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
“우리가 읽는 성서 본문이,
사실은 원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마5:8)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읽는 신약성서는 원문 그대로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원문은 없고 단지 2만 5,000여 개가 넘는 사본들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성서는 베껴 쓴 사본들이 전해 내려와 그것들을 토대로 원문에 가깝게 재구성한 것이다.
신약성서 사본들은 파피루스 사본에서 양피지 사본으로, 대문자 사본에서 소문자 사본으로, 또 두루마리에서 지금의 책 형태인 코덱스로 변화해왔다. 사본들은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도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으며, 사본을 해석하는 본문비평이 발달해 가면서 성서는 점점 더 고대의 원본문을 회복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신약성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신약성서 사본하과 본문비평에 대한 이야기들을 에피소드와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성서가 살아 있다.
>>책 소개
왜 사본에 대해 알아야 할까?
일반적으로 성서연구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먼저 본문을 깊이 읽고, 그 본문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그 본문의 의미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성서본문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의 과정, 사본과 인쇄본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즉 우리가 성서본문에서부터 성서연구를 시작했다면, 성서본문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이야기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간『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가 꼭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주후 50년 이후에 기록된 신약 사본들이 정리되고 모아져서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한 권으로 전달되기까지, 그 과정과 배경을 알게 되면, 우리는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본과 인쇄본 이야기
신간 『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성서가 어떻게 기록되었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전승되었으며, 오늘날 성서의 본문이 어떻게 재구성되어 있고,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사본의 현황이나 자료를 단순하고 지루하게 나열한 게 아니다. 다양한 사본 사진과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사본의 의미와 발전된 과정들을 쉽게 이해하도록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다. 사본들을 토대로 해서 ‘원문’을 재구성하려는 여러 시도에 관한 이야기도 아울러 말하고 있다. 또 이 책이 사본학과 본문비평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데도, 독자들은 친숙하고 편안하게 사본과 인쇄본에 얽힌 이야기들에 빠져들어 가게 될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될 이야기!!
이렇게 신약성서 사본과 인쇄본에 대한 이야기를 알면, 올바른 성서관聖書觀을 가지게 되고, 성서에 대해 몰라서 생기는 불필요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바이블 코드』나 『다빈치 코드』같은 책이 베스트셀러로 세상의 관심을 끈다 해도, 신약성서의 사본과 인쇄본 이야기를 알면,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올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
20세기 들어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구집 등이 무수히 발견되어,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신약성서 사본은 5,700개가 넘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수많은 사본들 가운데 어느 것 서로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차이는 성서를 베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이문”(異文)이라고 한다. 본문을 의도적으로 바꾼 ‘고의적인 변개’와 단순한 실수로 본분이 변경된 ‘우연한 변개’가 있는데, 성서에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이문들은 우연한 변개이고, 간혹 고의적인 변개로 보이는 이문도 있다.
성서의 본문이 바뀌는 예
예1) 마가복음 1장 2-3절을 보자.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새번역』)
이사야의 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밑줄 친 부분은 이사야서에는 없고 말라기 3장 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본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를 “예언서들에”로 고쳐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예2) 또 누가복음 24장 13절에는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삼십 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육십 스타디아’이다. 이것은 대략 10km 정도인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실제거리는 약 30km 정도이니, 그 지역을 잘 아는 필사자는 ‘육십 스타디아’를 분명한 ‘오기’로 보고 ‘육십 스타디아’ 앞에 ‘백’을 넣어서 ‘백육십 스타이아’로 고쳤다.
예3) 람다(Λ)를 두 번 쓴 것(ΛΛ)과 뮈(Μ)가 비슷하다. 이러한 비슷한 글자를 혼동함으로써 이문이 생기기도 한다. 로마서 6장 5절에서, ‘그러나’(avlla,)를 ‘동시에’(a[ma)로 잘못 읽어서 이문이 생긴 두 개의 대문자 사본이 있다.(F, G)
히브리 전통의 필사자들은 성서를 베낄 때, 틀린 것 같아도 ‘그대로’ 베껴야 했지만, 그리스-로마 세계의 필사자들은, ‘글자’를 옮기는 것보다 ‘내용’을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실수인 것 같거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4세기 이후부터 기독교 필사자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대본을 엄격하게 필사하였고 수도원에 필사실이 생기면서부터는 엄격한 통제 가운데 특정한 본문이 대량으로 필사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성서의 본문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서를 우상화하지 않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모습을 계시하고 있는 성서로서 성서를 바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