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은 진실의 삶,
하디 선교사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집사순절은 ‘영적으로 굳어진 마음의 밭을 가는 시간’이다. 쟁기로 논밭을 갈 듯,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영혼의 밭을 갈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과정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럴수록 앞서간 선진들의 삶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이에 도서출판kmc는 ‘하디 영적 각성 120주년’이 되는 올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금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하디 선교사와 함께하는 사순절 묵상집을 준비했다.
1900년대 이 나라와 민족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1903년 사경회를 인도하던 하디에게 성령을 통하여 회개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시고 ‘한국의 오순절’이 되게 하셨다. 그러한 하디 선교사가 ‘한국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불리기까지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 묵상집을 읽는 독자들은 하루하루 선교 일지를 읽듯 그의 성령 체험과 신앙 발자취를 생생하게 경험할 것이다. 또한 묵상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적용과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구체적인 질문들이 한 걸음 영적 진보를 이루도록 도울 것이다.
집필을 맡은 하디기념사업회(회장 최이우)는 “하디 선교사가 보여 주었던 영적 각성의 모습이 침체된 한국 교회와 이 민족을 변화시키는 뜨거운 신앙 유산이 되어 새로운 희망의 불길로 다시 타오르길 소망한다.”며 이번 사순절 묵상집의 의미를 밝혔다. 이 바람대로 사순절 기간 동안 불꽃처럼 진실하게 살아온 하디 선교사와 함께함으로 위기 속에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바란다.
하디 선교사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의과대학 1학년 때 고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것보다 해외 선교지에 나가 의료 활동을 펼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던 나로서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 의료 사역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해외 선교를 지원했습니다.”
‘보다 유익하게’ 세상에 봉사할 길을 찾던 하디는 자연스럽게 교사에서 의사로, 국내 의사에서 해외 선교사로, 그리고 한국 선교사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는 한국 교회와 민족에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나의 기도는 나를 믿어 주신 분들께 신뢰를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외 선교지 어느 곳이든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실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어디를 가든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평신도 독립 선교사로 내한한 하디가 선교지에서 처음 당한 시련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과의 비교를 통해 느낀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땅 끝’에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를 붙들어 준 것은 자신을 파송한 본국 학생들의 기도와 힘들 때마다 읽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외국 군함보다 주님을 더 믿고 있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깁니다.”
전쟁 중에 피난도 가지 않고 환자 진료에 매달리는 하디를 향해 원산 사람들은 “위험한 중에도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우리를 도와주었다.”며 신뢰와 존경을 표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디의 시약소를 찾는 환자들은 크게 늘었고, 시약소에서 드리는 주일 집회에도 조금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군함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선택한 하디에게 하나님은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 “집회하는 동안 교인들은 누가 먼저 자복하면 그 뒤를 이어 계속 공개적으로 자복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교인들이 서로 자복하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두세 번은 설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 어떤 구절을 택하든지 교인들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생하고도 인격적인 종교 체험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보여 준 삶을 볼 때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자복한 교인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회개한 교인들은 내적 평화를 회복했고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이 드러났습니다.
*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임하심으로 추악한 죄악이 드러남과 동시에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죄를 자복하려는 열기가 너무 강하여 하디 박사가 설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한 주간이었는지! 본국에서도 은혜로운 부흥회에 여러 번 참석해 봤지만 이처럼 죄를 깊이 자백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나는 집회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실한 전도부인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시기하고 자신에게 사랑이 없었음을 자백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기독교 복음에 낯선 나라, ‘이교도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선교 개척 2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한국의 교인들은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던 미국이나 캐나다 교인들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오순절 초대교회의 성령 강림’ 사건을 말씀 그대로 체험한 것입니다.
* 하디 부부가 아들 잃은 슬픔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신학 수업을 마친 두 딸 에바와 베시가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베시는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가 선교사가 된 것은 부모님의 기도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이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기대하셨습니다. 부모님은 한국 선교사이며 나도 선교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 삶의 초반부를 이곳에서 살면서 이 나라 백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이 나라를 내 고향처럼 여겼습니다.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있을 때에도 나는 돌아가기를 바랐고 기대했습니다. 미국에 9년 있으면서도 이런 소망과 기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는 것이 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베시가 선교사를 지원한 것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디가 일찍 돌아가신 부모에게서 받은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되라’는 유언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캐나다의 독실했던 감리교회 신도가 남긴 거룩한 유언은 3대에 걸쳐 계승, 유지되었습니다.
* “내가 조선 안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예순여덟… 이 몸의 뼈와 살은 비록 미국에서 가지고 왔다 할지나 오늘의 주름진 이 몸은 조선 강산의 우로(雨露)로 자라난 조선의 살이며 뼈올시다. 이 동안에 내 무엇을 하였는가 하고 회상하면 실로 감회가 깊을 뿐입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거니와 인생은 짧으나 신(神)의 사업은 영원한 것입니다. 나는 오직 조선이 신의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디의 마지막 소원은 ‘조선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념식 후 축하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아일보 기자가 “4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하디는 서슴없이 “다시 조선에 나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아일보는 하디의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이네를 본받자’는 사설까지 실었습니다. 이렇듯 하디는 감리교회와 기독교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