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가치는 서화(書畵), 골동품의 가치와는 다르다. 그 속에 산 진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죄, 구원, 영생,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명백히 알려고 하면, 성서 이 외에는 간단명료한 해답을 주는 책이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가 위대하다고 하지만, 성서에는 멀리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성인, 인도의 성자도 존경할 만하지만, 성서에서 생명수가 곤곤히 솟아나는 데 비하면, 독에 담아 둔 물을 마시는 듯한 느낌이다. 성서는 영적 생명의 대원천이다. 그러므로 목마른 인류는 이것을 버리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연구할 것이지, 숭배할 것이 아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숭배하면 우상이 되어 해로운 것으로 된다. 연구함으로 그 진리를 나의 소유로 만들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의 연구는 도락이 아니다. 나와 사람이 사는 길이다. 이것을 게을리 할 때, 반드시 멸망은 오는 것이다.

[본문 204-209쪽 '성서'중에서...]
성서
로마서 연구의 방법
- 그 5장을 읽는다
과학에 법칙이 잇는 것처럼 종교에 교리가 있다. 법칙은 자연 관찰의 결과를 간명한 말로써 잘 나타낸 것이다. 교리는 심령 실험의 결과를 간결한 말로써 잘 표현한 것이다. 교리를 단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법칙을 학설과 혼동하는 따위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실험된 같은 사실을 간단하고도 명백한 언어로써 표현한 것, 이것을 과학에서는 법칙이라 하고, 종교에서는 교리라 하는 것이다.
또 법칙을 잘 하는 것은 과학을 연구하는 첩경인 것처럼, 교리를 잘 이해하는 것은 종교를 이해하는 편법이다. 이 법이야말로 연역법이기 때문에 배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뉴턴, 다윈의 관찰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또한 안셀름, 칼빈의 추리 탐구를 쌓지 않으면, 종교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선진의 연구한 결과를 이용하는 것은 후진된 자의 특권이다. 교리에 의하여 종교를 배우는 것은 이 특권을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본디 로마서는 난해의 책으로 알려져서, 그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조금 기독교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이 책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님을 알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인 것,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만 죄의 사면이 있는 것, 죄를 깨끗이 씻는 일, 그 심판을 마음에 두고, 이것을 읽으면, 로마서는 내 마음의 실험록이 되어, 우리는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는 놓지 않을 것이다. 요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실험하는 데 있다. 이른바 그리스도적 의식(크리스천 콘셔스니스)을 양성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의식으로써 이 책을 읽는 데 있다. 그러면 이 책은 일종의 영적 패사(稗史, 로만스)가 될 것이다. 어찌 반드시 주해서에만 의지할 필요가 있으랴.
(1902년 6월 『성서지연구』)
성서 연구법
우리가 오늘 채택할 성서 연구법은 자연 연구법이 아니면 안 된다. 이제는 우주만물이 다 이 방법에 의하여 연구되고 있는 때를 당하여, 성서만을, 신성불가침의 것이라 하여, 자유 연구의 범위 이 외에 둘 수는 없다. 성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책이라는 전제를 두고 연구할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책인지, 그것은 연구에 의하여 결정될 문제이다. 자유 연구의 결과로서, 그 하나님의 책인 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과거 5, 60년 간, 서양의 대학자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로서, 성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유일한 책이란 것이 점점 명백하게 되어 왔다.
참으로 성서는 자유 연구에 의하여 항상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있어서의 유럽의 종교개혁이란 것은, 참으로 그 시대의 성서 연구의 결과로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학의 부흥이 도화선이 되어, 성서의 자유 연구가 행해지고, 그 결과로서 비교적 순수한 복음이 유럽 사람들 가운데 부흥하여 마침내 세상을 뒤흔든 그 커다란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종교적 대혁명은 항상 경제적 대발전과 동반하여 왔다. 16세기의 종교 대혁명은 바스코 다 가마의 동양항로 발견,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이어 일어났다. 만일 그 시대에 이 정신적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완전히 경제적 동물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컬럼버스를 일으키신 하나님은 동시에 멜란히톤, 루터를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 아들들이 한편으로만 발전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신대륙을 더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새 복음을 주셨다. 16세기에 있어서 그러했으며, 또한 20세기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실로 경제 발전의 시대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에 있어서 그렇다. 인류는 이제 그 육체적 쾌락을 더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정신문제는 경제문제에 눌려, 문명이란 경제적 발전에 그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일 하나님이고, 사람이 만일 사랑이라면, 이 경제적 대발전에 정신적 대혁명이 따를 것이다. 나는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 또 하나님의 특성에 비추어 보아, 이 일이 있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신적 대혁명은 성서의 새로운 연구로써 세상에 임할 것이다. 과거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지금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순수한 형태로서 세상에 제공되는 때에 정신적 대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60년 간에 걸친 성서의 자유 연구가 장차 올이 대혁명의 준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세의 대 전쟁은 미서전쟁, 남아전쟁, 노일전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성서 연구에 있어서 몇 차례의 대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격전의 양상은 여순항 공격의 그것에 못지 않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과거 50년 동안, 성서는 참으로 논전의 수라장이었던 것을.
성서학상의 논전은 이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때에, 독일로부터 대발견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이델베르그대학의 젊은 교수인 다이스만 시는 이집트의 사막 속에 보존되었던 고대의 수지 속에서 성서 연구에 관한 가장 좋은 재료를 발견하여, 이로 말미암아 신약성서는 그 처음 이루어진 시대의 의미에 있어서 새로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부는 금광의 발굴, 새 영토의 개발로써 증대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이집트의 사막 속에 감추어진 수지로써 정신적 대혁명을 인류 가운데 일으키고 계신 것같이 보인다. 독일은 행복하다. 전후 두 차례의 정신적 대혁명을 세계에 제공하는 명예는 그 나라에 주어진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직접 성서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에 접할 것이다. 외국 선교사들에게서 그 말류를 길을 것이 아니다 누가 요도가와의 맑은 물을 길으려 할 때, 이것을 오오사까의 탁류에서 길을 사람이 있는가? 모름지기 비와 호수로 거슬러 올라가, 히라의 높은 봉우리에서 적설이 떨어져서 계류가 되어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서 길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 성서에서 길을 것이다. 자유 연구로써 이것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흘러서 다함이 없는 샘에서, 생명수를 마실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큰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큰 인물로써 시작되지 않는다. 루터가 세상의 이른바 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성서에 의하여 큰 인물이 된 것이다. 성서를 잘 앎으로써 우리들 누구나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큰 인물이 우리들 가운데서 태어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보잘것없는 인물을 큰 인물로 만드는 것이 단순한 복음의 특성이다. 성서는 우리들 각자의 손에 있지 않은가? 무엇을 고민하여 큰 인물의 출현을 부르짖는 것인가? 우리들 각자는 이 책을 읽고, 스스로 큰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06년 12월 『성서지연구』)
구식이냐, 신식이냐?
나의 성서 연구는 델리체, 고데 등을 본받는 것으로, 구식이다. 신식으로 고치라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 주의를 주는 것은 참으로 고맙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바꿀 수는 없다.
나 자신도 이른바 신식의 성서 연구를 전연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조그마한 서재에도 또한 독일의 폰 조덴, 영국의 캬논 드라이버, 미국의 조지 스티븐 등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 나도 또한 나로서는 과분한 돈과 시간을 이런 종류의 연구에 소비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사람의 영혼을 기를 만한 생명의 양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를 싫어하는 나이므로, 교회가 싫어하는 것인, 이른바 고등비평은 내가 환영해야 할 터인데도,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나는 교회와 태도를 같이하는 자이다. 이른바 신식의 성서 연구는 희망을 채워 주지 못하는 사막의 냇물이다.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한다(욥 6:15 이하). 이른바 신식의 성서 연구는 문법이고, 철학이고, 역사이다. 그러나 신앙이 아니다. 그들은 종교를 지식으로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를 완전히 그르치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신앙이다. 신앙을 근저로 하고 서지 않고는 종교는 알지 못한다. 종교의 책인 성서는 알지 못한다.
이 점에 있어서, 델리체와 고데는 신식의 성서학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골고다의 언덕 위에 심어진 십자가 밑에서 읽지 않으면, 이사야서 53장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 델리체는 확실히 이사야서 해석의 열쇠를 잡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욥의 환난을 그리스도의 환난의 상징으로 본 그는 욥기의 중심적 진리를 파악한 사람으로서, 그에게서 이 책의 대주석이 나온 것은 구태여 이상히 여길 것이 없는 일이다. 고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연구가 낡은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성서학자인 동시에 또 한 깊은 체험이 사람이었다. 그는 강당과 서재에서 성서를 배우기 전에, 깊이 친히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성서 연구는 모두가 다 살아있는 것이다. 우레데나 폰 조덴을 읽고, 나는 지식적으로 많이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 조금도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고데의 『로마서 주해』보다 나은 이 책의 주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영국 사람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산데, 헤드람 두 사람이 함께 지은 『로마서 주해』라 하더라도, 영적 생명의 공급자로서는 훨씬 고데(그는 스위스 사람이다)의 저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책인 성서는 신앙으로써 하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은 성서 연구의 첫째 요소이다. 그리고 깊은 신앙에 넓은 학문을 더한 델리체, 고데와 같은 성서학자는 세상에 좀체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을 사숙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의 학문이 구식이기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과 학문이 잘 배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바 신식의 성서학자 가운데 두 사람과 같이 균형이 잡힌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일 있다면, 보여 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서양 제국에 있어서도 신앙, 지식은 둘 다 한쪽 바퀴뿐이다. 지식이 없는 신앙, 신앙이 없는 지식, 종교계는 이 두 종류로 채워져 있다. 신앙은 무학을 자랑하고, 학문은 신앙을 비웃는다. 이리하여 종교계는 소경과 귀머거리의 집합이다. 이 때를 당하여, 난 델리체, 고데의 두 사람과 같은 조화된 학자, 균형 잡힌 신자의 출현을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구식도 좋고 신식도 좋지만 요는 신앙과 지식과의 조화이다. 깊이 믿고 널리 아는 것의 조화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정하신 시기에 이르러, 신식의 델리체와 신식의 고데를 속속 배출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중의 몇 사람은 우리 일본에서 나오기를 빌어 마지않는 것이다.
(1915년 10월 『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