 그녀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따끔거려서 ‘호떡만이라도 충분히 배부르게 드셨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뜨거운 설탕물이 가득한, 보기보다 위험한 음식 호떡, 그리고 내겐 퍽 아픈 음식 호떡.
부디 모두가 ‘나를 돌보느라 타인을 잊지 않기를, 더불어 타인을 돌보느라 나를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우리 부모님의 최선(사랑 표현)의 음식은 무엇인가요?
-타인을 향한 사랑을 음식으로 표현한다면?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43p 중.
#4
‘일주일에 한 번 아빠를 만나는 아이와 홀로 삼 남매를 돌보다 겨우 하루 남편을 만나는 아내, 가족 부양을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했던 아빠까지. 이들 중 어느 쪽이 더 힘들고 외로웠을까?’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엄마의 불평불만 장면이 없다. 엄마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때때로 아빠의 날 선 평가와 비난 섞인 말 앞에서조차 별말이 없던 엄마였다. 나는 엄마의 힘듦을 어림짐작했고 엄마도 지키지 않는 엄마의 마음을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뭐 먹고 싶니?’라는 부모님의 질문에 그나마 모두가 큰 불만 없이 먹을 수 있는 국밥을 먹겠다고 자주 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내 만족보다는 엄마가 속상해지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차마 국밥 한 그릇을 혼자 다 먹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생들 먹는 양이 늘어 내 몫의 한 그릇을 주문하던 날, 나는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온전한 한 그릇.
처음부터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뭉근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국밥은 불안하고 서늘한 마음을 따스히 끌어안는 포옹 같다. 적어도 그 한 그릇의 시간만큼은 내 취향대로 속도와 방식을 결정해도 된다는 허용의 시간이니까.
이따금 마음이 헛헛하고 쓸쓸한 날엔 지금도 국밥집을 찾는다. 따뜻한 뚝배기에 서늘해진 마음을 기대고 마음이 다시 온기를 되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따스함을 삼킨다. 불둑 나온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너 지금 안전하다’고 말해준다.
- 당신의 마음을 채우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 당신의 국밥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나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59p 중.
#5
‘너는 너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니?’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모자람, 혹은 지나침으로 인해 마음 상했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많이 아팠던 어린 시절의 나 역시 그들의 모자람과 지나침으로 인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
더 이상 내게 ‘혼밥’의 의미는 ‘존재의 쓸쓸함’을 대변하거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이고, ‘선택’이다.
이렇듯 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타인과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져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 한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는 말처럼, 깨지고 부서진 관계 역시 또 다른 사람으로 회복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 같았던 왕따 경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 기억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따뜻하고 의미 있는 만남들이 쌓여, 이젠 아픈 기억보다 좋은 경험의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혼자 먹는 밥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그녀처럼, 우리도 부디 누군가에게 그런 새로운 사람이길 바라본다.
- 당신에게 ‘혼밥’이란?
- 혼자 밥을 먹을 때 느끼는 주된 감정(생각)은 무엇인가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69p 중.
#6
그랬다. 호주에서의 나날은 날마다 새롭고 충격적인 일들로 가득했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더욱. 온갖 것이 뒤섞여 향마저 독특한 음식 쏸라탕. 내일을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던 그날의 두려움과 불안을, 맵고 시고 달고 짜고, 아무튼 세상 모든 자극적인 맛이 느껴지는, 그러나 딱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도대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그 음식과 함께 삼켰다.
어쨌거나 지금 나에겐 이상한 음식이지만, 어떤 이에겐 특별한 날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싶은 음식이라니까. 내 삶도 언젠가 이렇게 뭐라 한마디로 딱 정의 내릴 순 없더라도 그 나름 의미 있는 완성이 되지 않겠나 생각하며. 언니들의 즐거운 식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쓰촨 음식의 매운맛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와 흐물거리는 식감의 건더기들, 정말이지 구토를 유발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음식이었다. 그래, 그 쏸라탕이 문제였다. 언니들은 잘못이 없었다.
충격적이도록 강렬한 음식이었지만 언니들 앞에서 잘 먹는 모습, 까탈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호감을 얻고 싶었고, 대접하려는 그 마음이 고마워 최선을 다해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그 결과 혀가 마비된 건지 코가 기능을 상실한 건지 아무튼 먹다 보니 배가 불렀다.
우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그날 이후에도 종종 쏸라탕을 먹었다. 오래된 장롱 냄새는 여전했지만 어쩐지 시큼 맵싸한 맛이 나쁘지 않았고, 한국에 계신 할머니 생각도 났다. 적어도 더 이상 토할 것 같진 않았고, 몇 년 후 나도 누군가를 데려갔던 기억이 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억지로 먹었던 음식이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 정말 그 음식이 특별해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돼서였을까, 아니면 순전히 그 음식을 함께 나눈 사람 때문이었을까? 새롭고 독특한 사람이나 음식을 만나면 아직도 한 번씩 그날의 하얗고 예쁜 언니와 빨갛고 쉰내 나는 쏸라탕이 떠오른다.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내가 아직 모를 뿐, 사람도 음식도 언젠가 좋아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한번 만나서는 알기 힘든 쏸라탕의 매력처럼.
- 당신에게도 음식에 관한 조금 특별한 사건이 있나요?
- 토할 것 같은 음식, 버거운 상황에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나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87p 중.
#7
돌아보니 나의 육아도 그랬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다짐했지만 거의 매일이 그랬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들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졌다. 흰자 머랭을 올리고, 오븐 속 꼬끄 (프랑스어로 껍질이라는 뜻. 과자에 해당하는 부분)가 부풀어 오르는 걸 눈으로 보고 나서야 마음이 잠시 놓였다. 두 개의 꼬끄 사이에 필링을 넣고, 마침내 원하는 마카롱이 완성돼,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그제야 나도 조금 기뻤고, 안심했다. 그리고 내일의 마카롱을 기대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엔 아무런 나의 쓸모를 느끼지 못하던 시절, 마카롱을 만들며 나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건, 달걀흰자와 설탕, 슈가파우더와 아몬드 가루를 적당하게 섞는(마카로나주) 작업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븐 온도나 실내 습도도 중요하고, 속을 채워 넣을 필링재료도 중요하고, 마지막 포장하는 과정까지. 재료 하나 과정 하나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소홀히 해도 되는 과정은 없다는 거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는 육아.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모든 과정이 끝도 없고 큰 의미마저 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아이의 내일을 만드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대충 넘어가도 되는 시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을 통틀어 가장 큰 변화를 이루는 시기 생후 일 년, 마카롱을 만드는 것과는 가히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나고 특별한 일이었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은 그렇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우리 딸의 삶에 내가 엄마로 함께할 수 있음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나는 더 이상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이는 마카롱을 굽지 않아도,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과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오븐 앞에서 나를 찾기 위해 애쓰던 시절과 마주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내 삶에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고.
-누군가의 시간이 담긴 음식을 선물 받아 본 적이 있나요?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 준 음식이 있나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104p 중.
#8
콜라 사건 이후로, 종종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워 ‘뻥’ 하고 터 저버릴 것 같은 날이면, 얼른 탄산수를 한 병 집어 들고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부풀 대로 부풀어 빵빵해진 병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손에 전해지는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 그리고 더 이상 들이마실 수 없을 때까지 숨을 가득 들이마신 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병을 열면서 숨을 뱉기 시작한다. 후- 호흡과 함께 조금씩 빠져나가는 탄산을 느끼며, 한껏 부풀었던 병에 공간이 생겨 마침내 완전히 열 수 있게 되었을 때, 남은 숨을 마저 후- 뱉고, 톡 쏘는 탄산수를 한 모금 삼킨다. 마음이 편치 않은 날 마시는 탄산수는 톡 쏘다 못해 따갑기까지 하지만, 이건 결코 나를 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온몸 구석구석 퍼지는 청량감에 온 신경을 집중해 본다.
‘느낀다’의 사전적 의미는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이다. 탄산이 빠져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특유의 맛과 향을 음미하며, 손끝에 전해지는 병의 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아닌 척 숨겨두었던 부정적 감정들이 어느 날 뜻밖의 외부 자극을 만나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이런 시각화 과정을 통해 답답했던 감정을 오감으로 느끼며 다시 나를 평온한 상태로 데려다 놓는 연습을 한다. 판단 없이, 질책 없이 아들이 건넨 폭발한 콜라를 기꺼이 즐거워해 준 남편을 떠올리며…. 머리와 가슴을 연결해 주는 수단으로서의 탄산수를 통해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보다 확실히 알게 됐다.
그리고 기꺼이, 나도 나를 기다려 주기로 한다. 느끼지 않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어느 연약하고 두려운 부분을. 먼저 한 김이 빠지고 나면 완전히 열 수 있는 때가 올 테니까.
- 당신은 언제 탄산음료를 마시나요?
- 꽉 차서 터져버릴 것만 같은 감정을 다루는 나만의 방법은?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111p 중.
#9
그날의 나는, 이런 맹 미역국 같은 위로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저 별말 없이 내 어깨에 살포시 얹은,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직 ‘살아있다’라는 느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는 네 곁에 ‘내가 있어’라고 알게 하는... 그러니 우리 힘들어도 함께 ‘살아 보자’라는 말 없는 응원 말이다.
그녀는 주었지만 나는 받지 못했고, 그녀는 했지만 나는 알 수 없었던 위로를 미역국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너 정말 힘들겠다. 서럽고, 억울하고, 밉고, 원망스럽고, 화나지? 그래 그럴 만해.’ 내 인생에 나를 향한 첫 공감을 전했다. 어떤 평가나 판단 없이 급히 상태를 전환하려 하지 않는, 그냥 ‘그럴 만하다’라는 인정의 말. 그토록 어렵고 힘들었던 나를 ‘인정’, 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나를 위로했다는 뿌듯함에 겨운 그녀의 ‘괜찮아, 누구나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야. 곧 괜찮아질 거야’라는 안부 문자에 재차 폭력적인 위로를 경험하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사람이 돼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였다.
앞으로 살면서 여러 경험과 배움을 통해 나의 정의도 달라지겠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 공감과 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함께 비를 맞거나’, ‘넘어진 그 곁에 잠시 같이 있는 것’. ‘왜 넘어졌는지, 비가 오는데 우산은 왜 안 들고나왔는지를 묻는 대신, 그저 곁이 되어주고, 나를 찾을 때 기꺼이 옆을 내어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고,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라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깨달음을 통한 나의 변화의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에게는 어떤 ‘위로’와‘공감’이 필요한가요? 불편한 위로와 공감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아플 때 유독 생각나는 음식이 있나요?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121p 중.
#10
‘아, 나는 김이나 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구나.’
김밥에 들어갈 수 있는 속 재료의 무궁무진함처럼 각자 삶의 다양한 경험, 아픔과 슬픔, 기쁨과 기대를 가진 이들을 고유한 그 모습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 하지 않고, 그저 지금 모습 그대로도 이곳에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구멍이 많은 얇은 김은 밥과 속 재료의 수분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일본 스시집에서 사용하는 두꺼운 김은 잘 터지지 않는 대신 어린아이가 먹기엔 그 밀도가 너무 높고 두꺼워 체하기 십상이다.
적당한 밀도의 김과 적절하게 찰기 있는 쌀이 최상의 김밥 맛을 낸다. 혹 나라는 사람의 존재 밀도가 너무 낮아, 다른 이의 영향으로부터 쉽게 휘둘리거나, 반대로 너무 촘촘하고 두꺼워 타인의 고유함과 영향까지 지워버리지 않길 바란다.
누구와 만나 어떤 상황에 놓이든 그 본질이 김과 밥, ‘김밥’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사람. 먹기엔 간편하지만 만드는 과정이나 영양은 절대 우습지 않은, 든든하고 꽉 찬 그런 김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모호한 게 적당한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자주 적당하고, 적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20대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고 싶었고, 최고가 되지 못한 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나를 지나치게 괴롭혔다. 어느 정도 사회 경력을 쌓아갈 때는 압도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내 속사람을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최고가 아니면, 압도적인 실력이 아니면 다 소용없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나 자신도 내 곁에 있는 이들도 힘들게 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떡볶이나 라면과 어우러짐은 물론, 소풍을 갈 때나, 손님을 초대할 때, 혼자 먹어도 여럿이 먹어도 그 어느 때라도 어색함 없는 손색없는 메뉴 김밥.
그렇게 따로 또 같이, ‘개별성’과 ‘연합’을 즐거워하며 다양한 존재들과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
다시,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김밥은 무엇인가요?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고유, <안녕, 나의 순간들> 177p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