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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키르케고르) 저서 세트(전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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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공격자다!
● 기독교를 방어하는 것은 무의식 중에 생긴 교활한 반역이다!
● 당신은 진정으로 믿는 자였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를 향한 키르케고르의 경고!




[해제]

이 작품은 1848년에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3부의 ‘뒤에서 상처를 주는 생각들-덕을 세우기 위하여’를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의 부제는 ‘기독교 강연’으로 되어 있고, 『기독교 강화』 전체 4부의 강화 중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원래 계획에서 3부는 『기독교 강화』에 포함시킬 의도가 없었으나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 작품은 2부의 『고난의 기쁨』처럼 책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서문이 없다. 서문 대신 모토가 등장한다. 모토는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역자는 이 모토가 무엇을 말하는지 역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제공한다.
먼저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에 어떤 방어나 변호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작품 뿐 아니라 1847년에 저술한 『사랑의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을 『기독교 강화』에 추가할지 고민했던 부분도, 『사랑의 역사』로 인해 고민했던 내용과 함께 그의 일기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사랑의 역사』가 논쟁적이면서 그 당시 국교화된 덴마크 교회를 비판했던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으므로 그는 『기독교 강화』에서는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내용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랑의 역사』만큼이나 공격적이다. 이 작품의 모토에서도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공격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공격자인가?
첫째, 실족은 기독교의 공격이다. 키르케고르가 강조했던 사상 중에 하나는 ‘실족’이었다. 덴마크어로는 Forargelsen이고, 영어로는 offense, 헬라어로는 σκανδαλον이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번역해 오면서, 주로 ‘분노’로 번역해 왔기에 성서의 용어인 ‘실족’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키르케고르가 강조했던 성서의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그가 실족을 하나의 사상으로 발전시킨 책은 『그리스도교의 훈련』이었고, 『철학의 부스러기』, 『죽음에 이르는 병』, 『사랑의 역사』와 같은 그의 작품에서 실족에 대한 사상이 발견되고 있다. 무엇보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기독교에서 실족의 가능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타락이 왔다고 주장한다. 실족이 제거된 기독교는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고,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여 ‘변증’하려 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슐라이어마허의 변증학을 비판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새로운 변증학이 탄생되었기 때문인데,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변증학은 일종의 수면제인데 실족의 가능성은 이에 대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실족의 가능성은 잠들어 있는 사람을 일깨워주고, 마술에 걸린 상태를 풀어주어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기독교를 방어하면 할수록, 더욱 학문적인 영역에 빠지고 만다. ‘변증학’은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다. 아마도 키르케고르는 그 당시에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신학적인 자유주의 운동을 목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거대한 학문적인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 이때 기독교가 다시 실족의 가능성을 도입한다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일 것이고, 이런 기독교는 방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학문적인 요소를 도입할수록 더욱 방어적이 되고, 기독교는 왜곡되고, 마치 환관처럼 그 힘을 빼앗기고, 결국 폐지된다.
기독교가 학문적인 영역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실족하든가 아니면 기독교를 받아들이든가 선택하도록 자세를 취하고,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면, 그때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는 공격자로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장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위험을 부각시키고, 믿음의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둘째, 죄의 자각이 기독교의 공격이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강화』를 전체 4부로 구성하고 있는데, 역자는 1부를 『이방인의 염려』, 2부를 『고난의 기쁨』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2부의 강화인 『고난의 기쁨』은 전체 7장에 걸쳐 어떤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고난의 기쁨』은 각 장마다 “죄만이 인간의 타락이다”라고 말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난은 죄와 관련된 고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2부에 나오는 고난을 죄와 관련된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언제 다루고 있는가? 바로 이 작품과 4부의 작품이 죄의 문제를 다룬다.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여기에서는 ‘죄의 자각’이 기독교의 공격이다. 독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죄의 자각이 기독교의 공격인지 생각해야 한다.

셋째, 각 장마다 공격 포인트가 있다. 공격 포인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원 제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뒤에서 상처를 주는 생각들 -덕을 세우기 위하여’이다. 키르케고르는 ‘덕을 세우는 것’이 끔찍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붙임표(-)로 연결된 후반부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공격 포인트에 해당된다.
역자는 각 장의 제목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번역할 때, 붙임표(-)를 생략하지 않았다. 각 장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1장과 마지막 7장을 제외하고 각 장의 제목 역시 이 책의 원 제목처럼 붙임표(-)가 있다. 결국 각 장의 제목에서 붙임표(-) 이후에 나오는 말이, 덕을 세우기 위한 키르케고르의 기획이고 ‘끔찍한 것’에 해당된다. 역자는 붙임표로 연결되지 않은 1장과 7장은 더 본질적인 기독교의 공격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처음과 끝의 의도적인 배치다. 7장은 독자로 하여금 정말 믿는 자인지 오직 그것만 생각하도록 기획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목적은 분명하다. 이 작품이 비록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비판 자체가 이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착각하며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더욱 바르게 서도록 권면하는 작품이다. 오늘 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인가? 오늘날 한국이 처한 기독교의 상황도 키르케고르가 진단했던 그 당시 상황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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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

“교화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엄밀하고 학문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교화적인 책”
“그리스도교의 깨달음을 위한 심리학적 탐구!”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키에르케고르가 그리스도교들에게 던진 물음에 해답을 주는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이다. 절망이란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며 나 자신의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지상의 일시적인 고난이나 고통과 병 그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절망’이란 일상적인 용어와는 달리 ‘인간의 자아가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기소외인 것이다. 이 상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현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병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고 각성을 촉구했다는 것에 이 책의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절망’은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병’으로서 이해되고 있으며 ‘약’으로서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확실히 주의해 둔다.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이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기독교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정신적 상태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바로 죽는 일에서, 왕생(往生)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 누가 배신자인가? 예수를 팔아버린 가롯유다인가?
● 온 인류는 십자가 사건의 공범이다!
●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홀로 걷다 지친 당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대 앞에 나와 위로를 받으십시오!


이 작품은 1848년 출판된 <기독교 강화>에 실린 4부의 강화 중 네 번째에 해당됩니다. 이 작품의 덴마크어 원 제목은 "Taler ved Altergang om Fredagen"으로 우리말로 '금요일 성찬식 때의 강화'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찬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믿는 자를 향한 위로와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배신자
역자가 볼 때, 이 책의 핵심은 4장에 있습니다. 전체 강화가 성찬을 다루고 있음에도, 성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본문은 4장의 강화밖에 없고 4장에서 말하는 인간이 처한 실존 자체가 전체를 해석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4장의 성서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The Lord Jesus, on the night he was betrayed, took bread"

이 구절을 더 정확히 옮기자면, "예수께서 배신당한 밤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 이 날이 주님께서 "배신당한 밤"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도대체 누구한테 배신당한 걸까요? 가룟 유다일까요? 가룟 유다는 첫 번째 배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날 밤, 배신자인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아 넘겼고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전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마가는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주님을 따라오다 주님께서 잡히시니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막 14:51-52)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라고 했던 자들이 정작 스승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도망을 쳤다면 이건 배신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따라서 이 책의 4장에서는 이 제자들 역시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럼 베드로는 배신자가 아닐까요?
베드로는 끝까지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스승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는데, 첫 번째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마지막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모두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럼 이제 그 당시의 군중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대환영을 하였습니다. 마치 왕으로 오시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군중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돌을 던졌고, 조롱과 핍박을 일삼았으며,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군중들 역시 배신자 아닌가요?
따라서 이 책의 4장은 가룟 유다만 배신자가 아니라, 열두 제자 역시 배신자였고,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배신자였다는 겁니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 그분은 비록 천하디 천한 말구유에 오셨지만, 결국 왕이 되신다! 제자들뿐 아니라 그 당시 군중들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했던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상승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셨던 말구유는 어떤 곳입니까? 천하디 천한 말구유는 낮은 자리 중에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말구유에 오셨고 점점 더 하강하다가 왕이 되기는커녕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누구 때문입니까? 배신자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온갖 조롱을 당했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사랑을 멈췄더라면, 이런 조롱과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사랑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배신입니다. 배신은 사랑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타격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일까요? 성서에 대한 역사성 논쟁은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는 별로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다시피, 이 사건은 과거의 몇몇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사건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덮어 버리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자세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믿는 자에게는 절대 이 사건이 과거의 사건일 수 없고, 현존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죄 없는 희생은 아무리 고난의 잔이 비워졌을지라도, 지나간 일이 아니다. 과거에 지나간 일이더라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1800년 전에 있었을지라도, 끝난 사건도, 완료된 사건도 아니다. 1800년 전에 있었을지라도 그럴 수 없다."(본문 중에서)
주님은 병상에서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우연한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분을 공격하고 죽인 것은 몇몇의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세대가 저지른 잘못도 아닙니다. 바로 인류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겁니다!

우리 역시 배신자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우리 역시 인류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이 사건의 공범이고, 배신자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4장에서 밝히려 하는 겁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인간 실존의 본질은 '십자가 사건의 공범'이라는 겁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역시 배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함부로 씻을 수가 없다. 손을 씻는다면, 적어도 빌라도가 손을 씻는 것처럼 씻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구경꾼도 아니고, 과거 사건의 관찰자도 아니다. 우리는 현재 사건에서의 공범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처럼 서 있기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절대 그런 배신자 일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주님을 변호했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이 책은 그 당시의 현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군중들 속에 있을 때, 저 위험천만한 군중들 틈에서, "저분은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강력하게 변호할 자신이 있는지를 상상해보라고 합니다. 그럴 용기와 확신이 부족하다면 역시 배신자라는 겁니다.
우리 역시, 배신자임을, 온 인류가 십자가 사건의 공범임을 인정할 때,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인류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유일한 한 날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배신당한 밤'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 나의 독자, 사람이 때로는 그의 삶에서 없어지기를 원하는 날이나 밤이 있는 것처럼, 인류는 역사에서 이날 밤만은 없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분이 태어난 밤이 어두웠다면, 배신당한 이 밤은 더 어두웠다!"
인류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너와 내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 바로 이 날 밤입니다. 배신했다는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날 밤, 배신당한 밤, 주님은 배신자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류가 기억하기 싫은 이 밤을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사라지기 원하는 이 밤을 기념하라고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4장의 본문이지요.

이 밤의 고백
무엇보다 4장의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키르케고르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갑자기 1인칭으로 '나'가 등장합니다. 역자는 이 부분의 일부를 소개하고 싶군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경험 없는 젊은이가 행복하듯, 순진한 아이가 행복하듯, 일반 사람들이 행복하듯 경박하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 세상에서 아무리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마도 우리의 감각을 두려워 떨게 하는 것이기에, 마음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볼 필요가 없으리라.
나에게 더 이상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즉, 나는 사랑이 배신당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이해했다. 나 역시 사람임을,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 많은 인간이 되는 것임을, 나는 이런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이로 인해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나 자신에 대해 이해했던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은 속죄자이셨다. 인류에 속한 자로서,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속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류가 속죄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보다 속죄자에 대한 필요가 더욱 분명한 적은 없었다."

성찬이 필요한 이유
결국, 우리가 그분의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성찬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찬의 가장 큰 의미는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 중에 하나는 용서입니다. 이 사랑의 크기를 얼마나 경험하셨나요? 키르케고르는 이 사랑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1장에서 누가복음 22장 15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은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이미 자신이 배신자에 의해 죽음에 이를 것도 아셨습니다. 여러분은 배신자에 의해 죽게 될 것을 알았을 때, 배신자를 초대하여 만찬을 대접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할 수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기념해야 합니까? 왕이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면, 농부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제발 나를 좀 기억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오히려 농부가 왕께 매달리며 나를 좀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맞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은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지금 사랑의 만찬을 제정하시고, 제발 나를 좀 기억하달라는 겁니다. 그것도 배신자들에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도 안되는 사랑이야기! 배신자가 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주님의 사랑은 배신자가 쉴 수 있는 주막집과 같다는 것이지요. 나그네가 여행을 하다가 지치면 주막집에서 쉼을 얻듯, 주님의 성찬은 바로 그런 위로요, 쉼입니다.
제가 다 설명을 드리지는 못했으나,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화해의 성찬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4장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보라, 이제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에게 복이 있을지라! 보라, 거룩한 식탁에서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신 자신에게 복이 되기 위해 이 성찬을 받으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주님의 성찬을 통해 큰 위로를 얻기를 축복합니다. 이처럼 키르케고르의 이 작품은 4장을 구심점으로 하여 나머지 작품을 해석하면 좋습니다.
●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방인에 대한 경고!
●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통해 이방인과 크리스천의 존재론적 차이를 밝힌다.
●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개정판 역자 서문]


2021년 3월 처음으로 키르케고르의 『이방인의 염려』를 출간한 이후로, 국내 최초로 《기독교 강화》 4부 전체 번역 및 출판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이방인의 염려』 1쇄가 전부 판매되어 개정판으로 책을 내놓습니다. 개정판은 일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본문을 전부 경어체로 바꾸었으며, 키르케고르의 강화 전체를 “기독교 고전” 시리즈로 만들어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기독교 출판 환경에서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출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과 책을 찾고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키르케고르의 전체 작품 번역과 출판을 완료하는 그 날까지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역자의 말]

『이방인의 염려』는 그 당시 기독교를 비판한 작품입니다. 그냥 읽는다면 특별히 비판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초대 교회 당시 상황에서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체 사회가, 전체 국가가 ‘기독교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독교 세계에서 이방인의 염려가 발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프롤로그>에 보면, “이 나라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이방인의 염려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이 기독교의 나라는 이방인의 나라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이방인은 기독교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일컫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의 특징은 자칭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키르케고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이방인들을 각성시키고자 기획된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자는 누구인가요? 이 강화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저 기독교 밖에 있는 이방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반면, 기독교 세계에 사는 이방인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이 사람들을 각성시켜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성시킬 수 있습니까? 드디어 가장 어려운 주제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에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신념 혹은 이념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하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던가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신과 의사도 다룰 수 없고, 심지어는 부모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야 단지 기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각성을 위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라고? 아마 ‘쌩뚱’맞은 결론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독자들은,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산상수훈 및 이와 관련된 마태복음 6장이 아주 중요한 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와 관련된 마태복음 6장은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 문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의 작품 『불안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쌩뚱맞은 결론은 한 마디로 말해, 복음 자신이 그런 쌩뚱맞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깊이 있게 읽고 있노라면, 아마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율법은 지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율법보다 더 엄격합니다. 게다가, 5장 마지막 절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완전(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은 우리가 닮아야 할 모범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제시하고 있는 반면, 6장은 새와 백합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이 쌩뚱맞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우리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관대함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으려면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입니다. 과연 누가 마태복음 5장을 실천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은 성경에 나오는데 왜 웃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가라고 불평합니다. 이런 불평은 아마도 말씀의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알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현장을 조금이라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웃지 않는지를 질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사이에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면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나를 봐. 그리고 철저하게 나를 닮아야 해. 산상수훈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지켜야 완전해질 수 있거든.”
인간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말고,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렴.”
인간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주님은 다른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새와 백합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관대함입니다. 나는 산상수훈이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윤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복음의 일점일획도 건드리거나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에 나누겠습니다. 어쨌든, 복음은 우리에게 새와 백합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그만큼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관대함입니다.
둘째, 투명성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투명성입니다. 이 단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논하기 위해, 다시 서두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에 빠진 이방인을 각성시키려 했습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한 번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제시합니다.
도대체 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가요? 거기에서만, 오직 그곳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투명성의 문제는 이미 1847년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2부의 작품인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 2부에서도 인간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투명해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너무 혼탁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인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타인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전(全) 존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곳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인간의 비교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함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와 백합에 비교함으로써 ‘존재하기’를 진정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이런 경건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 연결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도 연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이런 시대에 오직 단 한 분, 하나님만은 예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쾌하게 제시하기가 더 힘듭니다. 인간은 관계하는 존재라고 규정을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전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맞다면, 하나님을 제외한 이런 연결, 이런 교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직 존재가 규정되지 않은, ‘존재하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새와 백합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도 없습니다. 새와 백합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하기를 시작합니다. 시작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시작의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존재하기를 시작하는 지점부터 인간은 시험을 받는다는 점에서 새의 존재와 다릅니다. 이 문제는 ‘비교’에 있습니다. 가난한 것과 부한 것, 비천한 것과 고귀한 것과 같은 비교 때문에 존재하기가 힘듭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도 전에 내가 얼마나 비천한지 혹은 고귀한지, 내가 얼마나 부한지 혹은 가난한지를 먼저 배웁니다. 이것이 시작의 어려움입니다. 존재하기, 태어나자마자 존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요!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은 마치 부한 자, 고귀한 자가 얼마나 부자이고 고귀한지를 입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그들의 인생은 이런 자들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부한 자, 고귀한 자는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들의 존재로 인해 그들의 가치, 그들의 명성과 명예가 더욱 높아질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히 언급했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비교의 늪에 빠져 좀처럼 헤쳐 나오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먼저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봅시다. 그 곳에는 어떤 인간적인 비교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봅시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새와 백합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
이 강화 전체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제시입니다. 기독교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에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실존의 구조로서 불안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원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은 어떤 병적인 불안, 정신과에서 말하는 예기불안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불안으로 ‘존재론적 불안’이다.
따라서 이 불안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과 시도도 헛됩니다. 왜냐하면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믿음에 이를 수도 있고, 죄에 빠질 수도 있는 그런 양의성이 있는 것이 불안입니다. 다시 말해, 악을 행하려 할 때도 불안은 나타나고 역시 선을 행할 때에도 불안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혹은 공포는 대상의 문제인 반면, 이 존재론적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성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은 대상이 사라짐과 함께 사라지지만 불안은 가능성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게서 불안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은 정신 혹은 영으로 규정되지 않는 동물에서는 전혀 발견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기분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제1강화의 “가난의 염려”에서 “구원이란 명령받은 것, 곧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구원은 곧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확신합니다.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우리나라 말로 ‘불안’이라고 번역했으나 성서적인 의미에서 고찰한다면 이는 곧 염려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삶의 불안, 염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자기 자신을 깨닫고 믿음으로 전진할 때, 염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구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일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기도가 ‘내일’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듯, ‘오늘’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내일은 다시 오늘이 될 것이므로,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악에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다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원죄의 전제이자 원죄를 역행적으로 설명해주는 불안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최초의 죄를 낳기 전에 불안(염려)이 존재했다는 것은 놀라운 통찰입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담처럼 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악이란 대단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악을 존재의 결핍으로 보았다면, 내일의 불안, 내일의 염려를 제거해달라는 기도는 여전히 존재가 결핍된 상태요, 불안을 극복했다기보다는 ‘내일의 불안으로 인한 기도’일 뿐입니다. 이런 기도가 어떻게 불안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기도는 복음이 말하는 염려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기도는 자신의 내밀한 존재의 결핍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와 백합처럼 ‘존재’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내일의 염려가 없으니까요.
‘오늘’ 다만 악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때, 그 날 하루는 염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시 내일은 오늘이 될 것이고, 그 한 날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염려로부터 구원받는 비결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썼다면, 여기에서 느끼는 존재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역자로서 『이방인의 염려』에서 제시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해제는 이 강화의 특징을 다만 역자의 관점에서 서술했을 뿐입니다. 이 강화는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기독교 출판 시장이 어렵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책을 내고 싶어도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기에 직접 1인 출판에 도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라 출판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 전자책 먼저 출간을 했고, 이제야 종이책으로 출간합니다. 아직 출판에 대한 경험이 없는 초보 출판이라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독자들의 많은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왜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는가? 예수 믿으면 고난이 사라지는가,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가? 우리는 환난과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던가!
● 하지만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진다!
●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이 울리는 꽹과리이듯,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이다!


[개정판 역자 서문]

2021년 3월 처음으로 키르케고르의 『이방인의 염려』를 출간한 이후로, 국내 최초로 《기독교 강화》 4부 전체 번역 및 출판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고난의 기쁨』 1쇄가 전부 판매되어 개정판으로 책을 내놓습니다. 개정판은 일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본문을 전부 경어체로 바꾸었으며, 키르케고르의 강화 전체를 《기독교 고전》 시리즈로 만들어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기독교 출판 환경에서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출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과 책을 찾고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키르케고르의 전체 작품 번역과 출판을 완료하는 그 날까지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역자 해제]

고난 중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1. 소개
이 글은 키르케고르가 1848년에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2부 ‘고난의 싸움 중에 있는 마음의 상태Stemninger i Lidelsers Strid’를 번역한 것입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기독교 강화』 중에서 이 강화는 무엇보다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자는 키르케고르의 고난을 주제로 한 강화가 기독교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화는 고난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키르케고르가 제시하려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이 다른 기쁨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에 고난에 대한 강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1847년에 저술한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제 3부에 실린 ‘고난의 복음’입니다. 이 두 작품은 고난이 주제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또한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고난의 복음』은 고난을 대부분 ‘제자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반면, 이 강화는 ’시간과 영원’의 관점에서 고난을 다룹니다.
키르케고르는 ‘기쁨의 철학자’입니다. 키르케고르만큼 기쁨을 강조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기쁨을 이야기하는 곳마다 ‘고난’, ‘환난’, ‘역경’, ‘짐’과 같은 단어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가 우울, 불안, 절망을 말했다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이런 결론은 그의 사상서만 읽었지 강화를 읽지 않은 까닭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강화는 영어로는 ‘Discourse’로 번역되었고, 덴마크어로는 ‘taler’입니다. 한 마디로 그냥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어떤 작품도 ‘설교’가 아니라고 말했다는 데 있습니다. 설교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 글, 설교라 말할 수 없는 글, 그 정도의 ‘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표현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떤 설교보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제거 불가능한 고난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난, 역경, 환난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를 무엇보다 간절하게 합니다. 이런 기도의 이면에 숨겨진 생각을 보면, 고난이 혼합된 기쁨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기 바랍니다. 이 기쁨은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순전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에는 세상의 어떤 고난도 없는, 그야말로 기쁨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박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독자들 중에 고난을 제거하는 방법을 얻기 위해, 남은 생애 가운데 고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고난을 기독교의 기쁨 속에 제거 불가능한 요소로 남겨두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은 울리는 꽹과리이듯이,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이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난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환난의 길, 고난의 길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착각하도록 부추긴 대표적 표현입니다. 아니, 이 표현은 무한히 바뀌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이라고 말할 때는 마치 고난과 길을 분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의 삶에, 나의 인생길에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실에서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기독교는 고난 자체가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이신 그분이 가신 길의 본질입니다.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집니다. 따라서 고난은 이 길을 가는 자에게 필연적입니다. 결코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옥행 열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해, 고난을 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맨 정신으로 가능할까요? 물론,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원하는 것은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3. 불가능한 소원
세상에서 고난당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를 선택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고난당하기를 소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사람들도 고난당하기를 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싸우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인생을 잠에 빠져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노력 없이 이익을 얻기 위해 재치가 넘치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고난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최고의 것을 닮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더 통렬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자인지, 싸움으로써 획득한 명예를, 암묵적으로 그 증거를 갖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싸우면서 강자가 됨으로써, 싸우기 위한 지속적 몸부림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존심Selvfølelse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안과 고요 속에 정착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싸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습니다. 싸움이 이제 끝났다는 어떤 소식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활시위bowstring의 자존심은 오직 한 가지, 전투에서 당겨지기를 열망하듯이, 아무리 많은 승리를 얻어도 느슨해져 창고에 처박히는 것, 이 한 가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듯이, 그들도 역시 싸우는 중에, 전투의 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투의 긴장 속에,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말인 ‘고난당하는 것’, ‘고난당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이것은 오해, 기만, 착각이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그의 말을 반복하고 “그래, 너는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제 그에게 그 말들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면, 세상을 향해 싸우기 위해 소원하고 도전했던 저 공격적인 사람들도 아마도 용기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싸움에 빠지는 대신에, 그는 아마도 고난당하는 데에 빠졌을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원하는 것과 고난을 선택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결코 일깨우지 못했던 소원입니다. 이것을 생각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고난에 대한 생각과 고난의 기쁜 복음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고 실제적으로 고난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선택하고 이것이 실제로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가 되기 위해, 사람은 이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께 배워야 합니다.


4. 기쁨
역자로서 이 작품을 평가하자면, 바로 이 불가능한 소원, 고난당하기 원하는 소원, 이 소원에 불을 붙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고난당하는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키르케고르는 명확히 이 기쁨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일곱 번째 강화인 “역경이 형통인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이 기쁘다는 것을 발전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역경이 형통이라는 것을 믿는 자, 그는 이 강화가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기쁘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한 순간도 낭비하지 말고 믿음을 붙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기쁨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명확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고 있는 독자라면, 고난당하는 중에 어떤 기쁨이 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쁨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 서술이 불가능한 기쁨입니다. 따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38년 5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사도가 어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외쳤던 것만큼 설명 불가능하게 우리 사이로 빛을 밝히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존재한다. 이 기쁨은 이런 저런 기쁨이 아닌, ‘마음 심연에서 나오는, 입과 혀를 가진’ 영혼의 충만한 외침outcry이다: “나는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나의 기쁨으로, 기쁨을 통해, 기쁨 가운데, 기쁨에 의해.” 말하자면, 갑자기 우리의 다른 노래를 방해하는 어떤 천상의 후렴refrain이다. 산들바람처럼 시원하게 하고, 상쾌하게 하는 기쁨, 맘므레 평원을 가로질러 영원한 처소로 불어오는 무역풍에서의 미풍이다.(JP, 5:5324)

이 기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영원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먼저 키르케고르에게 영원과 시간은 이질적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시간과 영원의 문제가 이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에 흡수됩니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생성된 것이고, 영원은 무시간성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시간은 영원과 섞일 수 없고 언제나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에서 살아갑니다. 시간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입니다. 문제는 시간적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 안에서는 어떤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지만, 시간과 자유의 문제를 생각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시간 안에서 인간이 왜 자유로울 수 없는지를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개인이면서 사회 속에 살아갑니다. 문제는 개인인 인간이 사회 밖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한 마디로 ‘사회적 존재’입니다. 이것은 나뭇잎과 나무와의 관계와 같아서, 나뭇잎이 나무 밖에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나뭇잎(개인)이 떨어져 죽어도 나무는 살고 있다는 것이고 나무는 영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은 시간에서 죽고 사라져도 지금까지 사회는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인간은 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지키고 살아가야 하기에, 참다운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자연법칙 속에 있어 자유롭지 않듯, 인간은 사회법칙 속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원을 끌어들입니다. 영원에서, 정신의 영역에서, 키르케고르가 좋아하는 용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시간에서 영속성을 가지고 존재했던 사회, 이 사회가 영원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에서는 오직 개인만 존재합니다. 영원에서는 각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영원에서는 그는 혼자입니다. 영원에서는 자식도 없습니다. 영원에서는 아내도 없고,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영원을, 이 사회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책으로 끌어들입니다. 또한 이 영원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이고,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이 어떻게 기쁨이 되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사회는 영속성이 있습니다. 마치 사회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영원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은 어떠한가요? 나뭇잎처럼 죽고 사라지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안에서의 고통의 원인입니다.
한 개인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낙을 즐긴다 해도, 언젠가는 죽고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해도, 그도 인간이고 허무하게 죽고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한다면,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동물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 고통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인간은 유일하게 시간으로 인해 고통당합니다. 그래서 이 강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간적인 것만 시간에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에게 시간적인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히 획득될 수 있습니다.”

상실의 고통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영원에 의지하여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쁨을 포획하기 위해, 기쁨으로 고난당하는 자를 사로잡기 위해 이 생각을 한데 모아봅시다. 시간적인 것이 시간에서만 상실되고 영원한 것은 영원히 상실된다면, 유익은 분명합니다. 내가 시간을 상실하면 영원을 얻습니다.”


5. 시간의 성화
하지만 시간을 상실하는 일, 이 세상에서 유한한 것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아니라, 의도적인 포기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영원은 시간의 반대입니다. 영원은 시간 전체에 저항합니다. 시간을 양적으로 축적한다고 해서 영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자신을 수치로 계산하여 영원을 닮으려 합니다.
예를 들어, 고난당하는 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고난은 결코 한 번이 아닙니다. 시간의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하루, 이틀, 사흘, … 등 많은 날들을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허구한 날 고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고난이 영속될 것처럼 고난당하는 자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기생식물이 아무리 길게 자라난다 해도, 아무리 땅에서 넓게 퍼진다 해도, 그 키가 숙주식물 이상 더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시간 역시 그러합니다. 영원이 다스릴 때,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해도, 시간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이 기생식물처럼 고난당하는 자를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자의 종이었던 시간이 고난당하는 자의 주인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저지하는 힘은 영원뿐입니다.
여기에는 목적과 수단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사도행전 8:18-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먼저 시간과 영원을 생각하자면, 시간(돈)이 영원(성령)에 봉사해야 할까요, 영원이 시간에 봉사해야 할까요?
다음으로 목적과 수단을 생각하자면, 성령을 수단 삼아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가요, 돈을 수단 삼아 성령을 얻는 것이 목적인가요? 혹은 시간적인 것(돈)으로 영원한 것(성령)을 살 수 있을까요?
목표나 목적은 수단보다 언제나 높습니다. 그때, 이 땅의 유익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으로 얻으려 한다면, 이 땅의 유익이란 그에게 영원한 것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는 영원한 것을 상실합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십시오.
이 땅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자신의 영적 우월을 뽐내기 위해, 자신의 영적 자만에 봉사하기 위해, 성령을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시간에서 영원을 얻기 위해 살지 않고, 시간을 포획하기 위해 영원을 이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성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아브라함 허셸은 『안식』에서 시간의 성화를 말한 바 있습니다.

“시간의 문제는 시간을 성화함으로써만 풀 수 있다. 시간처럼 붙잡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언어이고, 시간은 그분의 노래이며, 공간의 사물은 그 노래에 담긴 자음이다. 시간을 성화하는 것은 하나님과 한 목소리로 모음들을 노래하는 것과 같다.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성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다.”

하지만 아브라함 허셸은 이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시간을 성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역자는,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시간의 성화란 순종이라 확신합니다. 순종은 시간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히5:8) 그분은 삶과 죽음에서 순종함으로 시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당함으로 순종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울려 퍼지게 하는 천상의 노래입니다. 공간의 정복은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시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성화될까요?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 성화되고 깨끗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운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울 때 성화됩니다. 영원의 사고로 생각하면, 한 번의 고난은 이동, 통과일 뿐입니다.
당신은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고난이 당신의 인생만큼 길다할지라도,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된다 할지라도(눅2:35), 그것은 겨우 통과에 불과합니다. 당신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고난이 아닙니다. 당신이 고난을 통과합니다. 영원의 의미에서, 당신은 절대로 다치지 않습니다.
시간에서, 시간의 이해에서, 고난은 끔찍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각적인 착각에 의해, 고난이 마치 당신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고난 속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각적 착각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죽이는 연기와 같습니다. 이 연기에서 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정확히 찌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습니다.(눅21:18) 살해당한 배우가 해를 당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다니엘이 해를 당하지 않고 사자 굴에서 나오듯이(단6:10-23), 그의 세 친구들이 용광로 속에 걸어 들어가지만 해를 당하지 않듯이(단3:8-27), 믿는 자의 영혼도 모든 일시적인 고난에 의해 해를 당하지 않고 영원으로 걸어갑니다. 죽음에 의해 다치지 않습니다.
모든 일시적인 고난은 신기루입니다. 영원의 의미에서 죽음 자체는 어릿광대입니다! 좀과 동록이 영원의 보물을 소멸할 수 없듯이(이보다 더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둑이 그것을 훔칠 수 없듯이(마6:19-20), 일시적인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해도, 눈곱만큼도 영혼에 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어떤 병도, 어떤 기근이나 궁핍도, 어떤 추위나 더위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멸한다 해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중상모략도, 어떤 모욕도 어떤 인격적 공격이나 핍박도 아무리 훔치고 강탈한다 해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죽음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고난은 영혼에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는 통과입니다. 아니, 훨씬 더 영광스럽게도, 이 고난은 영혼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는 통과입니다. 결과적으로 청결은 통과가 뒤에 남겨 놓은 흔적입니다. 금이 불 속에서 깨끗해지듯이, 영혼은 고난 속에서 깨끗해집니다.(말3:3) 그러나 불은 금에서 무엇을 제거합니까? 이것을 제거한다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은 금 속에 있는 불결한 요소들만 제거하니까요. 그렇다면, 금은 불 속에서 무엇을 상실합니까? 이것을 상실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은 불 속에서 모든 비천한 것들을 상실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말해, 금은 불을 통해 이득을 얻고 있습니다.
모든 일시적인 고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오래 지속되더라도, 고난은 본질적으로 무기력합니다. 고난은 불결한 것만 제거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청결함을 줍니다.

6. 결론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고난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로 고난당하기보다 고난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진리를 활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타락으로 사회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세상은 진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곧, 비진리의 세상 속에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고난당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 들어가 민주주의를 선포하는 것 이상으로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일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언제나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세상이 전복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뉴노멀’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정상과 비정상이 전복되었습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 한 편에는 이 위기가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정상으로 복귀하기 원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고, 마스크도 벗고 싶어 합니다. ‘집단 면역’만이 살 길이고, 집단면역이 가능할 때만 정상으로 복귀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는 백신 주사를 맞느라 한창입니다.
이 사태를 영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도대체 영적으로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요? 저는 시간에 길들여진 삶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영원에 길들여진 삶을 살 때만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한, 시간적인 것에 길들여진 일반 대중들이 이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삶에서 ‘뉴노멀’이란 영원에 길들여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코로나 사태는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위기가 지나가길 바라지만, 영적인 위기는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코로나는 집단 면역으로 돌파할 수 있는 반면, 이런 영적인 위기에는 백신 같은 것은 존재할 수도 없고, 집단 면역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 각 개인이 영원의 도움으로 주어진 매 순간을 견딜 때만, 삶을 살아낼 때에만, 시간을 성화하고 영원을 얻습니다.
쇠얀 키르케고르
19세기 기독교 사상사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헤겔과 함께 종교 철학자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기독교 가정에서 7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신학을 하는데 반감이 컸던 그는 방황하다가 1840년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841년, 철학 박사학위 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 본 아이러니의 개념>을 발표하고, 연인 레기네 올젠과 파혼한다. 그 영향으로 1843년『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썼으며, 그후『반복』,『 두려움과 떨림』 등을 출간한다.
1844년에 발표한 심리학을 다룬『불안의 개념』, 소크라테스와 역설적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적 단편』이 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스파이’라고 고백한 그는 기독교 정신에 귀기울이면서 실존하는 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였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1846년, 가명의 저서『철학의 부스러기』 또『철학적 부스러기에 대한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가 있으며, 그밖에 기독교의 본질을 각인시키는『사랑의 역사(役事)』,『그리스도교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 『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함께 읽어야 할 유고집『스스로 판단하라』 등이 있다. 그는 1855년 42살의 나이로 프레데릭 병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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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20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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