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은 사람으로, 전심전력을 기울여 진실하게 하나님과 국가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2. 자기 나라의 천직은 무엇인가? 3. 자기의 천직은 무엇인가? 첫째 문제는 주로 이론상의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 실제적인 효력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해 건전한 사상을 품고 있는 것과 품지 않는 데 따라서 그 사람 개인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만일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고작 50여 년 동안 이 꿈 같은 세상에 태어나 약간의 쾌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그 일생은 지극히 무가치한 것이 되고, 이를 완전히 쾌락을 얻기 위해 보내고 싶어하는 생각을 품는다는 것도,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믿는 것처럼, 조물주가 이 우주를 지으시고 그 안에 인류를 살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우리 인류의 무한한 향상에 있는 것이고, 50여 년 동안의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다가올 영원무궁한 생명으로 인도할 예비 기간이라고 볼 때에는, 우리의 일생의 방향도 그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어서, 이 목적에 어긋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속에 다짐하게 될 것이다.

[본문 355~358쪽 '무저항'중에서]
안팎에서 보는 관점의 차이
일본 국내에서는 내가 비전론을 주창한다고 해서 학자들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교역자들조차 나를 조롱하고, 비방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외국의 한 신문에서는 내가 쓴 영문으로 된 비전론을 읽고, 일본인의 도덕적 관념은 톨스토이 백작을 낳은 러시아인의 그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나로 인해 일본을 크게 칭찬하는 글을 보았다. 나는 물론 톨스토이 백작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하찮은 존재이며, 비전론에 있어서는 백작의 가장 말석(末席)의 제자지만, 그러나 많은 끊기 어려운 정실을 배제하고 이 주창을 폈더니 뜻밖에도 외국인이 이런 호평을 우리 나라에 해준 데 대해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어떤 것이 애국적 행위이고, 어떤 것이 비애국적 행위인지, 그것은 넓은 세계와 긴 장래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나는 다만 내가 진리라고 믿는 바를 주창하기만 하면 직접 간접으로 언젠가는 그 무엇을 우리 나라의 명예 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최근에 독일 스투트가르트 시(市)에서 발간된 우찌무라 선생의 영문 원저요, 독일 역(譯)인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는 유럽 대륙의 종교계에서 큰 호평을 받아, 초판 수천부가 금세 다팔려 다시 재판이 나왔는데, 이번에도 같은 환영을 계속 받고 있다. 그리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의 독자들로부터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 오고 있으며, 저자에게 공감을 표함과 동시에 또 이번 전쟁을 겪는 저자의 조국인 일본에 동정을 나타낸 사람도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어떤 종교 신문은 긴 평론을 게재하여, 저자의 교회론에는 반대를 표명하였으나, 그 신앙에 관해서는 대체로 공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본은 군사면에서 세계의 큰 세력일 뿐 아니라, 또한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도 큰 공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 대다수의 논지였다. 이 책이 이 때에, 그것도 러시아와 친근한 사이로 알려진 독일에서 발간되어, 다소나마 일본의 의사를 밝혀 주고 있는 것은, 나로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밖에는 해석할 도리가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는, 이로 인해 일본인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마디 이 말을 나의 동지들에게 알리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여러분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약간 자기 자랑이 지나친 느낌은 있지만 여기에 적어 둔다.
(1904년 8월 「성서지연구」)
비전주의자의 전사
세상은 우리 비전주의자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냉정해야 할 사상이 열정의 지배를 받아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리하여 제정된 법규에 따라 국민의 의무로서 우리에게도 병역이 부과되면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잘못된 형제 때문에 일어난 환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명령을 좇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비참한 형편에서 전쟁을 없애는 가장 온건하고 적절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비겁자로 낙인찍어, 우리가 비전론을 부르짖는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는 줄로 오해하고 우리가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일 병역을 거부하면 어떤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소집당해서, 결국 우리가 거절한 것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라도 자진해서 이 고역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은 선행으로써만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도 수많은 비전주의자의 무참한 전사로써만 없앨 수가 있는 것이다. 가전론자(可戰論者)의 전사는 전쟁 폐지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없는 이가, 그의 주장하는 자비심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세상은 수라장으로 화해서, 그도 역시 적개심이라고 하는 죄악의 희생물이 되어 적탄에 맞아 쓰러져, 싸움터에서 그의 평화적 일생을 마치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인류의 죄악의 일부분이 속함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종국의 세계 평화는 그만큼 이 세상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갈보리 산 십자가의 수난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세상에 만일 「전쟁의 아름다운 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값어치를 모르는 호전적인 맹장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존귀성과 평화의 즐거움을 충분히 알고 있는 평화주의자의 죽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애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는 이 나라 저 나라, 즉 어떤 특정한 나라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 그 자체의 희생이 되어, 자기 피로 인류의 죄악을 일부분이나마 속하기 위해서 그는 기꺼이,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려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입대하는 평화주의자는 죽기를 원하고 살기를 원치를 않는다. 그는 자기의 순사를 통해서 자기네 국민의 양심을 깨우치려 할 것이며, 동포의 손에 살육되어도 마음의 평안을 느낄 것이며, 죄에 빠진 인류에게 회개를 촉구할 것이다.
나가거라, 두 나라의 평화주의자여, 가서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하는 모험을 하여라. 가서 그대들이 미워하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쓰러지거라.
싸우더라도 적을 미워하진 말아라. 그대에게는 지금 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대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 하면서, 그대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죽음이 되기를 기원하여라. 사람들은 그대를 죽음으로 내러 몰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대를 고대하고 계시다. 거기서 적과 원수를 나누어라. 오직 죽는 순간까지 평화를 위한 기도를 그대 입에서 끊지 말아라.
러일전쟁이 터진 이래, 나는 오늘날까지 몇 번이고 이런 말로써 젊은 친구들의 입대를 환송하였다. 그리하면 그들은 이 말을 달게 받아들이면서 총을 어깨에 멜 뿐만 아니라,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화의 복음으로 준비된 것을 신발로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들고」(엡 6:14) 기꺼이 싸움터로 향하였다. 그런데 그후 그들이 전장에서 처신하던 이야기를 남몰래 들어보니, 용기에 있어서나 활동에 있어서나, 특히 부드러운 그들의 대화심(大和心, 일본 혼(魂) - 역자 주)에 있어서, 그들은 조금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벌써 적탄을 맞아 쓰러진 이도 있다. 어떤 이는 바다 밑의 해초로 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평화를 사랑하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마음을 깊은 인생 문제에 쏟다가, 소망과 평화의 감사 속에, 몸을 전쟁의 희생물로 바쳤다. 비전론자가 가장 좋은 군사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역설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뚜렷한 사실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신사(Christian Gentlemen)로 전장에서 쓰러짐으로써, 전쟁 폐지를 위한 큰 길을 터 주었다. 세계에 비전론이 실현될 것 같은 서광이 비치는 지금, 그 명예를 누릴 사람은 나처럼 집에서 펜을 드는 비전론자가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 피흘리며 전쟁의 희생 제물이 된 이런 비전주의자다. 영원한 영광이 그들 위에 있기를.
(1904년 10월 「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