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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화(雪上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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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정순  |  출판사 : 창조문예사
발행일 : 2020-02-15  |  (152*210)mm 452p  |  979-11-86545-79-9
  • 판매가 : 20,000원18,000원 (10.0%,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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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나 목적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가?
실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농촌 깊은 산속으로 찾아가 계몽 봉사활동을 하던 1960년대의 청년 이야기.
개인적이고 토막 난 실제 이야기를 한 시선으로 모아 장편소설로 엮었다.
여대생들의 헌신, 그 안에서 꽃피운 사랑과 좌절 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의미와 보람, 이상을 추구함은 언제나 마찬가지겠지만 1960년대는 전쟁을 겪고 가난한 탓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치의 대명사였던 이화여자대학생들도 보람을 찾아 농촌에 들어가 계몽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 아무리 희생정신으로 노력해도 실현되지 않는 상황과 실패의 고통을 놓고 고민해 보았습니다.
‘이상이나 목적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실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실현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이고 토막 난 활동들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시선을 모아보았습니다.
실명을 허락해주시고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뜻 아니게 상처를 드린 점이 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 <작가의 말>중에서



** <설상화(雪上花)>는 1960년대 대학생 청년들이 농촌 깊은 산속으로 찾아가 계몽 봉사활동을 하던 실제 이야기다. 인물들의 이름도 실명이다. 원하지 않는 분만 가명을 사용했다. 월간 <창조문예>에 2017년 1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영원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줄거리]]

1964년 3월 2일, 이화여대를 졸업한 선하는 강원도 고성의 산골 마을 선유실로 향한다. 1년 동안 이혜숙 선배가 닦아놓은 선혜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은 새로 온 선생인 선하를 환영하지 않고, 서울에서의 보조도 원활하지 않아, 선임인 박옥 선생과 선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학교의 지붕이 날아가고, 학교의 여러 가지 사업도 난관에 부딪히지만, 안반덕의 씨알농장과 새로 부임한 전도사의 협력으로 다시 힘을 모으는데......
동대문에서 새벽버스를 타고 열 시간이나 걸려 간성에 도착했다. 잠깐 군청에 들러 강성자를 만나보고 서둘러 30리 눈길을 걸어서 소정골에 닿으니 해질녘이었다. 반장 댁을 찾아가니 젊은 반장은 별 반가운 기색도 없이 자기네 칸막이 윗방을 쓰라고 했다. 뜻밖이었다. 적어도 반색하는 웃음을 띠고 안방으로 안내라도 할 줄 알았다. 섭섭함을 누르고 어둑한 빈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 늘 궁핍한 생활로 찌든 농민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특히 북쪽 사람들은 억센 기질로 말이 없고 무뚝뚝한 편이다. 그래서 그럴 뿐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들 환영한다는 인사말 한마디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윤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선생님! 대접받으러 왔나요. 뭐 제가 잘하면 되겠지요.”
활달 단순한 혜숙은 오히려 웃음을 띠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반장 집 뒷방은 북향이어서 낮에도 어두울 것 같다. 찌그러진 쪽문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굵게 엮은 새끼줄을 문풍지라고 매달아 놓았고 방안 벽은 누렇게 찌든 종이들이 반이나 떨어져 나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낡은 왕골자리를 깔아놓은 방바닥은 불이나 잘 들일지 걱정이다. 당장 불을 켤 등잔도 있어야 하고 석유도 있어야 했다. 이장이 사는 탑동리는 10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키지 않지만 모든 일을 이 뚝뚝한 반장과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을 부탁하고 알아보니 그 방에서 아이들도 가르쳐야 할 형편이었다. 근동 어린이들이 다 모이면 한 40명 된다는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틀 후에 윤 교수는 개강이어서 올라가야만 한다. 반장에게 혜숙이와 모든 일을 잘 돌봐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곧 되짚어 일어났다. 어둡기 전에 간성에 도착해야 자고 새벽에 서울행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22∼23쪽)

“윗마을로 인사 좀 다녀올라구요.”
옥이 퇴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려는 검은 쭉정이 같은 반장에게 말했다.
“다녀오긴 해야지요. 해도 선생님이 자꾸 바뀌니 그리 반가워할 리도 없을 거요.”
그는 꽁초 담배를 한 모금 쪽 빨아 내뿜으며 먼 산 위의 흰 눈을 부신 듯 찌그려 보았다.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그 말에 선하는 왜 그럴까 저 반장은, 어제저녁 박 순경 부인도 그 비슷한 모습을 보였는데 생각하며 또 한 번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선생님이 자꾸 바뀌다니요?”
선하가 반장 집 마당을 지나 언덕 아래 냇물 가에 이르자 물었다.
“혜숙 언니가 나가서 못마땅해서 그래요. 이곳에서 평생 일해줬으면 하는 모양들인데 뭐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나야 뭐 이곳에 평생 있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하하. 김활란 총장도 우리 졸업생이 이곳에서 평생 몸 바쳐 일하겠다면 이대에서 퇴직 교수들처럼 뒤를 마련해주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연대(連帶)적으로 해간다면 모든 것을 스스로 창출해내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좀 지나치긴 했죠. 혜숙 언니가 2년 있는 동안 세 사람이 몇 달씩 있다가 나갔으니까요. 네 번째로 내가 왔고 다섯 번째로 박 선생님이 오고요. 그리고 우리가 나가고 다른 사람들이 올 테니까 자리가 안 잡히는 기분이겠죠. 하지만 모든 것을 계획하에 연대 책임으로 해나가는 거 아닙니까? 말해줘도 어리석은 농촌 사람들이 의심만 품는 거예요. 최 반장은 원래 트집 잡는 데 일등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옥은 일부러 그에게서 신경을 끄려는 듯 <봄처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하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69∼70쪽)

“아버지 안 계시니?”
옥이 물었지만 소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슬픈 눈으로 열린 문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아니 푸른 하늘 그 너머 자신의 슬픔만을 아프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프도록 파리하게 빛나는 하얀 피부에 연분홍 볼이 벚꽃같이 아름답다. 그 얼굴에 꽃술처럼 살짝 드러난 노르께한 눈썹이 환상적이다. 방 안엔 한 번도 개키지 않은 듯한 새까만 이부자리가 가득 깔려 있었다. 알키하고 쾨쾨한 악취가 심하게 났지만 그 애에게서 뿜어 나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광채가 이 모든 불결을 덮어버리고 있었다. 노랗게 솟아나는 가는 머리칼 사이로 쇠똥이 파르스름하게 낀 빡빡머리까지 그 애의 슬픈 얼굴이 뿜는 후광 같은 것에 가리어지고 말았다. 선하는 자신도 모르게 더럽고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름이 뭐니?”
선하는 형벌같이 느껴지는 그 애의 빡빡 깎은 머리를 애틋이 쓸어주며 물었다. 따스한 선하의 시선이 소녀의 눈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주! 공주님이래요. 하하하.......”
밖에서 여러 애들이 함께 소리치며 웃어댔다. 공주? 아! 이 애의 이름이었구나.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공주라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겠지만 소녀는 그 소리가 몹시 싫은 듯 얼굴을 찌푸리고 좀 더 슬픈 표정을 했다. 선하의 가슴이 찌릿해왔다. 얼른 그 애의 상처를 건너가고 싶다.
(84∼83쪽)

선하는 물병에 꽂은 진달래꽃을 사무실 창 밑 풍금 위에 올려놓았다. 돌아서서 학용품장에서 가장 얇은 1학년용 노트를 하나 꺼냈다. 노트 첫 장 맨 윗칸에 ㄱ ㄴ ㄷ...... 그 다음 장에는 ㅏ ㅑ ㅓ ㅕ...... 그 다음 장에는 가 나 다 라...... 한 줄씩 써가지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민이가 늘 해바라기를 하는 사무실 앞 벽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혼자 왔니?”
선하는 그 애 옆에 가 같이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물었다.
“예!”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니? 호랑이도 막 나온다는데.......”
선하는 신통하다는 듯 민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아뇨! 낮에는 괜찮아요.”
민이는 땅만 내려다보고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대답했다.
“그래도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형이나 누나들하고 같이 다녀야 한다. 알았지?”
선하는 민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민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번에 선생님하고 기역(ㄱ), 니은(ㄴ), 디귿(ㄷ) ...... 쓰며 읽어보았지? 오늘은 그다음 해보자.”
선하는 ㅏ ㅑ ㅓ ㅕ......를 소리 내며 땅바닥에 돌로 쓰기 시작했다 민이가 따라서 잘해주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아주 잘하는데! 다시 한 번 해보자.”
선하는 기뻐서 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반복시켰다. 그다음 노트를 보여주고 한 장씩 꽉 채워 쓰고 읽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민이는 기쁜 얼굴로 노트와 연필을 받아가지고 교실로 들어갔다.
(143∼144쪽)

꿈결에 선하는 천둥보다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성난 파도가 밀려갔다 밀려오는 듯한 소리다. 하늘이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가슴, 머리 위에서 함석지붕이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찢는 소리를 냈다. 선하의 가슴이 걷잡을 수없이 뛰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선하는 그래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는 옥의 가슴을 흔들었다.
“바람이에요, 바람.”
의외로 옥도 잠결에 어렴풋이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험악한 바람 소리가 듣기 싫은 듯 이불을 얼굴까지 푹 뒤집어쓰며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선하는 소용돌이치는 바람 소리가 두려워 떠름한 마음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놀랍게도 훤한 구멍이 보였다.
“아니 천장이 뚫렸나 봐요.”
선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몹시 허전하다 싶은 천장 사이로 언뜻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공포에 휩싸인 선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예? 천장이 뚫렸다구요?”
동시에 옥도 솟구쳐 일어났다. 혜숙이가 학원 낙성식을 하고 난 겨울에도 있었던 일이다. 찢겨나간 천장 반자 사이로 하늘이 훤히 보였다. 달이 환한 모양이다. 들뜬 함석 조각들이 바람에 몹시 털썩이며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펑 뚫린 천장만큼 그녀들 가슴에도 갑자기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점점 커져가는 함석지붕의 울부짖는 소리에 두 여자는 넋을 잃고 말았다. 몸마저 산화해 산산이 흩어져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박 선생님!”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곳에서 숨차게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낯익은 소리 같기도 했고 전혀 낯선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바람의 혼령이 끝없이 어두운 우주 속으로 그녀들을 불러내는 것 같았다.
“박 선생님!”
바람이 잠시 숨을 돌려 잠잠한 순간 그 소리는 명확하게 들렸다. 종태의 둥글고 미더운 음성이었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두 여자는 정신이 번쩍 들어 튀듯이 뛰쳐나갔다. 부엌문을 열자 바람이 미친 듯이 부엌문을 낚아채버렸다. 순식간에 밀려든 바람 떼를 안고 헉헉거리는 그녀들 앞에 종태가 나타났다.
“천장이 날아갔어요.”
평소 여장부 같던 옥의 음성이 금방 어린애처럼 울먹였다.
“그럴 것 같아서요.”
종태는 학원 지붕이 날아간 것이 혜숙의 몸이 찢겨져 나간 것같이 가슴이 아프나 옥을 안심시키려 부드럽게 말했다.
“이 밤중에 어떻게 알고 내려오셨어요?”
선하의 눈에도 고마움의 눈물이 핑그르르 고인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는 10킬로미터가 넘는 먼 곳에서 달려온 것이다.
(156∼157쪽)

선하는 조금 일찍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벌써 거의 다 와 있었다. 요즘 며칠간은 아이들이 전부 다 나와서 마음이 흐뭇했다.
“안녕하세요?”
선하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눈으로 살펴보며 인사했다. 새까맣게 때가 낀 빡빡머리에 누렇게 빠지는 코를 훌쩍거리며 앉아 있지만 표정이 똘똘하게 살아 있는 귀여운 애들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이들은 장난기 섞어 교실이 들썩하도록 소리쳤다. 선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귀가 따가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마구 더 소리치며 웃어댄다.
“선생님! 어젯밤 바람에 또 학원 지붕이 날아갔어요?”
환한 웃음바다 속에서 걱정스런 듯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지며 모두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래요. 하지만 밤중에 안반덕 김 선생님이 와서 다 고쳐주고 가서 이제 괜찮아요. 아무 걱정 말아요.”
아이들이 걱정할까 봐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아하!’ 하고 안심하는 아이들이 있는 가운데 선하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 봐라. 틀림없다야. 바람 귀신이 붙은 거래. 야! 재수 없다야. 내년에도 또 날라갈끼라. 에이!”
“우리 할머이가 그러는데 학원은 이제 망할 끼래.”
심각해진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느라 선생님이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용히들 하지 못해요.”
선하는 손바닥으로 교탁을 탁 치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이들은 그제야 주춤해서 바로 앉았다.
(166∼167쪽)

“선상님, 선상님! 이거 봐요. 이히히.”
4학년 학생 김관호가 돌아서서 맨 뒤에 가는 선하를 향해 소리쳤다. 유난히 검은 피부에 큰 머리통과 황소같이 부리부리한 눈을 한 녀석이 삽자루 끝에 꽃뱀 한 마리를 걸쳐놓고 높이 쳐들어 보인다. 꿈틀거리는 꽃뱀을 떨어지지 않도록 삽자루를 잘 조종하고 있었다.
“어머나! 물면 어떻게 하려구?”
선하는 뒤에 머물러 서서 얼굴을 찡그리고 두려워 소리쳤다.
“하하하! 안 물어요. 한 대 탁 치면 그냥 뻗어버려요.”
녀석은 시범이라도 하듯이 삽자루에 걸친 뱀을 땅바닥에 털어놓고 날렵하게 머리를 죽지 않을 정도로 살짝 쳐서 다시 삽자루에 걸쳐들었다. 몹시 꿈틀대던 뱀은 늘어지고 만다. 애들은 바라보고 1학년짜리까지 모두 신나했다. 갑자기 선하는 학생이 된 것 같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관호는 언제나 훌륭해 뵈던 선생님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개선장군처럼 자랑스럽게 어른스런 몸짓을 해 보인다.
“에이! 징그럽다. 저쪽에다 버려라, 버려!”
앞에 가던 옥도 소란스러운 바람에 돌아보고 얼굴과 몸을 웅숭그리며 소리쳤다.
“왜 버려요. 이걸 삶아 먹으면 얼마나 맛이 좋은데요.”
관호가 코를 훌쩍거리며 어른처럼 밭은기침을 하다 삽자루를 아래로 땅에 꽂았다.
“그걸 먹어?”
많은 사람이 뱀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하는 징그러운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맛이 참 좋아요.”
“닭고기 맛 같아요.”
선하 옆에 있던 1학년짜리 계집애들이 어른스런 태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순간 선하는 그런 건 징그럽고 위험하니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은근히 문화인임을 자랑한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굶주리는 애들에겐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잘 해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 옳았을 것이다.
(215∼216쪽)

옥과 전도사가 벌채 허가를 받으러 가고 선하는 혼자 남아 학원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적막해지자 깨끗한 빨래를 한 아름 안고 시냇가로 나갔다.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부러 물소리를 철렁철렁 내며 빨래를 한다. 물소리와 바람을 타고 노니는 공기의 울림이 보이고 간헐적으로 흐르는 역동의 바람 소리, 태고의 세계로 끌고 가는 생명의 소리가 있다. 산 그림자가 물 위로 점점 커져온다. 발소리조차 없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어서 선하는 슬며시 돌아보았다. 커다란 흰색 농구화 위로 올라갈수록 포플러나무처럼 미끈한 몸체 끝에 엷은 분노와 우수가 고인 조각 같은 얼굴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관대바위 같은 얼굴, 한 군데 굴한 데 없는 부처님을 닮은 얼굴이다.
그가 옥이 늘 기다리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선하를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학원에 들렀더니 아무도 안 계시더군요.”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명확했으나 차가우면서도 우울한 톤이 섞여 있었다. 그 분위기가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필, 이럴 수가, 옥이 없는 때 불쑥 나타나다니, 옥은 재수도 없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올 때 만나지 못하다니, 어떻게 하든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하는 벌떡 일어났다.
“예! 박옥 선생님은 벌채 허가를 받으러 간성에 갔어요. 어떻게 하죠? 좀 기다리세요. 곧 올 겁니다.”
선하는 옥을 못 만나는 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미안하여 젖은 손을 비벼대며 말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잠시 나무라듯 하다 노을이 곱게 핀 하늘을 쓸쓸히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다.
“아닙니다. 그냥 올라가겠습니다. 늦어서요.”
그는 차가운 얼굴로 선하에게 꾸벅 허리를 굽히고 발길을 돌려버렸다. 어딘지 단호한 태도가 보여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284∼285쪽)

“아침밥이 늦었네요. 선생님도 벌써 일어나셨나?”
선하는 얼른 사무실 쪽 방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다행히 윤 교수는 마룻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덮고 아직 자고 있었다. 몹시 피곤하셨던 모양이다. 둘이 얼른 부엌으로 나갔으나 아뿔싸 쌀이 똑 떨어진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죠?”
선하가 조용히 말했다. 옥이 잠시 망설이다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랫마을 사친회장 집에 머물고 있는 대원들에게 쌀을 꾸러 갈 작정이다. 마을에서는 여러 번 꾸려다 퇴짜도 맞고 해서 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제저녁 윤 교수와 횃불회장 눈치를 봐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생활비를 준비해오지 못한 모양이다. 횃불회도 그동안 잠사 짓느라 거덜이 난 모양이다. 학원도 방학이고 해서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쌀이 며칠만 더 먹을 게 있어도 이리 곤혹스럽진 않을 텐데 마침 똑 떨어지고 만 것이다. 방학에 집에도 다녀와야 할 텐데 차비도 한 푼 없는 형편이다. 횃불회장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쌀을 꾸면 형편을 알게 되겠지 하는 계산도 넣었다. 쌀을 한 바가지 꾸어가지고 나오는데 생각했던 대로 횃불회장이 쫓아 나왔다.
“박옥 선생님! 미안해요. 생활비도 못 준비해서. 방학이라 회비도 걷지를 못했어요. 서울 가서 곧 자선음악회를 할 거예요.”
회장은 모든 것이 자기가 못난 탓인 듯 몹시 미안해했다.
“방학 때라 그렇겠죠. 괜찮아요. 나도 집에 내려가 한 달 동안 쉴 건데요, 뭐.”
옥은 가슴이 답답했지만 여유 있게 말하며 풀기 없이 웃었다.
“내일 나하고 같이 서울 올라가요.”
“그럴까요. 잘됐네. 심심치 않게.”
옥이 금세 환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차비 하나는 해결이 됐다. 쌀이 수북이 담긴 붉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학원으로 향했다. 반찬은 어제저녁에 대원들이 준 것이 있으니 얼른 쌀밥만 해서 놓으면 진수성찬을 윤 교수에게 올릴 수 있다. 선하가 운동장까지 나와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옥의 손에 든 쌀 바가지를 보고야 안심이 되는 듯 활짝 웃는다.
“윤 교수님 잠사 갔다 온다고 나가셨어요. 얼른 밥해요.”
두 여자는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듯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하나는 쌀을 씻고 하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야단이다. 윤 교수가 들어오자 잔칫상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여자들처럼 행복해했다.
(321∼322쪽)

어느새 선하의 얼굴 아래로 턱 밑까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간호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하며 천천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세요.”
선하는 그 영겁의 거리를 잡기라도 하듯 꿈쩍 않고 말했다. 그때 레일바퀴 소리가 요란히 나며 출입문이 열렸다. 흰 가운을 입은 중키의 남자가 쾌활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알맞은 몸매에 금테 안경을 쓴 곱상한 60대 노인이었다.
“어!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그가 선하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물었다. 이 산골 사람 같지 않은 아가씨가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좀 당황했다. 선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는 이런 산골에서 보기 힘들 만큼 세련된 노인으로 중후한 인품을 갖춘 사람같이 보였다. 믿음이 간다.
“어마! 난 선생님이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어디 갔다 오세요? 선혜학원에서 오셨대요.”
간호사가 놀란 얼굴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아! 선혜학원 선생님인가요?”
슬픈 빛에 싸인 선하의 모습에 그는 눈을 떼지 못했다.
“네! 마을 아줌마가 어제서부터 애를 쓴다는데 애를 낳지 못하고 죽을 것 같대요. 선생님, 좀 가봐주세요.”
선하는 조신하게 말했으나 거절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막 퇴근하려던 참인데.”
그는 좀 곤란한 표정을 했다.
“젊은 남편이 와서 울면서 애원하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요. 선생님 퇴근하기 전에 오려고 여기까지 뛰어왔어요.”
선하는 미안해하면서 좀 더 겸손하게 말했다.
“임산부보다 선생님을 도우러 가야겠네요. 간호사, 가방 챙겨요.”
(351∼352쪽)

선생들이 구호 곡을 먹은 것을 안 학부형들이 학원으로 몰려들었다.
“아니 선생님들이 아이들 구호 곡물을 빼내 먹어도 되는 겁니까?”
반장이 차가운 눈초리로 옥을 쏘아보며 말했다. 선생들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 보세요.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죽어도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옥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전도사와 선하를 바라보고 쏘아붙였다. 그녀가 옳았다.
“죄송합니다. 송금되어 온 돈을 전부 잃어버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한 번만 먹자고 제가 말했습니다. 다음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이해해주세요.”
선하가 얼른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학부형들한테 미리 의논을 하고 먹었어야 옳지 않습니까?”
“이해해주시려니 하고 그만 죄송합니다. 어려울 땐 서로 돕는 게 이웃 아니겠습니까?”
전도사가 겸손히 말하다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거와 이건 다르지 않습니까?”
반장은 집요했다. 선생들은 그러한 학부형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쌀도 잘 꾸어주지 않고 자기 자식들을 가르쳐주는 선생들이 굶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오직 자기네들만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같다. 차갑고 날카로운 반장과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은 이것저것 불만을 끄집어내기 시작하더니 또다시 학원을 타도하기 시작했다. 선생들 먹을 것도 제대로 대주지 못하고 학생들 앞으로 나오는 구호 곡물까지 축내는 학원을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고 일해 나갈 수 있냐는 것이다. 이번엔 도지사의 호의로 어떻게 중학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앞으로 도청에서도 무얼 보고 학원 인가를 내주겠냐는 것이었다. 몇 사람은 아이들을 간성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협박했다.
(365∼367쪽)
추천의 글
작가의 말

1. 그곳에서 손짓해 부르는 소리
2. 야호의 메아리
3. 새 아침의 물결
4. 선유실 공주와 올챙이
5. 서머 타임
6. 폭풍의 학원
7. 안반덕
8. 산속 뽕밭을 찾아온 엉뚱한 전도사
9. 결혼이란 숙제
10.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들
11. 생각하는 씨
12. 결실의 계절
13. 꿈나무 학교
14. 선택의 고지(高地)
15. 눈 속의 부활
16. 새 힘의 물결
“가난과 무지와 불화한 부모 밑에서 유소년기 시대를 보낸 청년이 자신의 불행·불우한 환경에 굴함이 없이 인생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성실하고 굳건한 행로를 그려줌으로 해서 혼란하고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취해야 할 지성 청년의 정신의 자세를 제시한 작품이다. 주제의 설정도 좋았으나 자칫하면 평이적이요, 지루할 수 있는 주인공의 과거를 현재의 재기발랄한 여대생과의 애정의 교섭과 점철시켜 작품의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심사위원의 공통된 의견이었고, 이만하면 문단에 발표해도 신인작품의 수준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기도 했다.”
- 〈몇 번째의 자세(姿勢)〉를 문단에 소개하면서, 안수길(安壽吉)

박정순 님이 안반덕과 선유실을 개척하던 소설을 썼다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청춘을 바치며 헌신했던 안반덕 씨알농장과, 농촌계몽을 위해 시작한 선혜학원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사랑으로 꽃피웠던 일, 씨알농장을 만들어가면서 함께했던 동지들과 함석헌 스승님과의 추억, 손수 지은 오두막집의 모습 등 소중한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무모하기까지 했던 당시의 초심을 생각해보고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합니다.
사람의 인연은 축복의 선물입니다. 안반덕 선혜학원에서 만났던 많은 인연들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박정순 님의 《설상화(雪上花)》는 함께했던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 영원한 삶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설상화(雪上花)》의 발간을 축하드리고 행복한 추억을 선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김종태(2006년 인촌상 수상, 평화의 마을 대표)

박선하 선생과 선혜학원을 돌보고 있던 눈 덮인 겨울 어느 날, 평소엔 돌팔이 의사 노릇을 제법 톡톡히 해 외과, 내과, 산부인과까지 돌보다가 막상 내가 급체를 당했을 때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여러 가지 방도를 다 해봤으나 차도는 없고, 병세는 악화되고, 나흘이 지나자 다급했던지 박선하 선생이 수업하다 말고 8킬로미터 떨어진 간성으로 달려가 평소 가깝게 지내는 포대장에게 말해 지프차에 보건소장을 데려왔고, 동리 사람들은 고향 금화정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오는 법석을 떨었다.
보건소장의 주사, 약 처방과 아버지의 약초(삽주 뿌리, 창출과 백출) 처방으로 다행히 통증이 멎었고,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박선하 선생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9년에 횃불회 57주년 행사에 참석하니 옛 생각이 새롭게 난다. 게다가 《설상화(雪上花)》가 출간된다고 하니 선혜의 횃불이 여전히 불타오르는 듯하다. 감회가 새롭다.
- 주성호(현 미국 Midwest University 교수, 전 선혜학원 교사)

선혜학원 하면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몇 년 전 일처럼 생각난다. 오지 중의 오지인 곳에 오셔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가르치시던 선생님들이 제일 생각난다. 이혜숙 선생님, 곽점분(분이) 선생님, 주성호 선생님, 박정순 선생님, 윤화자 선생님, 이춘자 선생님, 우애령 선생님.
처음 이혜숙 선생님이 소정골에 있는 함관호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시다가 최돈철 집에서 가르쳐주셨다. 강원도지사님이 다녀가신 뒤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교실 한 칸, 선생님이 기거하실 방 한 칸 학교가 지어지고, 주성호 선생님이 계실 때 기름종이(루핑)로 지붕을 이은 교실 한 칸이 더 증축되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과 뒷산에 올라가 톱으로 긴 소나무를 잘라다가 국기게양대도 만들고 관대바위 밑에 뽕나무도 심었다. 매주 수요일은 예배를 보았다.
여선생님들의 주선으로 난생처음 서울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 한 분이 우리를 서너 명씩 댁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이태원에 사시는 우애령 선생님을 따라갔다. 창경원, 남산 케이블카, 방송국, 미도파 백화점, 이화여대 교회 앞에서 사진도 찍고 앨범 선물도 받았다.
윤화자 선생님은 결혼식을 올리려고 고향 부산으로 가며 후에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셨는데, 신혼여행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한없이 울었었다. 그 후 선혜학원은 간성국민학교 선혜 분교로 편입되면서 막을 내린다.
오늘 나를 있게 한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그때를 다시 볼 수 있는 책이 나와 기쁘다.
- 김인수(당시 선혜학원 학생)
박정순
1962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6년 동대학 기독교문학과 석사
1962년 《자유문학》에 〈몇 번째의 자세姿勢〉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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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설상화(雪上花)
저자박정순
출판사창조문예사
크기(152*210)mm
쪽수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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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202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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