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란 말은 소망이란 말과 동의어다. 능력 면에서는 전능하시고 지혜와 사랑의 면에서는 무한하신 실재자에게는 능치 못할 선한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에게 흔히 있는 「절망이란 상황」은 없다. 내가 인간과 세계를 둘러볼 때, 이른바 기독교국가와 교회를 둘러볼 때, 나는 실망에 사로잡혀서 아주 기분이 언짢다. 그러나 하나님을 쳐다볼 때, 소망이 내 안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앞으로 닥쳐올 큰 환난을 잉태하고 있는 검은 구름 저편에, 하나님의 보좌가 펼쳐져 있음을 벌써 본다. 그리고 거기서 천사들이, 인류가 품고 있는 모든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단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협의회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본다. 하나님은 나에게, 보이는 것을 따라 걸어가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걸어갈 것을 원하신다. 이는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면서 걸어가라는 교훈이다. 영광이 주님께 돌아가기를!

[본문 245-250쪽 '제2부 그리스도'중에서...]
제2부 그리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예수의 무능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 27:42)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목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29-32)
이것은 예수의 원수가 그를 향해서 던진 조롱의 말이다. 조롱의 말이지만 그러나 사실이다. 예수는 참으로 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그의 옷을 만진 것만으로도 나을 수 있었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한마디로 일으켰던 그(눅 8장), 가나안 여인의 애절한 청으로 그 딸을 고쳤던 그(마 15장), 다섯 개의 방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마 14장), 제자들이 바다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마디로 풍파를 그치게 했던 그(같은 장),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귀를 만져 그 상처를 고치신 그(눅 22장), 그밖에도 한없이 기적을 행했던 예수는 이제 십자가에 달리고 백성들의 조롱을 들으면서도 자기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성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를 조롱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예수는 여기에서 확실히 자기의 무능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예수의 원수들의 조롱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제자들의 의문이었다. 그는 왜 그 때에 그의 전능을 나타내서 자기를 구하시지 않았는가? 그에게 자기를 구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리라. 그러면 왜 그는 이 경우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을까? 그는 스승을 지키려고 그 원수 중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명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라고, 그러나 이 위급한 때에 천사는 그를 위하여 나타나서 그의 원수를 쫓아 버리고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해서 교회가 지금까지 대답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는 속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스스로를 구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의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성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는 그때 기적의 힘을 쓰지 않으셨던 것이다라고.
과연 그럴까? 예수는 과연 이 때에 자기에게 있는 능력을 일부러 사용하시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세상의 선인으로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해서 힘을 다하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는 아주 서툴고 자기 집의 일에는 극히 무능한 것을 보았다. 선인이 선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자기를 남을 위해 소모해 버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데 있다. 그러니 예수에게 있어서랴. 선인 중의 선인인 예수가 남을 구했으나 자기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아니다. 사랑의 화신이었던 그는, 남을 위해서 자기 능력을 다 써버리고, 스스로를 위해 남겨진 것이 없었다. 그가 전능인 것은 남을 구할 때 뿐이었다. 그가 자기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다고는 성서에 한 군데도 씌어 있지 않다. 그는 전혀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전혀 무능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 경우에서만이 아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는 자기를 이해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뜻 있는 사람과 같이 자기 가정의 생계조차 지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죽음에 임해서, 그의 어머니조차도 제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요 19:26-27). 그에게는 많은 육체의 형제가 있었으나, 그 중의 한 사람도 그가 생존시에 그를 구주로 보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남에게는 정성을 다했으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을 위해서는 극히 냉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고향 사람과 형제는 그에게 몇 번인가 말했으리라.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눅 4:23)
그러나 이렇게 예수를 문책했던 그의 고향 사람과 가족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힘을 다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은 희생이다. 자기와 먼 사람에게는 두텁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엷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한 것이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영어의 Love가 Leave(떠나다, 버리다)인 것은 이미 내가 주장한 바다(『구안록』참조). 보통 남녀의 사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은 이런 성질을 띤다. 어버이는 자식의 병을 간호할 때 자기 자신을 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랴.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에 틀림없다(빌 2:7). 신학자의 소위 그리스도의 Kenosis(겸허)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Kenosis는 단순히 영광의 겸허에 그치지 않는다. 능력의 겸허도 포함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남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영광을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양을 취하셨다는 것은 그는 자기에 관해서는 무능 무자격의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구하고, 자기를 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인 확실한 증거이다. 그에게 만일 이것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했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남에 대해서는 전능, 자신에 대해서는 무능, 아아 귀하신 예수여,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참으로 사랑의 화신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당신의 원수는 당신을 비웃어, 당신에 관한 최대의 찬미를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사람들은 구하지만 자기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구세주로 바라봅니다. 당신은 참으로 한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이렇게 자기에 대해서는 무능했다. 그러면 그의 신자라고 칭하고, 땅 위에서의 그의 대표자라고 칭하는 교회는 어떤가? 아아, 그들은 예수와 반대로 얼마나 자기를 구하는 데는 열심이고, 남을 구하는 데는 냉담한지, 자기 일이라면 열성이 치솟아서 지혜가 금방 생기는 데 반하여, 남의 일이라면 얼마나 냉담하고 우둔한지. 그들은 열심이라면 자기의 교회 일인 줄 알고, 지혜라면 자기 이익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단방법은 모두 자기 확장을 위해서만 강구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자기 처세가 능란하지 못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고, 남을 넘어뜨리고 자기와 자기의 당파를 일으키는 자를 불러 똑똑하다고 칭하고, 재사다 인물이다 하며 존경한다. 그들의 예수와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예수가 만일 그들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그들은 바리새인이나 학자들과 화합하여, 그를 욕하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할 것이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하고...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29-31)
라고. 그러니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려고 원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서 더욱더 남의 일에는 지혜롭고, 자기 일에 관해서는 지혜롭지 못하며, 남의 일에 관해서는 열성이 넘치고, 자기 일에 관해서는 심히 냉담하여 즉 남을 구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언(咐言)
나는 이 설에 대하여 성서에 반대 증거가 없지는 않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라고. 이것으로 보면 예수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자기 자신을 구할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또 앞에서 인용했던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이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4)
라고 하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예수는 성서가 말한 것처럼 자기 몸이 인류의 속죄물로 되기 위해서 자기를 구할 능력이 잇는데도 고의적으로 자기를 원수에게 넘기신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반대의 증거를 들 수 있으리라.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복음서는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발라서 30년, 늦어서는 70년 후에 씌어진 것이므로, 그 속에 당신의 교회의 신앙을 써넣은 곳이 많이 있다. 복음서는 예수의 언행록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신학서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서 기술할 때, 모르는 사이에 당시 신자들의 신앙을 기술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 그 자체를 대속적으로 보게 된 것은, 어쩌면 예수 자신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유대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당신의 신자의 신앙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른다.
2. 그러나 혹시 이 말들이 예수의 입에서 나왔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에 대한 예수의 무지를 부정하기에는 부족하다. 능력에는 역학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이 있다. 예수에게 능력이 없어서 이것을 나타내지 않았는지, 혹은 능력은 있었으나 사랑 때문에 나타내시지 않았는지는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 다만 그가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예수처럼 사랑을 생명으로 삼는 자(윤리적 실재자)에게 있어서는 사랑 때문에 나타내지 않는 것은, 나타낼 능력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남에 대해서는 강하게 만들고, 자기에 대해서는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지배하면 능력은 남을 대할 때에 증진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감쇠된다. 그러므로 예수와 같이 사랑의 화신인 경우에는, 자기를 대할 때는 능력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았음에 틀림없다. 그에게는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 때문에 이것을 버렸다. 그는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능해졌다. 그리고 무능했었다고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의식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내가 취해야 할 안전한 방법은, 성서의 이 말 저 말에 의하지 않고 그의 생애의 전체의 방침에 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도록 만들어진 우리들 인류의 의식으로 한다면 나의 그리스도관은 대체로 오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독자들의 참고를 위하여 이 말을 덧붙인다.
(1911년 12월 『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