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문학, 철학과 역사의 눈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차원의 주기도 특강- 성경에 관한 풍성한 이해, 신학과 인문학의 눈으로 주기도를 탐구하다
- 시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뿐 아니라, 철학, 문화, 역사 등의 다채로운 통찰
- 부드럽게, 때론 단호하듯 풀어내는 저자의 호소력 짙은 주기도 특강
- 개인 및 소그룹 스터디 교재로 활용하기 좋은 신개념 주기도 해설서
[출판사 책 소개]주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귀중한 기도의 모범이므로, 주기도와 관련된 도서는 이미 많은 저자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하지만, 본 도서는 새로운 차원의 주기도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우선, 저자는 폭넓은 독서와 독서 분량이 놀랍다. 저자는 성경을 근간으로, 신학과 문학, 철학과 역사, 사회와 문화 다방면의 통찰로써 주기도를 풀어내었다. 따라서 변화무쌍한 시대 한가운데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의 소통을 놓지 않고서 주기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탐구할 수 있다. 또한 본서는 설교가 아닌 특강 형식의 글이다. 따라서 독자에게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제공하고, 각 단원이 끝날 때는 다시 점검하며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따라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소그룹 스터디 교재로써 활용하기 좋은 신개념 주기도 해설서이기도 하다. 주기도는 그저 예배 때 합독하는 단순한 기도문 샘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시요 말씀이다. 은밀하게 그러나 위대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주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양식(樣式)으로 제공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혼탁한 시대의 풍속을 뚫고서 속히 하나님을 체득하는 기도의 세계로 인도되길 바란다.
[저자 서문]주기도는 하늘의 기도이자 땅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서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초월적이며 내재적입니다. 이미 하나님이신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초월과 내재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자유인이냐 종이냐 하는 세상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대립이나 반목이 아니라, 화해이며 일치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주류 유대인들인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불온했습니다. 자기들의 땅의 논리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류 유대인들의 틀에 갇혀 계시지 않았기에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셨습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주기도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좀 다르게 기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리고 그 다름을 시도해 가는 용기를 낸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문 지리학의 대가인 이-푸 투안(Yi-Fu Tuan, 1930~ )이 했던 말 중에서 “정치 세계에서 한 행위가 다른 행위를 이끌어 내는 것처럼 하나의 책 또한 다른 한 권의 책에서 파생됩니다.”라는 말에 참으로 공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빚진 자임에는 분명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글쓴이보다 더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분들의 덕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세를 진 것이요 공동체적으로는 서로 사랑의 기쁨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여초책(與楚)>에서 “그대는 신령스런 지각과 예민한 깨달음이 있다고 남에게 잘난 척하거나 사물을 업신여기지 말게. 저들이 만약 약간이라도 신령스런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으며, 저들이 만약 신령스런 지각이 없다면 잘난 척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문자를 갖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하다네. 저기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이 글이 어찌 예수님께서 주신 기도의 전부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한여름 한바탕 울고 마는 매미의 울음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어림없는 세계에 발을 내딛어 보는 격이 아닐는지요.
픽사 영화사의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서, 카우보이 장난감 우디와 우주 비행사 장난감 버즈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버즈는 자신은 날 수 있다고 말하며 미끄럼틀과 천장에 달린 모빌의 힘과 원심력을 이용해 천장을 돌고 돌다 하늘(?)을 날며 이렇게 외칩니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다른 장난감 친구들은 버즈의 폼 나게 하늘을 나는 모습에 감탄하며 환호하죠. 그때 카우보이 우디가 분위기를 깨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나는 거야. 그건 그냥 폼 나게 떨어지는 거야.”
우리는 지구 별의 한 모퉁이에 있을지라도 고립된 상태가 아닌 무한한 공간 저 너머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하늘의 시민권자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삶이 세상의 중심임을 체득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들이 볼 때는 폼 나게(?) 떨어지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말이죠.
주기도를 통해 저 무한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며,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법을 또한 잘 배워 나가길 소원해 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폼 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차적으로 지금 여기, 평상, 일상을 살기 위함인 것이죠.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자는 베드로에게 내려 가자고 하셨습니다. 높음의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친 울타리를 걷어 내고 땅 끝까지가 우리의 일상입니다.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전 영역을 아울러서 말입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손을 내밉니다. 빈손입니다. 그 빈손에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살과 피에 참예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에서 떡과 잔의 행위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게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로 건물 교회 혹은 제도 교회 안에 머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로서,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신 주기도를 살아 내는 영역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입니다.
하늘에계신우리아버지여이름이
거룩히여김을받으시오며나라가
임하시오며뜻이하늘에서이루어
진것같이땅에서도이루어지이다
오늘우리에게일용할양식을주시
옵고우리가우리에게죄지은자를
사하여준것같이우리죄를사하여
주시옵고우리를시험에들게하지
마시옵고다만악에서구하시옵소
서나라와권세와영광이아버지께
영원히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
은밀하게
위대하게
주기도, 은밀하게 위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