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역사의 예수는 끝없는 도전이다!
역사의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외치고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운동을 벌였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화의 전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끝없는 도전으로 나타난다.
(머리말 가운데서)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
역사의 예수는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와는 근본에서 다르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려고 싸우다가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역사의 예수는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종교이데올로기 쪽에서 하느님나라운동을 펼쳐나갔다. 정치 쪽에서는 로마제국과 그 대리통치자였던 헤로데 정권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는 민중해방운동을 펼쳤으며, 경제 쪽에서는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수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소유의 평등공동체를 확립하기 위해서 싸웠다. 종교 쪽에서는 민중이 종교지배이데올로기의 예속에서 벗어나 그 주체가 되도록 예루살렘성전 실세들에게 대들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예루살렘성전숙청사건’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민중봉기’와 같은 것으로, 체제를 뒤엎으려는 하나의 사회혁명운동이었다. 그것이 예수가 십자가형틀에서 살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역사의 예수는 그의 스승 요한 세례자와는 달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느님나라’가 그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그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민중에게 ‘참여의 결단’을 촉구했으며,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 항거의 방식은 ‘비폭력 저항’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필요할 적에는 물리적인 항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저항권’(생존권)이었다. 예수는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로 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된 상태(샬롬),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상태’라고 보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예수를 따르자”, “예수에게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가 지향한 인간화운동을 전거로 삼아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인간화운동’을 펼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한다. ‘예수의 인간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읽어내서, 그것을 우리의 인간화실현의 패러다임(전거)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를 본받아, 할 수 있는 대로 예수가 산 것처럼 우리도 살고, 예수가 외친 하느님나라를 우리도 선포하고, 예수가 펼친 하느님나라운동을 우리도 벌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를 박제화한 오늘의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에서 가능할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회가 진정으로 역사의 예수에게 돌아가 예수를 따르고 예수처럼 살려면, 아마도 자기해체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이천년 전의 예수를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한, 역사에 존재할 의의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역사의 예수도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역사의 예수의 재현은 역사의 불가역성으로 하여 불가능하다. 예수를 넘어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민중에게로, 다중에게로 가는 길밖에 없다. 오늘날엔 민중이, 다중이 새 역사를 열어가는 ‘추동자’이기 때문이다. 민중(다중)이 ‘오늘의 예수’이다. 5·18민주항쟁과 촛불놀이항쟁이 민중(다중)이 메시아임을 실증하지 않았는가? 오늘의 예수는 민중이고 다중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절실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인데, 역사의 예수를 전거로 삼아 그 일을 실현하자고 지은이는 말한다.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가 그러길 희망한다. 비록 “예수를 따르자”, “예수를 살리자”고 나선 열린 교회라 할지라도 역사의 예수가 벌인 하느님나라운동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새로운 교회개혁이나 사회변혁은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