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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시편은 우리 영혼의 책입니다.
그냥 읽고 넘어갈 책이 아니라 밤낮으로 묵상할 책입니다.
묵상할 책만이 아니라 노래할 책입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러 사람이 합창으로 부르고 또 아름다운 곡조를 붙여서 부를 노래입니다.
광막한 광야, 외로운 길손으로도 부르고 외로운 감방에 앉아 나와 하나님과 세상과 역사를 생각하면서 부를 노래입니다.
북을 치며 부르고 나팔소리 울리며 부르고 통기타를 치고 부를 노래입니다.
울면서도 부를 노래요, 땀을 흘리면서도 부를 노래입니다.
승리의 순간이나 실패의 순간에도 부를 노래입니다. 억울해도 부르고 천대를 받고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아도,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아도 부를 노래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위기에서도 부를 노래요, 죽음을 눈 앞에 보고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은 시편을 “우리 영혼의 해부학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우심, 만물에 가득찬 그의 영광, 인간 역사를 인도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권위와 지혜를 노래한 책입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시는 하나님, 절망의 자리에서도 소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나님, 나 대신 싸워주시는 하나님,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책입니다.
이 시편 한 편 한 편을 읽고 명상하는 일은 내 신앙을 북돋우는 일만이 아니라 내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스스로 가지는 것이라 생각되어 평소에 읽고 느낀 것을 여기 조그만 책으로 펴냅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 한국 교회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독수리처럼 기운찬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편143:6).
[시편 명상 개정판을 내면서]김영호 목사
(역사 신학 교수, 미주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1982년 설립)
만수 김정준 목사님 탄신 111주년, 서거 44주년을 맞이하면서 그의 시편 명상 개정판을 출간하게 됨을 감사하며 또한 후학 제자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시편 명상은 만수 김정준의 평생 과업이며 그 결산의 마지막 유작입니다.
30대 촉망받는 젊은 목회자 만수에게 찾아온 폐결핵 말기의 무거운 질병은 그를 결국은 죽음 대기소 마산 국립수용소로 강제 입원하게 했습니다. 더이상의 그 어떤 치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놀라운 역설의 섭리적 손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계선교의 과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라비아 광야 3년의 연단이 요구되었던 것처럼 만수의 신학과 목회를 위해서는 특별한 연단과 신학적 천착의 과제 정립이 요구되었습니다.
만수는 마산요양소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조차 거부하던 죽음 직전의 환우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부터 시작하여 그들을 신자로 하는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수십 명의 장례식을 집례하기도 했습니다. 그 강단의 최고 교재는 시편이었습니다. 만수는 시편 말씀에서 기도를 배웠고 시편의 찬양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시편 말씀으로 명상하여 그 영혼들을 섬겼습니다.
3년의 시간 동안 만수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고 시편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시편 전권을 암송하는 은혜의 경지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강단과 교단을 떠나 은퇴 시기에 〈시편명상〉을 집필하여 인생의 결산, 신학의 마지막 유업을 이루었고 한국교회를 위한 영적 자산을 남기었습니다. 시편명상은 그의 서재와 기도실에서 시작하여 평생 그의 가슴의 열정과 삶의 현장에서 다듬어져 마침내 생의 노래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이번에 편집자는 시편 명상 개정판을 정독하면서 얻은 몇 가지 교훈과 감동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만수 김정준의 경건과 신학은 한국교회의 결산이며 열매라는 것입니다.
숭실학교 재학 중에 학비가 없어서 어느 날 고당 조만식 장로님을 찾아가 취직 부탁을 하였습니다. 고당은 선뜻 당신의 자제를 위한 입주 가정교사로 만수를 채용했습니다. 고당의 자제는 공부를 잘 하여 굳이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만수는 고당과 한 집에 살면서 고당의 인품과 넉넉한 사랑을 배웠음은 물론입니다.
훗날 캐나다 유학에서 박사 과정을 계속 하려했으나 후원자 캐나다측의 반대로 조기 귀국을 하였습니다. 몇 년후 함태영 부통령 은퇴 기념 세계일주 수행원으로 수고하였을 때 사례비로 받은 1천불을 종자돈으로 마침내 영국 에딘버러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사랑과 인품의 덕분에 만수의 신학과 경건이 열매맺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시편명상에는 한국교회 연합의 과제와 방향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만수는 평양 숭실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캐나다에서 신학을 연마하였습니다. 영국 에딘버러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수는 서구신학의 추종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한국교회의 경건과 학문의 전통을 세워갔습니다. 에딘버러 유학 중에 빈 강의실을 찾아 홀로 새벽기도를 하였는데 그 모습에 놀란 학교 직원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또한 연신 연합신학원장 중에 고신 출신의 제자에게 출신 교단의 안수를 권면한 것에서 좌우를 아우르며 통합과 조화를 모색한 지도자였습니다.
셋째 시편명상에는 한국교회를 향한 미래의 과제도 있습니다.
“의자를 치워라”(95편 강해)에서는 서구신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의 경건이 약화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출하면서 교회의 의자를 치우고 차라리 무릎을 꿇으라고 합니다. 마지막 150편 강해에서는 “찬송따라 삼천리”라는 우리 민족의 복된 미래를 위한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만수의 경건과 민족 사랑은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9장)” 찬송가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의 유작 찬송 가사는 몇 년 전 토론토 박재훈 목사님의 작곡으로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아무쪼록 시편명상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한국교회에 주어진 미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서 동반자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24년 추수감사절을 바라보면서
[만수 김정준 전집(晩穗 金正俊 全集)을 내면서]안 병 무
(한국 신학 연구소장)
세계의 학계는 사계(斯界)에 공헌한 학자들의 전집(全集)을 간행함으로써 후학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한 인물(人物)의 사상과 학문을 깊이 연구하게 한다. 이로써 학사(學史)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학문의 전통(傳統)을 튼튼히 세워 나간다.
가톨릭 2백년, 개신교 1백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신학계에는 아쉽게도 그런 풍토가 없다. 선진(先進)의 저작들이 전집으로 나온 것은 불과 몇이 되지 않는다.
본연구소는 일찍부터 만수 김정준의 저작집(著作集) 간행을 염원해 왔으면서도 그것을 우리가 내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여 왔다. 까닭은 김정준 박사와 더 깊은 인연이 있는 기관들이 우리 말고도 여럿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중 어느 기관이 수년 전부터 그 출판을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연구소는 출판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오늘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만수 김정준 전집을 펴내기로 결정했다.
만수 김정준은 우리 나라 구약학계의 원로(元老)일뿐 아니라 우리 신학계(神學界)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그는 어떤 교파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교계에서 교파나 신학경향을 넘어서서 존중되어 온 인물(人物)이다. 그의 저작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있는 학자이면서도 넓게 세상문제에 관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약에 관한 그의 연구는 계속 진전되어 현대구약학의 첨단에까지 육박하였다. 그는 과거의 것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수를 오늘에 살리고자 했고, 늘 새 것에 접촉하면서도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온건한 지성을 지닌 분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경건을 내세워 젊은 교수들에게서 진부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평가를 단숨에 뒤엎는 너무도 새 것, 참신하고 기발한 글을 세상에 내놓아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구약만에 치중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학자이기 이전에 '삶'그 자체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 그는 〈관(棺)에서 나온 사나이〉라고 불릴 정도로 생사(生死)의 경계를 몇 차례나 넘나들었고, 그러는 동안 ‘생’(生)에 대한 처절한 체험과 심오한 사색을 했기에 그 누구보다도 ‘삶’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글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든지 『삶에 이르는 병』 등의 투병기를 위시해서 그의 수상문은 번뜩이는 기지와 재치, 인생에 대한 깊은 명상을 기록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는 일생(一生)을 병마와 싸웠다. 젊은 날에 사경을 헤매는 폐병으로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해 유발되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그에게는 〈질고(疾苦)〉와 〈신학(神學)하는 일〉이 언제나 둘이 아닌 하나였다. 그러기에 그는 성서 중에서도 시편을 그토록 애송하고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질병만을 앓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병에 대해 열화처럼 분노했고 또한 그 병을 함께 앓았다. 그런 분노와 아픔이 아모스서 연구를 낳게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예언자들을 깊이 흠모하여 그들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가 〈예언자들을 연구했다〉라기보다는 〈그들을 살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행동에서 에스겔을 연상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에스겔은 예언을 말 대신 판토마임으로 한 기인(奇人)으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포위된 예루살렘을 그려 거리에 세워 경고하기도 하고 머리털을 예리한 칼로 깎아 1/3은 불에 태우고 1/3은 난도질 하고 1/3은 바람에 날려 보내면서 이 민족이 본토(本土)에서 짤려 사방으로 흩어져서 수난을 당할 것을 예고하는 등 많은 얘기를 남겨 놓았다.
6·25 직후든가? 그는 난데 없이 〈서울은 시온인가?>라는 글을 써내서 이미 오늘 같이 된 서울을 예고했다. 한때 그가 봉직하던 한신대학이 외부적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불신(不信) 풍조가 만연했다. 작은 공동체가 깨지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 감도는 어느 날 예배시간에 그는 강단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의자에 가서 앉는 것도 아니고 강대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 새로 만든 교기(校旗)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무엇인가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그것은 예리한 면도날이었다. 그는 교기를 펴들고 한가운데를 마치 집도하는 외과(外科) 의사처럼 쭉 잘랐다. 보는 사람들은 초긴장해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공동체는 이처럼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함께 치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치유될 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씩 여기 있는 이 바늘과 실로 한 코씩 기워서 비록 흠이 났으나 함께 원상복귀의 작업을 하십시다.”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은 모두 부동자세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명분없이 학생 몇 명을 제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 교수들은 매일 같이 모여 우울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얘기해 봐도 공론(空論)밖에 될게 없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는 어느 날 그가 낙엽이 가득 붙은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큰 돌 같은 것을 들고 분노에 찬 몸가짐으로 그것을 내던지려는 자세다. 그는 정의를 배반하는 세상에 진노한 하나님의 사자가 이제 큰 돌을 들어 박살을 내려는 어떤 예언자를 만든 것이다. 바로 그게 그때 그의 마음이자 그의 예언이기도 했다. 그때 그가 미소를 먹음었는지 분노에 찬 얼굴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의 이 장난기 섞인 행동은 보는 사람들에게 주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었다.
또 한 번은 위와 비슷한 상황에서 고민하는 교수들이 힘없는 자신들에 대한 자학, 참회 또는 분노들을 발산할 길을 찾다가 모두 삭발을 하도록 마음을 모았다. 그런데 걱정은 학장인 만수였다. 그가 이에 응할런지? 하여간 이발사를 불러왔다. 그랬는데 그가 먼저 덥석 의자에 앉더니 〈나부터 깎아주시오〉 하지 않는가. 그는 이미 백발이어서 염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발기가 머리 가운데를 밀고 지나가니 하얀 〈도랑〉이 나고 그 〈귀중한 머리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래서 그와 온 교수가 순식간에 불승(佛僧)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분은 교수들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쓸어모으더니 그것을 정갈한 종이에 채곡채곡 쌌다. 그는 그것을 학교 전통의 증거물로 오래오래 보존하자고 했다. 그 머리카락이 오늘 어디 있는지 모르나 이것이 한국의 〈에스겔〉 만수의 또 하나의 편모다.
그가 신학하는 데 기준을 둔 것은 G. Von Rad다. 폰 라트는 전형적인 신사로서 그 문장이 다듬어졌으며 그는 학문을 하는 한편으로 바이올린을 계속했다고 한다. 예술성과 학문이 교합한 셈이다. 만수가 폰 라트를 좋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하기야 폰 라트의 구약신학을 깨끗하게 집성한 대가였으니까!
그의 학문은 그의 설교와 같은 관계에 있다. 이 말은 그의 학문이 교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또한 우리 시대에 대한 증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의 설교 중에 〈월요일의 하나님〉이 있다. 이런 제목은 그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요일에만 치중하고 일상생활은 〈무신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면서 또한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주일예배에만 치중해서 〈모이는 교회〉로 정착해가는 교회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다.
이 전집(全集)에 수록된 글들은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수집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만수의 부인 주재숙 장로가 온 정성을 모아 우리를 도와주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 연구소의 경제사정으로 전집을 한꺼번에 다 펴내지 못하고 몇 번으로 나누어 내는 것이다. 독자들의 호응에 따라서는 더 빨리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지원 있기를 바란다.
이 전집(全集)이 한국교계에 널리 읽혀져서 신학을 심화하고 교파 사이의 담을 낮추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