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목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의 의의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성령에 대한 구약과 중간기의 견해들을 간략하게 검토하며 시작한다. 이 첫 장에서 나는 그 시대들의 전환기에 성령이 주로 계시와 지혜와 영감을 받은 연설을 가능하게 하는 ‘예언의 영’으로 이해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슈바이처(Schweizer)와 멘지즈(Menzies) 등은 성령이 구원론적으로 필수적이지 않고 단지 어떤 종류의 봉사를 위해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나는 유대교에서조차도 ‘예언의 영’의 이 은사들(선물들)이 오로지 능력을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회복된 공동체의 ‘삶/생명’ 자체인 것으로, 그리고 그 공동체의 거룩함의 권능인 것으로 예견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제2-8장은 누가, 요한, 바울이 이 이해를 발전시켰으며,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예언의 영’에 대한 기독교화된 버전으로 보고 있다고 제시한다. 정확히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동시적으로, 구원받은 공동체의 ‘삶/생명’을 제공하고 봉사 및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제9-11장은 성령의 선물(주어짐)에 대한 현대 신학과 조직신학을 향해 나아가면서 신약 증거의 의의를 탐구한다. 제10장에서는 성령 받음에 대한 고전적인 오순절적 두 단계 견해가 좀더 광범위한 은사주의와 연결된 단일 단계의 회심–입회(one stage conversion-initiation)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제11장에서는 신약성경의 증거가 후일의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의 근거를 어느 정도로 예비하고 있는지 검토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증거’를 말함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붙어야 할 것이다. 지면의 제약상 신약성경의 성령론에 대한 세 주요 증인들(누가–행전, 요한, 바울)로 탐구가 제한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부는 세 가지 원형적인 ‘성령의 은사들’(예언, 방언, 치유) 및 신약 교회에서의 이 은사들과 다른 영적 은사들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검토로 시작한다(제12-15장). 그런 다음 [주로 워필드(Warfield)에게서 비롯된] 은사중지론에 대해서 논한다. 은사중지론은 이 은사들이 주로 신약성경의 책들을 쓰는 일에 필수적인 계시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신적 계시의 담지자들인 예수와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인증(attestation)으로서 주어졌다는 주장이다. 에드가(Edgar), 파넬(Farnell), 개핀(Gaffin), 마스터스(Masters) 등등의 추론은 신약성경 기자들이 사도들과 그 동역자들의 죽음과 함께 그러한 영적 은사들이 그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제16장에서 검토되고 있다. 거의 모든 신약학자들은 그러한 견해를 신기한 골동품처럼 취급해버리겠지만, 최소한 은사중지론은 흥미로운 형태로 그러한 영적인 은사들의 진정한 성격과 목적의 문제를 제기한다(비록 그 입장의 ‘대답’은 진지한 신약학계와 초기교회사학계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장들은 오순절 및 은사주의 갱신 운동들 가운데서 주장되고 있는 예언, 치유, 방언의 성격과 의의를, 같은 용어로 언급되고 있는 신약성경의 은사들과 연관하여 탐구한다. 이 책은 문제의 그 현상이 어느 정도로 그러한 운동들에만 독특한지,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을 받기 위해서 회심 이후 어떤 위기 체험(crisis experience, 결정적 체험)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점을 지지하는 어떠한 신학적 혹은 경험적 이유가 있는지 여부를 물음으로써 마친다.
_“서문” 중에서
누가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방언이 통역 없이 사용된다면 그것이 심판의 표적으로서 부정적인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만 말할 뿐, 방언의 긍정적인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상술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오히려 방언을(통역이 될 때), 구원의 하나님이 자신이 구속하고 사랑하는 백성을 만나주시고, 도전하시고, 위로하시고, 가르치시는 자기 계시의 표현으로서 예언과 동일한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통역이 된 방언은 하나님이 공동체 내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를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현존에 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구원이 임했다는 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한 소외의 역전인 셈이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방언을 개인 기도에서 사용하기 위한 은사로, 즉 영감 받은 카리스마적 찬양으로 이해했고, 그리고 (아마도)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탄식과 바람을 전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예를 들어) 정경의 완성 같은 것 때문에 방언의 기능 중 어떤 것도 폐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방언이 재빠르게 사라지거나 하나님이 파루시아 이전에 제거하실 것이라는 암시한 적도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16, 17장에서 보다 자세히 토론하기로 하자.
_제13장 “신약에 나타난 방언” 중에서
확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은 대표적인 은사들이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가 죄가 만연했다거나 메말라 있었다는 따위의 주장들을 은사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 유일한 신학적인 근거라고 내세운다면, 그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아마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것이다. 예언이 점차 주변으로 밀려난 것에 대해서 오니는, (i) 기독교의 교리, 전승, 규칙들이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지역의 교사들과 목회자들의 손에 의해서 그것들이 행사되었기 때문이며, (ii) 사회학적으로는 교회가 이전보다 훨씬 그 주변 환경과 통합되면서 천년왕국운동의 분파적 성격을 띠던 시절의 역동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존속해야 할 가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초기 오순절 운동에서 성령 세례의 증표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그리고 후대의 문화적이면서 실존적인 성격의 요인들 때문에 방언이 카리스마적인 집단 내에서 부각되기 전까지는 방언이 변두리로 밀려난 것은 당연했다. 몸의 치유는, 복음을 추상화하기 시작하면서(by platonizing), 곧 복음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쇠퇴하게 되었고, 교회의 인가(accreditation)라고 하는 전혀 다른 신학적 의미를 갖고 나서야 교회에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_제16장 “은사중지론과 신약의 입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