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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만나는 즐거운 교리 :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Remembering the Faith : What Christians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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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 더글라스 브라우어/이종태  |  출판사 : 복있는 사람
발행일 : 2001-04-09  |  신국판 (153×225) 228p  |  89-951014-3-1
  • 판매가 : 8,500원7,650원 (10.0%, 8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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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믿는 신앙 내용을 다시 기억하라!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은 주일학교 때 배웠던 내용을 지금 기억할 수 있는가?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삶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당신의 신앙은 당신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신앙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넘어지고 마는 그리스도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는 기독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대한 간략하고 쉬운 개론서이다. 사도신경의 뼈대를 따라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계시, 하나님, 창조, 섭리, 예수, 속죄, 성령, 교회, 성화, 성례, 삼위일체, 종말--을 업그레이드된 복음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각 교리들--현대 작가들의 관련 인용문과 전통적인 교회 신조와 신앙고백문까지--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피면서 그것이 왜 오늘날에도 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앙의 본질적 내용을 놓쳐버린 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신앙 내용으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크나큰 유익을 주는 책이다.


질문하는 신앙, 응답하는 삶

저자 더글라스 브라우어 이 책을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지난 수년간 목회사역을 해오면서, 나는 내가 섬기는 교인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관심이 점점 많아졌고 때로는 곤혹스러움마저 느꼈다. 그들이 믿고 '있는가 아닌가'(if)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체 그들이 '무엇을'(what)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내가 배운 신학교의 교수 가운데 한 분은 신학을 "질문을 던지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신학이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신앙, 용감히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부터 자라 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언제나 우리가 그같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기독교 신앙의 진리 여부를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주된 목적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왔던 바, 우리가 전해 받은 신앙 전통의 윤곽을 알기 쉽게 개론적으로 그리고 싶은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를 향한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우리가 삶의 가장 힘겨운 도전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의 신앙 '내용'은 그 질문들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더 많은 독서와 더 많은 사색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설교를 통해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당신에게 하고 싶다. 그것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나의 영적 여행을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용감히 질문을 던지는 신앙인, 그리고 그 질문에 응답하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1장 '하나님을 향한 갈증' 중에서 ]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도전해 온다면?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지난 수년간 목회사역을 해오면서, 나는 내가 섬기는 사람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 문제에 대해 관심이 점점 더 많아졌고 때로는 곤혹스러움마저 느꼈다. 그들이 믿고 '있는가 아닌가'(if)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체 그들이 '무엇을'(what)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제인은 내가 섬기는 교회 일원이었는데 일년의 태반을 병원에서 보냈다. 늘 입원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입원이 잦았고, 그럴 때면 나는 병실을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간의 목회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성격의 대화였다. 전에도 적지 않은 병원 심방을 해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손꼽아 고대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피하고 싶은 심방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심방에서 나는 모종의 흥분을 느꼈던 것 같다. 병원을 떠날 때면 나는 늘, 내가 그 대화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것은 전혀 틀에 박힌 심방이 아니었다.

제인은 많은 질문을 던졌다. 병원에 갈 때면, 흔히 나는 시카고의 날씨나 시카고 불스팀의 최근 성적 같은 것을 첫 화젯거리로 꺼냈다--"잠깐 들른" 진짜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요량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특이한 분은 날씨나 불스 같은 것들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것들은 그녀 자신이 처한 심각한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과 하등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배운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 한 분은 신학을 "질문을 던지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취지는 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어떠한 믿음도 전제하지 않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학이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신앙, 용감히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부터 자라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언제나 우리가 신학적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신학의 정의를 이렇게 내려볼 때 내 친구 제인이야말로 일류 신학자였다. 이것이 내가 그녀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과감히 질문을 던졌던 신앙인이었다. 나는 그녀처럼 그렇게, 깊이와 끈기와 열심을 담아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단순하고 단편적인 대답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해 있던 그 심각한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그녀와 내가 믿는--의 내용을 그토록 철저히 탐구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병실에 들어가면, 그녀는 간단하게 인사한 후 대뜸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요,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는 내게 그 구절을 읽어주었다. 어떤 때는 "지난주에 누군가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라며 들은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고는 또 이렇게 질문한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대화는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녀가 너무 피곤해 도저히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야 대화는 중단되었고, 그러면 나는 그녀와 함께 기도를 드린 후 병실을 나왔다.


질문: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대답: 나는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는--몸과 영혼,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신실하신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의 날 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죽음과의 직면은 우리 정신을 예리하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감히 질문하도록 한다. 또한 죽음 혹은 다른 모든 심각한 상황들과의 직면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장 중요한 이슈들과 접하게 만든다. 내가 믿기로는, 바로 이런 것들이 지난 세기 최고의 신학서들 몇 권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쓰여졌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처절한 상황에 처하거나 벼랑 끝으로 몰릴 때가 바로, 우리가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갈망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때 우리는 "지금 내게 또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대체 나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제인의 병실은 내게 신앙의 질문에 대한 나의 전통적 답변들 전체를 재검토할 필요를 느끼게 해준 여러 장소 가운데 하나였고, 가장 최근의 장소이기도 했다. 제인이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내게 신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신앙의 다소 거친 부분들을 다듬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제인은 그 삶의 마지막 일년 동안 나로 하여금 내 신앙의 몇몇 부분에 대해 놀랍고도 새로운 용어로 다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비록 서툴고 부족한 시도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그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늘 그녀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우리가 삶의 가장 힘겨운 도전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의 신앙 내용은 그 질문들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신앙에 대해 충분한 기본 지식을 갖추고 있기나 한 것일까?


20년 가까이 장로교 목사로 일해오고 있지만, 사실 나는 장로교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나는 강건하고 때로는 완고하기까지 한 신앙의 전통에서 성장했다. 그것에 대해 내가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그 전통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의 어린 시절의 신앙이 내게는 편협하고 완고한 것으로 비쳐질 때가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대답과는 상당히 다른 대답을 듣고는 매우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 수업 후 기숙사로 돌아가 혼자 있을 때면 나의 믿음 체계--내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믿음 체제--가 방금 전에 도전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신학교 수업 시간은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압박감과 긴장을 내게 가해왔다. 그 시간이 오면--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나는 어린 시절 내가 배웠던 신앙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씨름하곤 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이렇게 되뇌었다, "헤이, 도대체 네가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나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였다.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그때 내게는 이러한 본질적인 물음 앞에서 되돌아갈 수 있는 신앙의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때 내게는 기댈 수 있는 신앙의 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때 내 신앙에는 내용이 있었고, 그것이 힘겨운 기간 동안 내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내 신앙의 내용이 해가 바뀜에 따라, 그리고 나의 신학교 훈련 등을 통해 분명 담금질되고 제련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는 어렸을 적 받았던 신앙훈련이라는 좋은 원재료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요즘 사람들과는 달리 주일학교, 교리문답 수업, 기독교 학교를 통해서 나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에 대한 기본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볼 때 내게 드는 염려는 그들의 신앙에는 너무 내용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뭔가 가지고 씨름할 수 있는 원재료가 너무 없고, 힘겨운 과정 중에 기댈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요즘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어하면서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수년간에 걸쳐 나는, 죽어가는 교인들의 병상 옆에 오랫동안 있어 보았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러한 순간들은 나의 목회생활 가운데 최고의 시간에 속한다. 삶의 마지막 전환점을 맞고 있는 교인들 곁을 지키면서, 나는 스스로 복된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대화는, 결국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귀착되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듣는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지금까지 저는 죽으면 우리 존재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죽으면 그저 끝이라고 말이에요."
바로 얼마 전에도 나는 그런 대답을 듣고 순간적--그 반응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으로 의자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불쑥 소리쳤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무엇이죠? 대체 당신은 부활절 아침마다 교회에서 무슨 말을 들은 겁니까?"

그가 대답했다--그의 반응도 결코 잊지 못하리라--"글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말은 없었어요. 우리가 죽을 때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어요."
계속해서 우리는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될 매우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 집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20년간 부활절 아침마다 과연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잊고 지나치지는 않았던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희망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그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는가? 내가 한 말이 내 신앙의 전통과 일치하는 것인가?"

내가 느끼기로는, 오랫동안 교회의 일원이었으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관심은 오래된 교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지체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읽어본 연구보고서에 의하면--또 나의 목회 경험으로 비춰보아도 이는 분명한 사실인데--지난 세대 동안 교회는 이런 세태를 겪어왔다. 사람들은 아동기나 청소년 때 교회출석을 시작했다가 6학년이나 8학년 사이에서 교회출석을 그만둔다. 교회의 일원이기를 그만두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시간과 관심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다른 활동거리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이 결혼하고 보통 아이들이 생긴 다음에는 그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온다.

그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너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대개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6학년 정도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돌아온다. 성경 이야기에 대해 그저 약간 친숙한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결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6학년 정도의 교육 수준으로는 세상살이를 잘 할 수 없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6학년 수준의 내용에서 그쳐버린 신앙은 허약하고 빈약한 신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삶의 폭풍우와 직면했을 때 그다지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힘겨운 순간들을 맞았을 때 역시 기댈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내가 다음 장들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내 계획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 여부를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당위성을 수호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지만, 그것이 여기서 나의 목적은 아니다. 또한 내 계획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된 목적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왔던 바, 우리가 전해 받은 신앙 전통의 윤곽을 지극히 개론적인 정도에서 그리고 싶은 것뿐이다. 나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더 많은 독서와 더 많은 사색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종종 설교를 통해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당신에게 하고 싶다--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나의 영적 여행을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일 말이다.

용감히 질문을 던지는 신앙인--또는 신학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신앙인들이 믿어왔고 또 가르쳐온 내용들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회는 질문을 던져온 이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우리 앞서 신앙인들이 던져왔던 질문들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도달한 답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내면으로부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분을 찾으러 혹은 부르러 나갈 필요가 없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의 문만큼 가까이 계신다. 거기서 그분은 당신이 어서 그 문을 열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기를 당신보다 그분이 더 바라고 계신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설교들


이천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던졌던 그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우리는 "교리"(doctrines) 또는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그것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신앙인들이 함께 이룬 하나의 일치된 생각을 나타낸다. 교회의 교리들은 많은 경우 교리문답(catechisms), 신앙고백문(confessions), 그리고 신조(creed)라 불리는 문서에 담겨져 있다. 다음 장들에는 내가 설명하려는 교리의 예로써 이들 다양한 문서들 가운데서 뽑은 인용문들을 실어놓았다. 교리문답, 신앙고백문, 신조 등은 제각기 그 용도가 다르다. 그러나 보통 그것들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에서 읽은 것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보았던 것을 요약하려고 했던 하나의 시도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과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내용을 얻는 두 주요 원천이다.

내가 속한 신앙 전통이 무엇인지는--개혁신학 전통-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여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다. 그것은 내가 가장 익숙히 알고 있는 전통으로서, 나는 그것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향해 편향된 애정을 갖고 있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같은 이들로 인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교회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상당한 양의 신학이 신앙인들이 던졌던 질문들로 인해 그 기간 동안 쓰여졌다. 나는 이 전통에 감사해 마지않는 그 후예이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다른 신앙 전통에 속한 사람들도 여기서 그들이 가진 질문들을 다시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당신이 전에 들었던 사상과 진리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을 현재로 가져와서 그 사상과 진리들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것들이 우리의 생존 자체--우리의 '영적' 생존--를 위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 자체"라는 말이 아마도 조금은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목회 경험에 근거하여 갖게 된 생각이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듀크대학 교수이면서 그곳 채플 담당 목사이기도 한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얼마 전 자신의 친구인 스탠리 하우워바스(Stanley Hauerwas)와 함께「낯선 거주자」(Resident Aliens)라는 작은 책을 썼다. 그 책은 나와 내 주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 책에서 그는, "지난 수백 년 동안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책임'(burden of proof)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만 해도 신앙이 너무도 광범위하고 깊숙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자신들의 불신앙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변했으며 더욱이 그 변화가 우리 세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해야 할 책임 소재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목소리는 불신앙, 회의, 그리고 무관심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려면 당신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사람들에게 설명해야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으며 설령 믿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과 삼위일체와 같은 기본적인 교리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 오래 다닌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삼위일체"를 언급하며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라. 추측컨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해보라는 여러분의 요구에 난색을 표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신앙인들이 언제나 시작해왔던 곳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즉 우리 앞선 사람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우리 앞서 깊이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울 것을 제안하고 싶다.

존 칼빈은 그가 스물한 살 되던 1536년에 쓴 책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 혹은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것을 일컬어 "신성에 대한 의식" (awareness of divinity)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우리 각자 안에는 하나님의 작은 일부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 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요즘 그런 말을 자주 듣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도 또한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려보지도 못하겠다. 칼빈의 말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도록, 하나님을 향한 헌신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런 의식을 우리 안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신다는 것이 칼빈의 일관된 주장이었고, 나의 신앙 전통에 속한 사람들도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주도하신다고 주장해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각자 안에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 말의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 외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그분을 향한 갈망 혹은 굶주림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Leap Over a Wall, IVP)에서 "하나님을 향해 굶주려 있는 갈망은…인간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이는 성과 권력과 안정 그리고 명성을 향한 욕구를 전부 합쳐놓은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한 욕구이다"라고 말했다.

피터슨처럼 장로교 목사인 도날드 맥쿨라우(Donald McCullough)도 그의 책 「하찮아진 하나님」(The Trivialization of God, 기독교서회)에서 "인간은 본질상 예배하는 존재이다. 인간이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예배할 대상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수많은 거짓 신들을 예배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피터슨의 생각과 동일한 흥미로운 말이다.


우리는 당신의 거대한 창조세계의 한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그래도 우리는 당신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결코 쉼을 알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고백록


이런 고백은 나 자신의 경험과도 분명 잘 들어맞는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이 갈망과 굶주림에 반응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행위를 일삼는다. 나는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알코올 중독, 음식의 남용과 성의 탐닉, 부의 축재의 동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중독과 남용 및 탐닉 행위는 우리 안에 자리잡은 이 굶주림--신앙인들이 흔히 말하는 '영적인' 갈급--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험스러운 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음식과 성의 남용과 탐닉, 부의 축재가 잠시 동안은 그 목적을 성취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만족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전의 그 불만족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조지 윌(George Will)은 한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개인 숭배" 현상--추앙하고 예배하는 대상을 가지려는 인간의 자연적 욕구--에 대해 묘사한 바 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과 관련한 언급이었지만, 사실 그는 그보다 더 폭넓은 현상을 묘사했던 것이다. 윌에 따르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들의 삶에서 위대한 일을 성취했는가 아닌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 숭배의 욕구를 지닌 인간은 예배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늘 예배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종종 나는 사람들이 주일 아침예배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어떤 이들은 찬송을 부르고 공동 기도문을 읽고 하는 행위들이 자신들에게는 너무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 불스가 게임을 벌이는 유나이트 센터나, 혹은 비어즈 게임이 열리는 솔저 필드 같은 곳에 가보라.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광경을 보고 듣는다. 나 역시 그들과 더불어 고함을 지른다. 우리는 일어나라는 말에 함께 일어나고, 전광판 위에 나타나는 구호를 함께 외치면서 "게임이라는 이름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 큰 어른들이 말이다! 예배 행위에 완전히 몰입해서는 그들의 영웅들에게 충성을 외치는 것이다!

피터슨과 맥쿨라우의 말은 분명 옳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과 갈망이 있다. 인간에게는 예배하려는 열망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너무나 쉽게 우리 인간들은 예배의 대상으로 시시한 신들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신앙인들은, 어째서 인간들이 이렇게 시시한 신들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찾은 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창조된 본래 모습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해 있는 곤경의 상태다.

그러나 좋은 소식(good news)이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 에티오피아인이 나와 일면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으로의 '그의' 회심은 나의 회심과 유사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경험에 대한 모델 내지는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그 에티오피아인과 나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여러분도 기억하듯이 바울은 하늘로부터 눈부신 빛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삶은 변화되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었다. 이런 사건은 경험한 당사자에게야 물론 너무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경험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내게는 분명 그런 경험이 없었다. 고백하건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즉 '바울' 식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한때 마음이 괴로웠던 적도 있었다.

다른 방식이 있다.

그 에티오피아인은 구도자(seeker)였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그는 신학자였다. 질문을 던지는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삶의 어떤 시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다. 아니, 내가 더 옳게 여기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미 만나주신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했던 영적인 갈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먼길을 온 것이었다.

이야기의 서두를 보면, 그는 자신의 마차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그런 것처럼,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그는 도저히 그 본문을 이해할 수도, 그 뜻을 깨달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타이밍으로 빌립이 나타나서 그에게 묻는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마침 천만다행이라며 그가 대답한다. "아니오, 사실이지 난 모르겠오. 이리로 올라와서 나에게 설명 좀 해주시오." 물론 빌립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분명히 훌륭한 설명을 해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설명을 듣고서는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이렇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내가 당장 세례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준비되었소. 사실 나는 평생을 준비해왔소."

이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또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그가 신앙의 응답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는 다름아니라 비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간들이 각자 내면에서 느끼고 있는 바를 정직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많은 시시한 신들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 우리 속에 먼저 숨을 불어넣으신 그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었다.

우리는 여섯째 날 창조되었다. 동물이 창조된 날과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동물과 구별지어주는 것은 지식이나 도덕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이것, 곧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허기지고 불안하며 불만족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저 우리 주변의 시시한 신들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말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당신 안의 그 빈곳을 채우려 하는가?


더 깊은 공부와 생각을 위한 질문들

1. 예수님이 사역 중에 만났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말은 당신의 신앙을 어떻게 묘사해주는가?

2. 지금 당신은 당신 삶의 어떤 영역에서 질문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질문들 앞에 당신의 신앙은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가?

3. 당신의 삶을 이루는 관심사와 활동 리스트를 마음속으로 작성해보라. 그 가운데 어떤 것에서 당신은 '영적인' 갈망을 더 깊이 느끼는가?
하나님을 향한 갈증/ 들어가는 글
어디서 하나님을 발견할까/ 일반계시
성경은 무엇인가/ 특별계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삼위일체의 첫번째 분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1부 창조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2부 섭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삼위일체의 두번째 분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속죄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삼위일체의 세번째 분
성령이 하시는 일/ 교회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성화
은혜를 보여주는 시각교육/ 성례
세 분, 한 하나님/ 삼위일체
마지막에 있을 일들/ 종말론
육신이 된 말씀/ 성육신
눈에 띄는 책 |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더글라스 브라우어 지음, 이종태 옮김, 복있는사람 펴냄

기독교에는 전체적인 신앙의 뼈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본 교리들이 있다. 가령 하나님, 창조, 섭리, 예수, 속죄, 계시, 삼위일체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다. 하지만 일반 교인들로선 손쉽게 접근하기도 어렵고, 어떤 부분들은 이해하기도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글라스 브라우어 목사의 이 책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 책 표지에 부제로 달려있는 ‘삶과 만나는 즐거운 교리’란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다. 수필이나 교양서적을 읽듯 한장 한장 차분하게 읽어나가면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쉽고도 친절하게 조목조목 짚어준다.

더글라스 목사는 서문에서 ‘질문하는 신앙과 응답하는 삶’을 이야기 하는데, ‘신학이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신앙, 용감히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부터 자라 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언제나 우리가 그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란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국교회의 고질병인 ‘기복주의 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가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서이다.

저자 더글라스 목사는 칼빈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펜실베니아 뉴저지 일리노이 등에서 교회를 섬긴 장로교 목사다. 지금은 일리노이주 휘튼타운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담임목사로 여러 기독교 잡지들에 고정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 기독신문 / 2001. 05. 02 / 김지홍 기자


"더글라스 브라우어 목사의 사려 깊은 논리와 복음주의적 지성, 그의 따뜻한 목자적인 어조가 잘 조화된 이 책은, 신앙 내용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없거나 궁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쉽게 설명하면서 그것이 그들의 즐거움이 되도록 이끌어준다. 특별히 그룹 스터디를 위해 아주 유용한 책이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더글라스 브라우어
더글라스 브라우어(Douglas J. Brouwer) 칼빈신학교(B.A.)와 프린스턴신학교(M.Div., D.Min.)에서 공부하였다.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일리노이 등에서 교회를 섬긴 장로교 목사다. 지금은 일리노이 주에 위치한, 유서 깊은 청교도 신앙과 미국의 영적 각성운동, 북미 복음주의 신학의 중심지이자 그 전통이 살아 있는 휘튼(Wheaton) 타운의 제일 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현재 「리더십」(Leadership)을 비롯해 여러 기독교 잡지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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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삶과 만나는 즐거운 교리 :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저자더글라스 브라우어
출판사복있는 사람
크기신국판 (153×225)
쪽수228
제품구성상품설명 참조
출간일200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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