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황폐화란 무엇인가
The Public Ruin of the Church
딤전 3:15, 16, 딤후 2:19-22을 읽으시오.
질문 1. 교회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에서 현재 황폐화되었다는 것인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기에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알아채든 그렇지 않든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나는 형제들이 시련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동시에 주님의 손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이 사실에 무한한 격려를 느낀다. 이는 주님이 어떤 식으로든 돌보실 때에는, 주님을 신뢰하는 영혼은 확실히 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님은 우리를 흔들고 또 겸손하도록 누르시긴 하지만, 항상 우리의 선을 위해서 일하신다. 나는 몇몇 성도들이 이전 자리보다 더욱 존귀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이 점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긍정적인 복을 보고 있다. 육신이 있지만 여전히 복이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겐 위로가 될 것이다. 확실히 실패가 있고, 그것도 엄청난 실패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조차도 하나님이 (여전히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세상이 몰래 우리 가운데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낙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복이 임할 것이란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많은 형제들이 "교회의 황폐화"라는 표현에 난감해한다. 나는 이 말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생겼지만, 혹 교회가 실패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그들의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불평할 생각은 없다. 사실 그들은 교회가 황폐화되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사람의 책임 아래 놓여 있는 현재 세대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교회의 황폐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지상에서 하나됨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세워진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고, 또 우리가 들어간 자리가 책임의 자리인 것과 항상 그 책임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만일 교회가 영적으로 실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참담한 일이 될 것이다!
황폐화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형제들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우리가 이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일종의 시기심도 있다. 나는 이것을 존중하며, 혹 교회 황폐화란 개념이 하나님의 목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유감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과 연결된 교회는 황폐화될 수 없지만, 실제적인 현재 상태와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간증과 연결된 교회는 현재 황폐화 상태에 있다.
이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글쎄요. 현재 교회가 황폐화 상태에 있다면 그렇겠지요. 우리는 그 상태에 있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리는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장차 올 진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처럼 무기력하고 손을 늘어뜨리게 하는 말, 곧 모든 영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말투는 교회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폐허 상태에 있는 것을 알고도 거기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은 교회 황폐화란 생각이 오히려 우리를 낙심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낙심에 빠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며, 언제나 변함없이 그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의 황폐화"란 표현이, 교회에 복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임에도 영혼을 낙심시킨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언급해온 내용들은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도시킬 정도로 교회가 전적으로 황폐화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실제적으로 황폐화가 일어난 곳일지라도 주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의 상태와 별도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한 상태에 비례해서 작동하는 법이다.
우리는 다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거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곳에서 조차도,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연약은 다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슬픈 상태에 처해 있으며, 그 상태를 치유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낙심 상태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서있는 한, 교회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가 구원받을 것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원들을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나쁜 상태에 있다면, 나는 그저 그 상태를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 해도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나에게 바른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나의 영혼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이 그 능력으로 일하실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패를 보기 때문에 낙심에 빠지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돌보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이며, 그럴 위험을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님이 교회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복을 가져오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복을 구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을 따라서 전진해갈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말은 우리의 열정을 앗아가 버릴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복이 교회에 임하도록 하나님의 현재적인 능력을 갈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교회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복을 구한다면, 오늘날 엄청난 영적 하락과 실패의 시대에서 그 복을 간절히 구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정 자신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길 바라시며, 또한 살아있는 믿음 또는 생생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필요를 볼 뿐만 아니라 그 필요에 대한 주님의 생각과 마음까지 보고 또 주님의 현재적인 사랑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로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는 생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뿐더러, 그저 영혼의 쉼을 누릴 순 없다고 본다.
물론 교회는 구원받을 것이며,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진정으로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서 성도 개인에게서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나의 믿음이 작동하고 있고, 성도 개인이건 교회이건 간에,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면, 나의 영혼은 결코 만족한 상태에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성도 개인에게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는 복을 누리고 있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처럼 말세에 주님이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성도들을 일으키시고 각성시키심으로써,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을 하게 하실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이 주의 재림의 진리와 및 재림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훼손시키고자 애쓸 것이란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이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가진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교회의 자리에 들어올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는 연약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속한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고,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복 가운데서 교제를 나누지만, 정작 복을 가져다주는 원리와 은혜는 알지 못한 채 지내게 될 것이며, 그 결과로 복은 바닥날 것이, 안정감도 없고, 불확실성 속으로 더욱 빠져들 것이다. 이 때 사탄이 우리 영혼을 침노할 것이며, 우리 믿음의 경박스러움만 나타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내다보면서도 나는 주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각 처에서 많은 성도들의 영혼을 각성시키는 일을 하시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영적 갈망을 일으키고 계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많은 사랑스러운 성도들조차도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도 구원받고 또 영광에 들어갈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이 사실이긴 해도, 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해 서있는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의 기초가 되기에 중요한 일이다.
만일 주님이 이제라도 성도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교회와의 관계를 제대로 바라보도록 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참되고 신실한 증거를 감당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첨언하자면 이렇다. 즉 어떤 특정 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증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진리는 사탄에 의해서 방해를 받아 수용하기가 힘들게 된다. 즉 이 말은 사탄은 하나님이 자기 성도들을 위해서 새롭게 제시하신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증거를 사용하려 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는 우리 모두가 붙들고 있는 진리이지만, 기독교를 전복시키고자 유대인들이 그 진리를 사용했다. 그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다"라고 말했고, 사실 그들에겐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이 계시하셨던 특별한 증거, 즉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계시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만일 하나님이 성도들을 증거의 자리에 세우고자 진리를 제시하신다면, 사탄은 바로 그 진리에 대해서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대해서 성경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혼미케 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진리에 대한 증거를 잘 감당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사탄이 성도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성도들은 그 진리를 피곤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과거 진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사탄은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 일로 인해서 큰 이득을 보게 된다. 이러한 영적 실제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주님은 사탄의 손을 사용하신다. 물론 그처럼 시대적인 진리를 놓아버리는 롯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더욱 견고한 진리의 터 위에 서서 신실한 영혼들을 일으키는 일에 주님께 쓰임을 받는 영혼들도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주님의 재림과 교회 안에서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진리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진리이긴 하지만, 단순함 가운데 행하는 영혼들은 이러한 사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고, 더욱 굳건하게 붙잡게 될 것이다.
영혼의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사역을 통해서 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라는 위대한 진리를 다루진 않겠다. 마찬가지로 구약성도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부활의 때에 주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있을 것이란 사실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내용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핵심적인 내용들을 다룰 것이다. 우선적으로 다룰 것은,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무슨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가?에 대한 것이다.
건전한 믿음을 가진 매우 보배로운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만일 모든 시대 구원받은 성도들이 최종적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위 구속과 생명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둘째 아담에 속하고, 그래서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총회로 부른다면, 나는 거기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아담에 속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아담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처럼, 둘째 아담에 속한 사람들이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을 거란 사실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자리, 우리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또 다른 진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것은 동일하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백성이 되기 전에도 구원의 역사는 있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에,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음을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별개의 계시가 있었고, 그 사실에 기초한 별도의 관계가 있었다. 만일 이러한 계시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계시에 충성스러울 수 없을뿐더러 계시에 따르는 복을 잃어버릴 것이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다윗도 구원받았다. 하지만 다윗이 감당해야 했던 지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책임은 아브라함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다윗은 아브라함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요구들과 및 별도의 위치에 속한 한 백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무엘과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무시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서 세우신 토대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절대적이면서도 독특한 증거를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의 몸(One Body)"인 것을 보았다. 교회는 그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세워졌다. 이제 주님이 나에게 힘을 주시길 바라며, 이제부터 교회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과 하늘에 계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연합을 이룬 하나의 몸으로서, 성도들을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하늘로서 강림하셨다.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까지 높임을 받으신 결과로, 하늘로서 강림하신 성령님에 의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하나의 몸인 것이다.
흔히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교회로 부르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거기에 익숙한 선량한 성도들은 혹 이러한 교회에 대한 정의가 그것을 변경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뿐더러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영혼들의 영혼의 격동을 크게 존중하며, 혹 이러한 차이점이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을 따라서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근본 원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통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로 들어가도록 하신 (몸으로서의) 그 지위(the position)를 바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명하신 그 이름대로 부르는 것이야말로 나의 특권이자 나의 의무인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결코 아담의 때로부터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미래형으로 "내가 세우리라(I will build)"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이에 대해 뭐라 말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사탄의 거짓말일 뿐이다. 소위 가시적인 교회는 사실상 세상일 뿐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를 전혀 내놓지 못한다. 만일 내가 교회를 비가시적인 몸으로 말한다면, 교회에 속한 특별한 증거는 모두 사라진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은 어떤 가시적인 형태를 띠었는가? 하나의 국가 형태였다. 그 당시 하나님의 통일성은 하나의 국가의 통일성 형태를 띠고 나타났고, 100명 가운데 99명은 회심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회심한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그들은 백성들 가운데 감춰진 보배와 같았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여선지자 안나는 예루살렘의 속량(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다(눅 2:36-38).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신자들의 이러한 상태와 종종 혼동을 일으키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제 성도들은, 예수님이 높이 되신 결과로 하늘로서 오신 성령님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우리의 정서, 그리고 우리의 의무는 이 진리에 기반하고 있다. 만일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성도들의 행실과 양심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물론, 그 일은 아직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기초석(터)은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에베소서가 이 진리를 소개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사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분의 죽으심과 겸손의 결과로 하늘에서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높이 올리신 진리에 터 잡고 있다. 구속의 역사는 그리스도에게, 물론 이미 아들이란 이름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이름을 주었다. 교회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자리에 들어가 있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들은 의(義)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다. 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의에 속한 소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성취되었고,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하나의 백성을 세우셨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에 하나님의 섭리의 근거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이었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골 3:11)
그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그 때 그들은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가 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나님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엡 2:14) 허물어 버리셨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 사이에 담을 세우셨지만, 이제는 한 새 사람(one new man)을 지으시기 위해서 그 담을 허물어 버리셨다. 그럼에도 오순절 이전 많은 유대인이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거기서 원수 된 것을 제거하시고, 또 하늘 높은 곳에 오르신 자기와 그 둘을 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들과 한 새 사람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랐던 시므온과 안나와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구원받았고, 오늘날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그들도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과 무슨 관계를 맺으셨는가? 그들을 유대인으로 남겨두셨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의 영혼들이 구원받았다. 하나님은 그들과 무슨 관계를 맺으셨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교회에 더하셨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엡 2:22) 가게 하셨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은 파괴되도록 하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새로운 하나의 성전으로 세워지게 하셨다.
에베소서 3장은 이러한 비밀을 열어주며 우리를 위해서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in us)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란 구절로 마치고 있다. 에베소서 4장은 교회의 소명에 대해서 교훈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앞에서 말한 원리에서 떠나게 되면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자신의 거처가 되도록 부르셨다. 단순히 성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며 또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아브라함도 성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표식을 주셨을 때, 만일 그의 후손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을 무시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고 또한 지상에서 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는 특권에서 끊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 또한 소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된다. 물론 교회는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몸을 이룰 것이지만, 교회에 말씀하시는 성령님은 지상에서도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길 바라신다. 성령님은 하늘로서 오셨고, 교회를 하늘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도록 형성하신다.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는 하늘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사들에 대해서 볼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역사는 하늘에서 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는]"(엡 4:16) 것도 지상에서 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는 동일한 증거를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령님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한 몸으로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고전 12:18) 이 일은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어느 면에선 하나의 몸(즉 하나의 공동체)이었고, 광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회중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몸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이후, 하늘로서 오신 성령님을 통해서 지상에서 형성되었다는 것만큼 (물론 하늘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포함해서) 분명한 일은 없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