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을 거니는 사람들, 자연에서 걷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길을 나서도록 충동하는 것일까? 단지 몸을 움직이려는 욕구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일까? 책상 앞에 앉아 꼼짝없이 일만 하는 삶에 건강하게 균형을 맞추려는 반동일까? 아마도 모든 게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걷기에는 영적이며 신앙적인 측면이 있다.
이 책은 ‘걷기의 신학’을 소개하며 이제 막 길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이미 집을 떠나 길 위에 있는 사람에게 걷기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줄 것이다. 인간은 길을 걸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의 사명을 수행하고 수련한다. 걷기는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걷기의 신학은 ‘인간이 길을 걸으며 행하는 바’를, ‘인간이 언제나 길 위에 있음’을 더 의식적으로 체험하게 할 것이다.
걷기는 묵상의 궁극적 형태다튼튼한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배낭을 둘러멘 사람들을 이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연 속을 거니는 사람들, 자연에서 걷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길을 나서도록 충동하는 것일까? 단지 몸을 움직이려는 욕구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일까? 책상 앞에 앉아 꼼짝없이 일만 하는 삶에 건강하게 균형을 맞추려는 반동일까? 아마도 모든 게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걷기에는 영적이며 신앙적인 측면이 있다.
여행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면, 자연 속을 거니는 것은 길 위에 머물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산과 들을 거닐며 직접 몸으로 겪는 ‘길 위에 있음’에 매료된다. 사람들은 거기서 삶의 은유를 본다. 한 걸음 한 걸음 저마다의 길을 가며 저마다의 짐을 진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있다. 앞으로 곧게 뻗은 길과 저 멀리 돌아가는 길이 있다. 한참 헤매는 길도 목마른 길도 있다. 사람들은 서로 함께 걷고, 서로를 향해 걷는다. 삶은 곧 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야고보의 길에는 삶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 들고 있는데, 그중에는 청년들만 아니라 중년들, 곧 삶의 위기에 처해 길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내적 변화를 기대한다.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강렬한 만남을 고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조금이나마 따르려 하고, 책이나 강론보다 걷기를 통해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체험한다.
이 책에서 저자 안셀름 그륀은 길을 걷는다는 것을 영적이며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 수도 전통과 성경 본문에 물음을 던진다. 고대와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은 자신을 길을 걷는 자, 곧 이 세상의 순례자, 방랑자로 이해했고, 집을 떠나 길 위에서 낯선 곳을 떠도는 자, 곧 이방인으로 생각했다. 이천 년 전 예수는 삼 년 동안 거처 없이 팔레스티나를 떠돌았던 방랑 설교자였다. 예수의 삶은 길, 십자가를 넘어 부활에 이르는 길이었다.
걷기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몸으로 묵상하는 한 방식이며, 또한 아브라함 이래 본질적으로 길의 구조를 가진 그리스도교 믿음의 수련이다. 걷기는 묵상의 궁극적 형태에 속한다. 걷기는 몸 안에서 하는 묵상, 몸으로써 하는 묵상이다. 성경은 믿음을 ‘길을 떠나다’, ‘순례하다’, ‘길 위에 있다’ 같은 개념들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찰만이 아닌, 직접 길을 나서는 체험을 통해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책은 ‘걷기의 신학’을 소개하며 이제 막 길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이미 집을 떠나 길 위에 있는 사람에게 걷기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한다”(루카 13,33). 인간은 길을 걸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의 사명을 수행하고 수련한다. 걷기는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걷기의 신학은 ‘인간이 길을 걸으며 행하는 바’를, ‘인간이 언제나 길 위에 있음’을 더 의식적으로 체험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