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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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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다가오지만 은혜롭고 강력한 메시지, LET'S Go 로마서!!이 책은 어려운 내용을 너무나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는 글쟁이 강학종 목사의 로마서 강해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내 삶을 순종으로 채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머리말]신약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책이 무려 13권입니다. 그중에서 로마서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은 바울과 관계가 있는 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것인데 반하여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바울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갈라디아교회를 세웠는데 갈라디아교회에서부터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할까요? 당연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전반을 얘기할 여유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에 분파, 우상, 간음 등의 여러 병리적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주로 그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로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로마교회를 방문해 보지 못하고 그의 사역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이런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려니, 자기가 아는 기독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부 다 쏟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로마서를 가리켜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되는 책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문인지 많은 설교자가 로마서를 강해하고 싶어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책 하나를 택해서 강해하라고 하면 대부분 로마서를 택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부목사 시절에 청년회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로마서를 강해한 적이 있고, 교회를 개척하고 20년 목회하는 동안 찬양예배 때와 수요예배 때, 그리고 주일낮예배 때 각각 한 번씩 로마서를 강해했습니다.
부목사 시절의 일입니다. 청년회에서 회지를 발간하면서 저한테 원고를 부탁하기에 어떤 내용을 쓸까 하다가 로마서 강해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사실 성경은 읽으면 읽은 만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성경 내용이 읽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한 절씩 최대한 쉽게 풀어서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 할 수만 있으면 신구약 성경 66권을 전부 풀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나온 <거룩한 에로스 아가>와
가 그런 책입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지난 2009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주일낮예배 때 설교한 내용을 간추려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때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면 로마서를 1독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1장부터 8장까지 상권, 9장부터 16장까지 하권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습니다. 아울러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제가 로마서를 통하여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 강학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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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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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다가오지만 은혜롭고 강력한 메시지, LET'S Go 로마서!!이 책은 어려운 내용을 너무나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는 글쟁이 강학종 목사의 로마서 강해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내 삶을 순종으로 채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머리말]신약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책이 무려 13권입니다. 그중에서 로마서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은 바울과 관계가 있는 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것인데 반하여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바울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갈라디아교회를 세웠는데 갈라디아교회에서부터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할까요? 당연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전반을 얘기할 여유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에 분파, 우상, 간음 등의 여러 병리적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주로 그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로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로마교회를 방문해 보지 못하고 그의 사역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이런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려니, 자기가 아는 기독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부 다 쏟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로마서를 가리켜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되는 책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문인지 많은 설교자가 로마서를 강해하고 싶어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책 하나를 택해서 강해하라고 하면 대부분 로마서를 택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부목사 시절에 청년회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로마서를 강해한 적이 있고, 교회를 개척하고 20년 목회하는 동안 찬양예배 때와 수요예배 때, 그리고 주일낮예배 때 각각 한 번씩 로마서를 강해했습니다.
부목사 시절의 일입니다. 청년회에서 회지를 발간하면서 저한테 원고를 부탁하기에 어떤 내용을 쓸까 하다가 로마서 강해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사실 성경은 읽으면 읽은 만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성경 내용이 읽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한 절씩 최대한 쉽게 풀어서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 할 수만 있으면 신구약 성경 66권을 전부 풀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나온 <거룩한 에로스 아가>와
가 그런 책입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지난 2009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주일낮예배 때 설교한 내용을 간추려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때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면 로마서를 1독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1장부터 8장까지 상권, 9장부터 16장까지 하권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습니다. 아울러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제가 로마서를 통하여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 강학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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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0 → 1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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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다가오지만 은혜롭고 강력한 메시지, LET'S Go 마가복음!!이 책은 어려운 내용을 너무나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는 글쟁이 강학종 목사의 마가복음 강해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내 삶을 순종으로 채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금방 오실 줄 알았다. “마라나타”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늘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안 오셨다. 예수님은 안 오시고 예수님의 생애를 아는 제자들은 한 사람씩 죽어 갔다. 급기야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다.
주후 64년에 로마 대화제가 있었다. 네로 황제가 자기한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결국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었다. 마가복음은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흉흉할 즈음에 기록된 책이다. 신앙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목숨이 오가는 것이 실제 상황이었다. 그때 그들이 마가복음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읽고 있을까? 그들과 우리 마음에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어야 했지만 지금은 건성으로 믿어도 상관없기 때문일까? 마가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마가복음 원래 독자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
이 책을 통하여 마가복음 원래 독자들에게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때와 동일한 능력, 동일한 사랑으로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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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0 → 1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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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는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도시입니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로, 시커먼 몸뚱이에다 온몸에 소의 음낭이 달린 기괴한 모습입니다. 에베소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힙니다. 길이가 130m, 폭이 70m, 높이가 18m에 이를 만큼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18m면 5층 건물 높이입니다. 국제 규격의 축구장 길이가 100-110m이고, 폭이 64-75m입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축구장보다 더 넓은 규모입니다. 지금의 건축 기술로도 그런 건물을 짓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이천 년 전에 그런 건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그 정도로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데 열심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풍조에서 예수를 믿으면 “왜 우리만 이래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세를 거스르는 소수는 영화에서나 멋있지, 실제로는 전혀 멋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달픕니다.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 것이 에베소서입니다. “너희가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 바로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에베소서를 가리켜서 우리는 교회론을 다룬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 “바람직한 신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이 책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강학종 목사의 쉽고도 은혜로운 강력한 메시지 에베소서 강해서입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이 시대의 언어로 잘 풀어내어 현재의 교회와 성도의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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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 → 1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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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강학종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시대의 언어로 잘 풀어내어
현재의 교회와 성도의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걸작이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 헬라어로는 피스티스가 믿음입니다. 그런데 둘의 뜻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피스티스는 지적 동의를 뜻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우리말 ‘믿음’도 다분히 그렇게 쓰입니다. 반면에 에무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전인격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믿음을 피스티스의 의미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고보가 쓴 서신을 가리켜서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왜곡된 믿음을 바로 설명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믿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한 조각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들어가는 글]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면 의미가 손상되게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사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를 영어로 옮기면 “Thank you”입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는 “I am sorry”입니다. 도무지 같은 뜻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이 언어 현실입니다.
저는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에 대학에 다녔습니다. 대학가에는 반미 감정도 상당했습니다. 당시 워커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나친 내셔널리즘은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반미 데모가 더 격화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한 재미동포 작가가 워커 대사가 말한 내셔널리즘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내셔널리즘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는데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는 뜻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횟수가 931회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한 적은 없고 지배를 받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배격하는 쪽으로 민족주의를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는 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데 그 단어를 민족주의로 번역해서 자기 나라를 보호하려는 것으로 얘기하면 대화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흔히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늘 이신칭의를 말하는데 무슨 영문일까요? 오죽하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말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에서는 ‘피스티스’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가 믿음이고 헬라어로는 피스티스가 믿음입니다. 그런데 둘의 뜻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헬라는 철학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사유와 성찰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으니 언어도 다분히 사변적입니다. 피스티스도 지적 동의를 뜻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우리말 ‘믿음’도 다분히 그렇게 쓰입니다. 반면에 에무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전인격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를 쉬면 이스라엘이 지다가 아론과 훌이 모세 양옆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려서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으로 결국 이긴 전투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할 때 우리말 ‘꾸준하게’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바로 ‘에무나’입니다. 모세의 손이 꾸준하게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꾸준한 순종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도 믿음을 피스티스의 의미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고보가 쓴 서신을 가리켜서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왜곡된 믿음을 바로 설명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야고보가 이해한 믿음이라고 해서 바울이 이해한 믿음과 다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믿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한 조각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제가 야고보서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이되기를 소망하며 아울러 이 책이 나오도록 수고해주신 방주석 장로님과 베드로서원 가족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주후 2023년 7월
하늘교회 목사 강 학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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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다가오지만 은혜롭고 강력한 메시지 LET'S GO 요한계시록책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어떤 게 있을까? 처음에는 무슨 질문인지 아리송했는데 같은 질문을 몇 번 받으니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책으로 오해한 결과의 질문이었다. 예컨대 마태복음이나 로마서를 강해한 책이라면 머리 싸매고 연구해서 쓰겠지만 요한계시록은 금식기도를 하거나 환상을 보는 등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해서 성경 다른 곳에 없는 내용이 있지도 않습니다. 신명기에도 있고 시편에도 있고 로마서에도 있는 내용이 다른 표현으로 기록된 것뿐이다. 성경이 특별한 책이면 요한계시록도 특별한 책이지만 성경이 특별한 책이 아니면 요한계시록도 특별한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신비한 책이나 난해한 책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타임 스케줄을 기록한 책도 아니고 특별한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이 세상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책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을 고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책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알아야 할 내용은 666이 누구인지,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 일어나는지가 아니다. 언젠가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을 담아서 펴낸 〈쉽게 보는 어려운 요한계시록 1, 2〉를 한 권으로 줄여서 〈Let’s Go 요한계시록〉에 담았다. 이 책을 읽고 더 상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께는 〈쉽게 보는 어려운 요한계시록 1, 2〉를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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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기쁨을 주는 LET'S GO 빌립보서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다. 웬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자기들을 도우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에 가게 된다. 행 16:12에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라고 되어 있다. 주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 일파가 이끄는 군대와 카이사르를 따르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가 빌립보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브루투스 일파가 패퇴한다. 전투에서 이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는 휘하 장병들을 빌립보에 정착시킨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인두세와 토지세를 감면 받는 등 법적인 지위가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로마 시민과 똑같았다.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관습과 풍토를 그대로 따르고 로마법을 준수하는 것을 상당한 자랑으로 여겼다.
바울이 그런 빌립보에 갔다.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기도 하고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기도 한다. 그 일로 인해서 옥에 갇히지만 오히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빌립보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그런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편지를 쓰면 어떤 내용을 쓸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거나 재판 결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제일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빌립보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기뻐하라고 한다. 빌립보서를 읽다 보면 계속 반복되는 말이 ‘기쁨으로’, ‘기뻐하고’, ‘기쁨을’, ‘기뻐하리니’, ‘기뻐하라’, ‘기뻐하게 하며’, ‘기쁨이요’, ‘기뻐함은’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한테 기뻐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어쨌든 환경에서 파생되는 기쁨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다. 그런 기쁨을 빌립보교회 교인들한테 권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살면서 당시 바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 있을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도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에게 있었던 기쁨이 바울 혼자만의 기쁨일 수는 없다. 우리도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쁨이다. 적어도 빌립보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렇다. 우리 삶 속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로 기뻐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