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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0 → 3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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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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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성경적이고 역사적이며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섞이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으며 왜곡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성경과 전통에 기초한 삼위일체 신학으로 회귀하라
“오늘날 새로운 것인 양 내놓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수 세기 전에 진짜 신학자들이 검토해서 폐기한 것들이다.”
C. S. 루이스(C. S. Lewis)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아주 친밀하고 엄청나게 오래된 것 대신에 엄청나게 새로운 것을 약속했다. 옛 신경들과 영감 받은 본문들의 무거운 사슬에서 해방된 삼위일체, 사회의 변하는 기류와 변덕에 맞춤한 삼위일체 말이다. 마침내 우리의 입맛에 맞는 사회적 의제를 따를 때까지 빚고 심지어 조작할 수 있는 삼위일체 말이다. 학생 시절, 나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의심하라고 거듭거듭 가르침을 받았다. 성경의 이름으로, 교회가 거의 2천 년간 신뢰해 온 기독교 신앙의 신경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경주의의 이름으로, 시간의 테스트를 통과한 단순성과 영원한 출생 같은 교리들을 혹평했다. “모두 사변(思辨)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멸이었다. 그러나 내가 성경 강의를 시작했을 때, 학생들에게 신경들을 읽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을 때, 성경에 대한 교부들의 통찰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다. 내가 배운 삼위일체, 내가 순전히 성경적이라고 들었던 삼위일체, 모든 사람이 빠진 삼위일체, 그 삼위일체는 현대적인 만큼 기발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정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교회가 수 세기 전에 신학자들이 폐기한 이런 거짓 진리들을 계속 내놓을지 아니면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회복할지 결정하는 일은 이제 당신에게 달렸다.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려면, 고인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친밀하고 엄청나게 오래된 것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단순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섞이지 않은 삼위일체를, 오염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조작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본문 중에서
만물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창조와 섭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사역, 교회와 성례, 구원과 종말에 관한 교리의 의미와 중요성이 삼위일체 교리에 달렸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삶의 기초다. 삼위일체 교리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끊임없는 의심과 오해와 이탈을 겪으며 갈 길을 잃고 표류해 왔다. 이 오래된 기독교 신앙, 곧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심을 믿는 신앙은 거부되거나 숱한 방식으로 오용되어 왔으며, 그렇게 재해석되고 재정의되는 동안 영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활용되기 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삼위일체, 우리의 사회적 의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된 삼위일체에서 벗어나 성경이 계시하고 기독교 교부들이 고백하고 목숨 걸고 지켜 낸 진정한 삼위일체, 시간의 검증을 거쳐 전통으로 자리 잡고 성경적 신앙의 기초를 이룬 정통 삼위일체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교부들과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 그리고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의 논리에 의거해 비정통으로 기운 삼위일체의 표류 역사를 논박하고 성경 해석과 교회사와 조직신학의 방패로 참된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단순성을 재발견하게 하는 이 걸작을 통해 더 견고한 기초 위에 신앙을 세우고 그 자체로 목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와 충만한 기쁨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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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0 → 11,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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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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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복음주의’를 이처럼 명확하고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정의한 책이 있었던가.”- 박영돈, 한병수, 마크 데버 추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복음주의’ 핵심 교리를 다룬 이 책은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읽어야 할 필독서다!”이 책은 복음의 사람이 되는 일에 관한 책이다. 달리 말해 이 책은 복음주의자란 무슨 뜻인지를 다루는 책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제 ‘복음주의자’가 누구인지는 복음 바깥의 문화적, 정치적인 성향에 의해 규정된다. 20세기에 상당히 큰 인기를 얻은 복음주의 운동은 이제 신학적으로 점점 더 공허한 것이 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온갖 집단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정작 그 운동의 고전적인 신념은 고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복음주의자가 되는 일의 중요성과 유익에 관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주의자란 그 정의상 어떤 인종이나 정치 분파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복음은 성경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적 복음, 곧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복된 소식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의 기독교다. “우리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된 교리들을 다시금 확증하고 있을 뿐이다”(마르틴 루터). 복음의 사람들은 모두 ‘복음주의자’이며, 이와 반대로 언론 매체에 복음주의자라고 소개된다 하더라도 복음을 진지하게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복음주의자들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불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삶에 있다.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며, 각 시대의 다양한 도전 가운데 인간의 전통보다 오직 복음에 충실하는 사람이다. 신자들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도를 위해 어깨를 맞대고 분투하는 곳마다 복음주의는 더욱 굳센 모습으로 일어설 것이다. 복음의 백성들이 진실하게 복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곳마다 복음주의는 더욱 번성할 것이다.
특징-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복음주의’의 핵심 교리를 다룬다.
- 정치, 경제 등의 갈등에 의해 분열된 교회들로 하여금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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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0 → 2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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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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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르겐 몰트만 탄생 80주년에 즈음하여 신학자 18명이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한 기념 논문집이다. 저자들은 삼위일체가 관념상의 교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치, 우정, 젠더, 생태,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함의를 지닌다는 점을 역설한다.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의 여러 측면에 지닐 수 있는 함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출판사 서평] 그리스도인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삼위일체)을 믿는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초창기부터 신학의 중요한 주제였는바, 특히 20세기 중후반 이후로 삼위일체신학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적 공헌이 아주 컸다. 그래서 몰트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미국과 독일에서 그의 삼위일체신학을 성찰하거나 비평하며 또한 그의 논의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작업들이 출판되었다. 이 작업은 미국에서는 예일대학교의 미로슬라브 볼프가 주도하였으며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미하엘 벨커가 주도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몰트만의 제자다.
볼프 교수의 주도로 미국에서 출판된 본서에서는 볼프를 포함하여 학자 18명이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인간(1부), 종교전통(2부), 신론(3부), 역사신학(4부)을 다룬다. 이를 통해 삼위일체신학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심오하게 인간 및 세계와 관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부에서는 삼위일체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베풂의 삶, 재산의 문제, 생명 경외, 우정, 성서 지혜문학에 기반한 신학적 인간 이해,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통한 창조세계 이해를 다룬다. 2부에서는 삼위일체신학의 관점에서 교회론, 성령론, 종교 다원성 상황에서의 기독교 종교 신학 및 십자가 신학을 논의한다. 3부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젠더 이슈, 완전한 생명(삶), 섭리, 성령 기독론, 정의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4부에서는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몇몇 이해들과 몰트만의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성을 종말론과 기독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믿음과 예배의 관점에서 탐구한다.
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현대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이 단지 하나의 교리 또는 하나의 신학적 주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이 새롭게 다루어지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에 몰트만의 신학적 기여가 아주 큰 기초와 토대를 제공하였는데, 이러한 점을 본서의 글들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다만, 본서에 기고한 학자 18명이 하나의 동일한 입장이 아니라 여러 다른 입장들을 지니고 있기에 광범위하고 방대한 다양성을 맛볼 수는 있으나 본서 전체로서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성을 지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독자들은 본서에 정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서를 기반으로 역동적으로 발돋움하여 각각 자신의 삼위일체신학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며 확장하여 나가는 귀한 작업으로 초대를 받는다. 부디 삼위일체신학에 기초한 다양한 분야의 신학적 발전과 심화가 가열차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만들어주는 핵심 가르침이자 신앙고백인 삼위일체
영원과 시간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법을 익히기 “거룩한 삼위일체는 존재의 지고한 신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되기에, 삼위일체 없이 해명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삼위일체가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가 있는 이유다. 달리 말해, 삼위일체는 모든 존재의 깊이임과 동시에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로서 참된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 본문 中
20세기 정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두미트루 스터닐로에의 삼위일체 관련 저작. 영원, 시간, 사랑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인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그 의미를 해설한다. 이를 통해 스터닐로에는 삼위일체는 영원부터 시작된 사랑이 지금, 여기서도 흐르고 있고, 또 만물을 변혁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한 신념을 해설한다. 또한, 그러는 와중에 일반 형이상학의 문제점, 고전 신학의 대표적인 두 방법론인 긍정 신학과 부정 신학의 관계, 성육신의 의미, 인간론, 삼위일체와 교회, 그리고 전례의 관계에 관한 논의도 진행한다.
스터닐로에에 따르면 존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고, 하나는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다. 시간 속에서, 시작과 끝 사이의 일정한 법칙과 법 아래 종속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그 법칙과 법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함으로써 법칙의 창조주, 동시에 그 법칙과 법에서 자유로운 창조주가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유한하다는 사실에 불안과 두려움을 가진 채 무한해지려 한다. 이는 자기중심주의의 확대를 낳고, 창조주께서 주신 삶이라는 선물을 풍요롭게 누리기는 커녕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우리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계신 창조주께서는 이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영원부터 함께하던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의미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으로서 여전히 활동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고백하면서도 어려워하는 삼위일체론은 이 거대한 드라마, 영원부터 있던 사랑이 펼쳐내는 드라마를 일관성있게 그려낸 것이다.
2,000년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론은 언제나 뜨거운 주제였다. 교회사에 등장했던 상당수 이단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가르침에서 나왔다는 건 그만큼 삼위일체론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있는 중심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리를 향해 스터닐로에는 시간을 창조한 영원의 끝없는 사랑의 활동으로, 우리의 제한된 이성, 시시각각 바뀌는 감정, 자기 권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쏠리기 쉬운 의지를 넘어 참된 이성, 참된 감정, 참된 뜻을 지닌 분이 그렇지 못한 우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들어 쓰셔서 참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활동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삼위일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는, 그것이 우리네 복잡다단한 삶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의아심을 갖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이 책은 일반적인 낙관주의와는 다른 거대한 낙관을 품고 하루 하루를 성장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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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0 → 1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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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330-389)는 초기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다섯 개의 신학적 연설』은 그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행한 설교를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신학적 깊이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겸비한 작품으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의 필독서다.
[출판사 서평]그레고리우스는 40편이 넘는 연설 및 설교문을 남겼다. 그중 27번째 연설에서 31번째 연설 다섯 편을 보통 신학적 연설이라 부른다. 이 다섯 편의 연설은 마치 하나의 긴 논문처럼, 당대 이단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형태로 삼위일체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첫 번째 연설은 다섯 편의 신학적 연설의 서론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의 전반적인 신학적 이해를 보여준다. 이 장은 신학(theologia)이란 무엇이고 신학자가 지녀야 할 특징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시작한다. 사색적인 신학이나 마음의 교만을 경고하면서 신학적 주제는 항상 존경과 겸손한 자세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대 이단들처럼 거룩한 신비를 진실로 이해하지 않고 편협하고 논쟁적인 신학적 토론을 하려는 사람을 비판했다. 여기에는 그가 평생 강조한 수도사의 금욕적 성격이 담겨 있다. 특별히 그가 강조한 침묵은 내적인 기억, 회상, 집중을 통해 영적 발전을 이루게 하고, 대신 다양한 주제에 대한 사색의 길도 열어두게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영성이나 실천이 없는 신학 개념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두 번째 연설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성은 인간의 지성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웅장함을 갖고 있지만, 이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정신은 신성과 그 위대함을 절대로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습니다(28.11).” 하나님, 특히 성부의 본성과 웅장함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분은 다양한 활동과 계시를 통해 알려질 수 있지만 그분의 본질은 여전히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진정으로 묵상하려면 믿음과 겸손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신학자와 신학을 실천하는 자의 관계는 신학(theologia)과 경륜(economia)의 관계와 비슷하다. 신학은 제한되어 있고 억제되어 있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지만, 경륜은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이 드러나는 구속적인 사건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륜이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역할을 통해 세상을 관리하고 계시하며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세 번째 신학적 연설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자인 아들이 창조된 존재이지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는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성자 역시 성부와 동일 본질을 가짐으로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종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에서 신학과 경륜이 갖는 상호작용을 다룬다.
네 번째 연설은 성자가 가진 다양한 칭호를 다룬다. 먼저 세 번째 연설을 좀 더 심화시키며 니케아신조를 옹호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체성을 논의하며 연설을 시작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의 영원한 탄생을 강조하고, 그것이 지닌 여전한 신비, 그리고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 됨과 동등성을 세 번째 연설 30번 17-19절에 걸쳐 자세하게 다루었다.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어떤 분이신 지를 발견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 그런 발견은 하나님 같은 것(God-like)과 신적인 것(divine thing), 즉 우리의 정신과 이성이 그와 유사한 것과 결합할 때, 즉 복사품이 그것이 원하는 패턴으로 돌아갈 때 일어날 것입니다(30.17).”
부정신학에 근거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희미하고 약한 이미지만을 갖는데, 그나마 하나님이란 명칭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이름이다. 그러고 나서 30번 20절부터 신성에서 성육신에 이르는 성자가 갖는 다양한 칭호를 논의한다.
신학적 연설 마지막 장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단어나 신학이나 인간의 언어로 파악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갖는 여러 측면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참된 본질은 기록된 단어, 인간의 생각, 신학적인 공식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려면 인간은 거룩한 신비와 보다 깊고, 경험적이고, 겸손한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전제에 이어 그레고리우스는 당대 신학에서 상대적으로 논의가 덜 되고 성경에도 문자로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은 성령을 정의한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아그라포스 테오스(agraphos Theos), 즉 ‘기록되지 않은 성령’이다. 성령은 온전하게 신성하며, 성부와 성자의 본질과 동일하다. 성령은 결코 작고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위격과 같이 동일하게 경배와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는 성령을 포함한 삼위일체를 다루고, 성경, 특히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드러난 성령의 위격적인 활동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성령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발전은 우리가 이해하는 ‘성령론적 그리스도론(Pneumatic Christology)’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