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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2021~2024년 출간(개정)도서 세트(전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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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 마틴 루터/전경미  |  출판사 : 갓피플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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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글이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이후에도, 루터는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특별히 그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중 한 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라며 루터는 이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14,000 → 12,600원 (10.0%↓) 무료배송 상품입니다.소득공제도서정가제700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허울만 남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례전을 비판하며,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루터는 이 논문을 통해,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인 성례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하나인 <교회의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곱 성례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과 군주들을 대상으로 쓴 대표적인 논문으로, 특별히 이 논문에서 루터는 독일 그리스도인이자 자국민인 귀족과 군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했다.
루터가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이후, 교황을 비롯해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 정치가와 신학자들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한편인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는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8,000 → 7,2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400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그 무엇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만물에게 종속되어 만물을 섬기는 종이 된다."
_ 마르틴 루터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기도하기 위해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난다!” _ 마틴 루터

형식적인 기도 신학이 아니라
루터 자신의 매일 기도 습관을 소개한 아주 소중한 책!

“기도를 최고의 사명으로 삼으라!”
불꽃 같은 열정과 기도, 막힌 담을 허무는 성령의 사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실제적 기도 영성!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신발을 만들고,
재단사가 외투를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책은 기도를 주제로 한 단순한 경건서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도가 함께 결합 된 아주 훌륭한 지침서다.”
_ 마조리 톰슨 (미국기독교영성센터 소장)

루터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분주했지만 바쁘기에 더욱 기도한다고 즐겨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루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네 시간씩 기도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않고 일에 힘쓰는 것은 뿌리를 내리지 않은 채 위로만 치솟으려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능력 있는 그의 기도는 죽어가는 사람까지 살려낼 정도였다. 1540년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미코니우스가 병에 걸려서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작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루터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회신했고, 미코니우스는 자리에서 곧장 일어났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네는 죽지 말고 살아야 하네.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내게는 아직도 자네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야. 주님은 결코 자네가 죽었다고 내게 말씀하지 않으실 테고, 나보다 자네를 더 오래 살게 하실 것이라네. 나는 이를 위해서 기도한다네. 이것이 내 뜻이며, 이러한 내 뜻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소원하고 있기 때문이지.”
루터는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가 종교개혁이라는 대단한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해낸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죄와 은총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던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은 어두운 시기를 벗어나게 해준 한줄기 빛이었다. 루터는 영원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죄의 문제와 씨름을 벌이다가 로마서를 통해 힘겨운 영적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고, 그 후로 그는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
루터는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과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하게 신앙과 성경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은 견디기 힘든 교화의 법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런 로마의 법은 과감하게 축소하거나 아니면 폐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은 존립하기 어렵다.”
루터는 다작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남긴 저서는 모두 3천1백 권으로, 무려 6만 쪽을 넘겼다. 이런 다작은 교황의 대리자들까지 놀랄 정도였다. 루터가 보름스제국회의에 소환되었을 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꺼번에 쌓여 있는 저서들을 보고 한 개인이 집필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랬던 루터가 기도를 주제로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분량의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하루는 루터의 오랜 벗이자, 이발을 도맡아 해주던 페터 베스켄도르프가 기도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루터는 누구보다 분주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는 이발사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기도에 관한 장황한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삶속에서 경험한 기도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친구에게 더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원고가 1535년 봄에 「단순한 기도의 방법, 귀한 벗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현재까지 경건서적들 가운데 대표적인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루터는 이 책에서 단지 기도만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기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생활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등을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기도의 형식적인 신학이 아니라 종교개혁자의 매일의 기도 습관을 즐겁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마틴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인 마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1501년에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법학을 전공할 예정이었지만, 몇 가지 사건 때문에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다. 줄곧 구원과 은총의 문제로 고민하던 루터는 1513년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그 후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에 게시함으로써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로마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루터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종교개혁 운동의 이론적인 토대와 방향을 제시했다. 루터의 활약으로 유럽의 중북부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독일에서는 루터파 교회가 로마교회를 대신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 책의 원본인 「단순한 기도의 방법」 이외에도 3천여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1546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시리즈 소개 | 세트 | 세트낱권구성
마틴 루터 / KIATS
가격: 13,000원→11,700원
마틴 루터 / KIATS
가격: 14,000원→12,600원
마틴 루터 / KIATS
가격: 14,000원→12,600원
마르틴 루터 / 개혁된실천사
가격: 8,000원→7,200원
마틴 루터 / 도서출판 브니엘
가격: 14,000원→1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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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마르틴 루터 2021~2024년 출간(개정)도서 세트(전5권)
저자마틴 루터
출판사갓피플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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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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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착 또는 운영체제 등을 설치했을 경우
스포츠 · 사용 흔적이 있는 경우
가구/인테리어 · 주문 제작의 경우 실측 후 제작 중일 경우
식품 · 발송과 동시에 상품의 훼손이 진행되는 경우
악기/음향영상기기 · 사용 흔적이나 설치를 한 경우
· 부품이 망실되었거나 임의로 탈착시켰을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