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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TS 기독교 영성 선집 시리즈 세트(전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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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박해시기의 묵상집으로 당시 고난 당하는 가톨릭 신자들, 특히 일반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격려와 위로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후묵상>은 몇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책은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짧은 이야기와 예화를 들고 있다. 둘째, 이 세상 삶의 허무함을 예로 드는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에서 왕과 왕자에 이르는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을 인용했다. 셋째, 당대 박해로 인한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듯, 글 전체가 내세와 심판을 또렷하게 강조하고 있다. <사후묵상>이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9세기에 유독 내세와 죽음에 대한 묵상집이 조선 기독교인들에 의해 많이 만들어졌다는 자체가 암담했을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웅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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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위계》는 성경에 등장하는 각종 천사들을 아홉 종류로 정리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이고 체계적인 해석을 부여한 디오니시우스의 대표적인 책이다. 특히 이 책의 1-3장은 디오니시우스 사상 전체의 근간이 되는 신학적 개념을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중요하게 사용한 상징,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위계, 발현과 회귀, 은폐성, 단순성과 다수성 같은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천상의 위계》는 중세 천사론과 교회 내부의 위계, 그리고 봉건적 사회조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 까닭은 무엇보다 내용이 난해하고, 그가 직접 고안한 신조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철학적 개념을 동방과 서방 기독교를 넘나드는 신학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1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천상의 위계》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서론, 천사의 위계에 대한 설명, 구체적인 질문들. 아래 제시한 목차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이세종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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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배출된 신앙인들의 삶과 글, 그리고 묵상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KIATS 기독교 영성 선집」시리즈 제3권 『이세종의 명상 100가지』.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이세종의 생애를 소설적 형태로 재구성한 전기다. 이 부분은 이세종의 성장과 결혼, 회심과 영적인 삶, 성경에 대한 입장, 제자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루었다. 둘째 부분은 이세종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를 독자가 개인적으로 명상할 수 있도록 구성한 선집이다. 이 부분은 다시 이세종의 짧은 경구들을 모은 잠언, 성경 말씀에 기초한 설교, 그리고 그의 삶의 일면을 보여 주는 짧은 이야기로 나뉜다.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배출된 신앙인들의 삶과 글, 그리고 묵상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KIATS 기독교 영성 선집」시리즈 제4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이 책은 중세 최고의 수도원 영성 신학자가 인간이 하나님이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 자세를 가르쳐 준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중세 수도원에서의 삶과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랑 개념은 <아가>와 <시편>을 중심으로 한 성경 해석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의 실천적인 삶과 신학적 이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6세기 개신교의 등장 이래 진행된 종교에 대한 합리성과 이성의 도전으로 인해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나 ‘소망’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인들,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 역시 사랑보다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인 믿음에서는 성공을 이루었지만 타인과 사회에 대한 배려와 사랑 문제에서는 실패했다는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각박한 현대문명, 위기에 봉착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강조를 회복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베르나르의 글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배출된 신앙인들의 삶과 글, 그리고 묵상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KIATS 기독교 영성 선집」시리즈 제5권 『소록도』. 이 책은 기도로 하늘 보좌를 움직인 이 땅의 가장 작은 자들의 삶과 신앙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회자될 만한 독특한 신앙적인 유산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최근 적지 않게 고전하고 있다. 가난의 진정한 의미, 가난한 자를 안고 기도하는 예수의 심정, 이 사회 가장 작은 자들에게 내려가라 하신 예수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록도 성도들의 눈물겨운 신앙 이야기와 희망의 기도는 한국 기독교와 민족에 새로운 도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세워진 소록도 교회, 온갖 억압과 박해를 뚫고 솟아난 신앙유산, 부자유스러운 몸과 육신을 뛰어 넘어 균등한 기도의 기회를 얻어 하나님의 마음을 자유롭게 오가는 소록도 성도들의 새벽기도, 그 해맑은 미소와 찬송소리는 진정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일깨우는 부흥의 힘을 가지고 있다. 소록도 성도들의 기도와 찬송소리를 통해 갈릴리의 희망과 가슴 벅찬 도전을 느끼기를 소망한다.
11,000 → 9,9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550
KIATS ‘기독교 영성선집’으로 출간된 여섯 번째 책으로. 영국의 여성 은둔 수도자인 노르위치 줄리안의 강렬한 영적인 체험과 명상을 담고 있다. 줄리안의 《계시》는 ‘짧은 본문’Short Text과 ‘긴 본문’Long Text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짧은 본문’은 25장, ‘긴 본문’은 총 8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짧은 본문’이 계시가 일어났던 실제 정황들에 대한 묘사나 자기 개인에 대한 언급을 간간이 담고 있는 것에 비해, ‘긴 본문’은 보다 깊은 신학적인 성찰과 명상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줄리안의 핵심 메시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돌보심이라는 사랑과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긍정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돌보신다는 것과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는 전인격적 신뢰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All will be well라는 확신을 일종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견고하게 유지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오늘날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 속에서 지친 이들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에 대한 줄리안의 확언이 절실히 필요하다. 현대의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서 벗어나 영적 세계의 진실을 깊이 묵상한다면 더욱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11,000 → 9,9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550
KIATS ‘기독교 영성선집’으로 출간된 이 책은 에바그리우스와 관련해 독자들이 즐겨 읽는 세편의 글을 담았다: 《기도》,《프락티코스: 100개의 실천적 수련에 관한 묵상》,《수도사들에 대한 권면》. 이 책들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연상시키듯이, 모두 간결하고 함축적인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짧은 글을 통해 영적인 삶과 진보, 그리고 실제적인 가르침과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가르침은 오리게누스의 체계적이고 지적인 신학이해와 이집트 사막에서의 풍부한 영적 체험과 실천적 전통을 통합하고 있다. 짧지만 묵직한 이러한 금언을 통해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동-서방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깊은 영적 통찰력과 인간에 대한 심리적 이해를 포함한 전-인간적인 신학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진지한 구도자의 삶을 깊게 느낄 수 있다.
14,000 → 12,600원 (10.0%↓) 무료배송 상품입니다.소득공제도서정가제700
베네딕트의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는 기독교 영성의 고전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작품은 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c.480-c.547)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리고 이 규칙서는 지난 1500여 년 동안 수도원 안팎에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고, 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베네딕트의 규칙서》가 기독교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기록 목적과 규칙의 유연성이 중심적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규칙’을 뜻하는 라틴어 ‘레귤라Regula’는 여행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길의 울타리,’ 또는 ‘행동과 삶의 잣대’를 의미한다. 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사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딱딱한 규범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영성생활을 통해 천국을 향한 수도사들의 영적 여정을 안내하기 위한 이정표와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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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TS ‘기독교 영성선집’으로 출간된 이 책은 초대 기독교 시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바울과 테클라행전》,《성 페르페투아와 성 펠리시타스의 수난》,《성 마크리나의 생애》.《마리아 복음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네 편의 글들을 통해 여성들이 박해와 금욕으로 대변되는 초기 기독교 형성기에 여느 남성 지도자 못지 않는 지도력과 영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수제자 테클라는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하는 사도로, 마리아는 신적인 계시를 전달하는 중심 통로로, 페르페투아는 순교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경기장에서 여느 남성 전투사 못지않은 여성으로, 마크리나는 초대 기독교의 교리와 수도원 규칙 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그레고리우스 가문과 갑바도기아 신학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맏이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 작품들을 통해 1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시대의 초대교회의 여성들의 삶과 활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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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36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사막의 교부, 수도자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해 쓴 책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살던 당시에는 기독교의 핵심 신학적 교리와 고백들이 차분히 정리되지 못했던 터라 황제의 정치·종교적 관심사에 따라 정통과 이단의 운명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기도 했다. 그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의 부침도 잦았고,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다섯 번이나 자신의 주교직에서 쫓겨났고, 심지어 17년 어간을 자신의 교구 밖에서 맴돌아야 했다. 이러한 사막의 유배생활을 통해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에 관련된 증언들을 모을 수 있었고 안토니우스 같은 수도자의 삶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이 책을 펴낸 것이다.
이 책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치열한 영적 투쟁과 금욕주의적 수행의 오랜 삶을 거친 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모한 안토니우스의 몸과 영혼의 상태를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사들의 원형인 안토니우스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 즉 ‘비르 데이’vir Dei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안토니우스의 성결한 삶은 바로 육화된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잘 드러내는 좋은 모델이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325년에 정리된 니케아 신앙-그리스도가 인성과 함께 신성을 갖고 있다는 신앙-을 한 인물로서 구현하고 있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문학이자 소중한 자료이다.
이현필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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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지만 풋풋한 영성을 추구한 한국의 프란시스, 이현필(1913.1.28.-1964.3.18.)

번영과 위기의 시대에 느끼는 영적 목마름
잠시도 지치지 않고 영원히 성장할 것 같았던 한국교회가 21세기 들어 주춤거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팽창과 삶의 양태가 변한 것도 있지만, 건축과 온갖 프로그램, 돈과 권력, 세습에 함몰된 채로 내적인 성장과 쇄신을 놓쳐버린 한국교회 자체가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 흔히 말하는 ‘맘몬, 권력, 핏줄 이데올로기’에 더해진 도덕적 불감증은 기독교가 사회의 상식과 중심축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현재 한국기독교의 운영체계나 의식으로는 이 시대에 걸맞는 종교적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외양에 대한 치중과 인습화된 신앙행태가 싫다고 신앙의 본질과 예수에 대한 신앙마저 떠날 수 없는 이들은 예수처럼 살다 간 역사 속의 영적인 지도자들과 신앙의 본보기들을 찾아 나선다. 물질적 번영과 영적 위기를 타개할 영적 목마름과 갈구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성경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이현필, 한국의 프란시스
손양원, 엘리자베스 쉐핑, 문준경, 스코필드, 손정도…. 최근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사표로 주목하는 이름들이다. 이 중에서 맨발로 지리산의 눈길을 걸으며 제자들을 돌보았던, 예수처럼 살고자 몸부림친 이현필 선생을 사람들은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프란시스’라 부른다.
어떻게 해야 예수를 제대로, 진짜로 믿는 것일까?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막의 수도사처럼 ‘복음듣기’가 아닌 ‘복음살이’를 어떻게 실천해 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참된 영적인 스승과 모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현필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영적 구도자들에게 소중한 울림을 준다. 이현필의 삶과 핵심 가르침, 그의 저작 전반과 글의 특징에 대하여는 2014년 간행한 《풍요의 시대에 다시 찾는 영적 스승 이현필》(한국기독교지도자작품선집KCLS Vol. 15)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에필로그는 우리의 영성선집을 좀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현필이 누구인가를 간략히 설명하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화순 도암, 영산포 경험, 그리고 기독교 입문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던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이현필은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만 다녀야 했다. 생계를 위해 영산포에서 닭장사를 비롯한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는 1925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예수를 만났다. 우치무라 간조(?村鑑三)를 추종하던 전도인을 통해 예수를 만난 그는 십 대 초반에 주일학교교사로 섬길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가 14살 때 만난 천태산의 도인 이세종은 그에게 평생 스승의 역할을 했다. “빈 껍데기”를 뜻하는 이공(李空)이란 이름을 가진 이세종은 화순에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선 못쓴다.”고 가르치며, 3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현필의 신앙의 얼개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최흥종, 강순명, 애비슨(Gordon W. Avison), 백춘성과 교류하며 광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고, 광주농업실수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지기들을 만나고
서울로 올라온 이현필은 2년 어간 YMCA기숙사에서 지내며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시대를 읽어내는 훈련을 했다. 또한 평생 동지가 된 풀무원의 설립자 원경선, 서울YMCA의 현동완 총무, 다석 유영모 등을 만났다. 후에 정기적으로 남원에 내려와 성경강의를 한 유영모와의 깊은 교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현교회 ‘거지목사’ 김현봉은 이현필에게 신앙인과 종교지도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시대가 힘들었지만, ‘작은 성자’들은 시대를 영적으로 떠받치는 지주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보통 크기와 숫자에 열광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삶으로 생명을 담보해내는 작은 성자들의 힘이다.

‘죄인 됨의 의식’-화순, 남원, 광주의 영적 보금자리
스승 이세종의 독신에 대한 조언과 달리 이현필은 1938년 광주에서 황홍윤과 결혼을 하고 화순 도암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3년 후 아내가 자궁외임신으로 극한 어려움을 겪고서야 아내와 결혼을 무효화하는 ‘해혼’(解婚)을 선언했다. 이후 2년 어간을 도암면 문바위에서의 영성훈련을 통해 ‘죄인 됨의 의식’을 다지면서 본격적인 영적 지도자로 탈바꿈하였다.
이현필은 30세가 되던 1943년부터 남원 삼일목공소에서 성경강해를 시작하며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 갔다. 남원을 중심으로 이름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성경공부와 수도생활을 했다. 참된 신앙을 갈구하던 이들이 이현필을 따랐고, 이들은 영적인 위안과 함께 시대를 억누르던 일제신사참배를 피할 수 있었다.
1948년에 터를 광주 방림동으로 옮긴 이현필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1950년 1월에 ‘동방의 햇빛으로 빛나는 동산’을 뜻하는 동광원을 설립하고 고아와 걸인과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 되어 사는 공동체’를 뜻하는 귀일원 역시 벙어리 수도를 하던 이현필이 “곧 나가서 광주역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고 하룻밤을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라는 가르침을 광주YMCA 총무 정인세에게 주면서 시작되었다. 귀일원은 이현필 사후인 1965년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되었고, 수도 공동체인 ‘기독교동광원수도회’는 1980년에 남원 대산면 운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자”
결핵 환자를 돌보다 속립성 결핵에 걸린 이현필은 병으로 고생이 많았다. 그는 평생 자신의 육신을 돌볼 겨를 없이 수많은 질병에 노출되어 살아왔다. 1964년 1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는 퇴원하여 공동체의 총회를 열고 한 끼에 1원을 모아 작은 선행을 행하자는 소위 ‘1작 운동’을 제안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이 곧 성경에 나오는 소자에게 물 한잔을 떠 주는 일이며, 이 운동이 한국을 자주국가로 만들고 세계 평화를 이끌 것이라 믿었다. 서울 한복판 종로거리에서 청결한 삶과 가난한 삶을 외치며 죽고 싶다던 이현필은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경, 그의 나이 51세에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오 기쁘다.” 이현필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소명감과 열정으로 끝까지 예수를 따른 이현필
대단히 명석한 천재도, 명필가도 아닌 이현필. 그가 살던 시대와 사후 60년이 넘도록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를 따르는 이들의 한결같은 겸손한 예의, 엄격한 남녀 간의 순결, 늘 무릎을 꿇고 질서 있게 앉는 모습, 독실한 신앙과 이웃사랑,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혼의 노래는 도대체 이현필의 어떤 면모와 영성의 자태에서 발현된 것일까? 아마 그것은 동광원의 핵심 가치로 지금까지 자리한 순결, 청빈, 순명, 깨끗한 사랑과 교제, 자급자족의 노동과 봉사라는 정신과 삶 때문일 것이다.
독신: “육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영혼의 기쁨이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김금남)
청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영성은 죽는다” (이현필)
순명: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이현필)


▶이 책의 구성

이현필이 직접 남긴 글들과 제자들이 반복해서 등사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현재 남원 동광원에 보관되어 있다. 낱장으로 된 자료 외에 대부분의 작품은 대학노트 크기에 펜이나 연필로 적은 글들이다. 노트마다 동광원에서 “등록”, 혹은 “관리”라는 이름을 붙여 자료에 번호를 매겨 두었다. 키아츠가 이 자료들을 접한 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키아츠 영성선집’으로 새롭게 출간한 이번 책은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시집 형태로 편집하였다. 특별히 이현필의 글 중에서 <수상편지>, <제자훈련>, <제자훈련 완덕의 길>, <설교필사본 1>, <설교필사본 2>의 글을 선별해 수록하였다.
예를 들어, <수상편지>[등록 6, 관리 1-8]에는 겸손함과 회개를 강조하며 가난과 고난을 찬양하는 글이 반복되며, <설교필사본 1>[노트 20, 3-1(1968)]과 <설교필사본 2>[노트 21, 3-2(1968)]에는 팔복과 삭개오 이야기 등 성경을 풀이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복음서의 말씀과 관련된 글이 많은 편이고, 특별히 인격완성의 필요성과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훈련 완덕의 길>[등록 26, 관리 6-6]에서는 ‘자신의 행실, 겉모양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또한 ‘물속에 잠기듯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참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밖에도 회개와 자복에 대한 글,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교훈, 일을 할 때 주의할 점 등 다양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 <제자훈련>[등록 22, 관리 6-2(1970)]에는 정절의 귀중함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정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들이 많다. <제자훈련>, <제자훈련 완덕의 길>의 중간에 성경 말씀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이현필의 가르침과 글이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다시 타는 목마름으로
인생이라는 강물도 시간이 지나면 유유히 흘러가고 시들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은 영원하다. 비록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건물과 권력과 돈과 폼 잡는 외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현필 같은 작은 영성가들이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참된 예수쟁이들이 시대가 지나도 여전히 이 땅 곳곳에서 솟아나길 기대한다. 이 시대에 오히려 새로운 주류가 되어 버릴 수 있는 ‘영적 가나안들’이나 매주 교회에 나가면서도 끝없이 타오르는 영적 목마름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이 작은 책이 참된 오아시스가 되길 소망해 본다.
그러한 염원을 담아 쉽지 않은 이현필의 글을 조금은 읽기 쉽게 만들어 보았다. 이 책을 매개로 우리가 2014년에 편찬한 《풍요의 시대에 다시 찾는 영적 스승 이현필》도 접하고, 그의 영적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화순과 남원과 광주와 벽제에도 한번 찾아 떠나 보았으면 한다.
김재현, 키아츠 원장
화천의 농부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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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출신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성 요한이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의 아이콘 숭배를 금한 법령에 반박하여 쓴 하나님의 성상에 대한 세 편의 논문 묶음집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나 성경의 인물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상에 종종 등장했다. 무엇보다 대중들의 교육열이 낮은 지역에서 그림과 조각과 아이콘은 글이나 문자보다 더 교육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아이콘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시각적 효과가 읽고 이해하는 글보다 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십계명 제2계명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절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경계석과 부담이 되었다.

이 책에서 성 요한은 많은 초대교부들의 글을 인용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거룩한 이미지나 아이콘을 통해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예시로 설명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하나님 또는 성인들의 성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공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당대 최고의 신학자는 왜 레오 황제에 의해 손목이 잘렸을까?
- 다마스쿠스의 요한, 아이콘 논쟁의 한 중심에 섰던 그의 생애와 시대

비잔틴기독교와 아이콘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틴기독교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는 나무에 새겨진 거룩한 이미지의 그림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그러한 이미지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사도들과 성인들의 얼굴을 담고 있다. 아이콘(이콘, icon)이라 불리는 그런 이미지는 단면, 양날개까지 가진 3면, 혹은 훨씬 더 정교하고 다양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기독교에 존재하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인식적 거리를 생각할 때, 비잔틴 기독교는 우리에게 더욱 생경할 수 있다.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향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비잔틴 찬송, 주로 서서 드리는 예배, 예배당을 들어오는 사람들이 아이콘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는 모습은 때론 어색하기도 하다.
유대-이스라엘 종교적 토대에서 출발한 기독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시대와 지형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전 세계로 전 방위적으로 퍼져왔다. 오랜 세월 각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면서, 크게는 로마가톨릭, 개신교, 비잔틴기독교 세 종파로 나누어지지만, 각 전통 안에서 지역과 민족과 소속단체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다. 이는 예배 의식에서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용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로마기독교가 석조건물과 돌로 만든 조상을 발전시킨 반면, 비잔틴기독교는 건물에 직접 그린 벽화와 아이콘을 발전시켜 왔다. 이중 아이콘은 비잔틴기독교를 대표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해 왔다. 사실, 아이콘은 8-9세기 서방과 동방 기독교 세계의 핵심주제였고,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중 두 번의 공의회에서 중심 주제로 다루어질 정도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했다. 이 에필로그에서는 비잔틴기독교의 역사와 이 논쟁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다마스쿠스의 요한(675년 또는 676년-749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주제와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학자요 수도자가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그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요한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635년에 다마스쿠스가 비교적 상처를 입지 않고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 만수르(Mansour ibn Sarjun)는 지역의 세금관리자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존 만수르(Mansour ibn Sarjun) 역시 세습이 가능한 궁정의 세금관리자로 살면서, 아들 존에게 비교적 다양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요한의 집안이 아랍 출신의 시리아 기독교 가족이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요한은 시칠리아의 고아 출신인 코스마스(Cosmas)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같이 교육을 받았다. 요한은 그의 나이 만 50세 어간이던 725년에 아버지의 직을 이어 일하던 궁정에서 사직하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인근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르사바(Mar Saba) 수도원에 안착했고, 이후 735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법과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수도생활과 작품활동에 전념했고, 교회 예전에 쓰이는 찬송가 작곡가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쓴 찬송가는 지금도 부활절에 비잔틴기독교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마르사바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요한이 725년 예루살렘 인근 마르사바에 정착했지만, 그의 평온한 수도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후인 726년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the Isauria, 717-741)가 아이콘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레오 3세의 법령에 반대해 바로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라는 세 편의 논문을 쓰면서, 아이콘 논쟁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흥미롭게도 요한이 머물고 있는 마르 사바는 다마스쿠스에서 멀지 않았지만 레오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고,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던 칼리프의 통치영역에 속해 있었다. 대중들에게 점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요한을 제거하기 위해 황제는 가짜 편지를 꾸며 칼리프에게 보내기도 했다. 황제가 위조한 편지는 요한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어서 칼리프가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개의 손”
요한은 어느 날 자신이 고문을 맡았던 다마스쿠스의 군주인 칼리프의 급한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칼리프는 할아버지 시대부터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다마스쿠스에서 고위 재정관리를 세습해 맡아오면서 기독교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요한이 어떻게 다마스쿠스 전복 음모를 꾸밀 수 있느냐는 서슬 퍼런 호통을 쳤다. 레오 3세 황제가 위조한 편지를 던져주면서, 칼리프는 반역 음모죄로 지체 없이 요한의 오른쪽 팔목을 잘라 시장에 걸어두고 이를 만인들에게 보여 경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요한이 죽지 않은 것만 해도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은덕이었다.
이렇게 손목이 잘린 요한의 이야기는 이후 하나의 흥미로운 성인전(Hagiography)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세 개의 손”이란 작품이 그 결과이다. 예기치 않은 사건 전개로 충격을 받은 요한은 잘린 손을 몸에 붙여 들고 이웃에 있는 성모상 앞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놀랍게도 손목이 다시 원래 상태로 회복되어, 잘린 손목 부분에 붉은 선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기적적인 회복사건을 경
험한 요한은 은으로 손을 만들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성모의 성화에 붙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세 개의 손을 가진” 성화, 즉 “Tricheirousa”가 만들어졌다.

아이콘
요한의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라는 책은 당대 아이콘 논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나 성경의 인물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상에 종종 등장했다. 서방과 동방에서 아이콘을 비롯한 이런 상징물은 당대 문화적 상황 때문에 옹호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중들의 교육열이 낮은 지역에서 그림과 조각과 아이콘은 글이나 문자보다 더 교육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아이콘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시각적 효과가 읽고 이해하는 글보다 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십계명 제2계명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절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경계석과 부담이 되었다. 특히 이 시대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서쪽과 북쪽으로 진격해 오던 이슬람 세력이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던 상황도 성상과 관련해 기독교인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726년에 황제 레오가 내린 아이콘 숭배 금지는 에게해의 화산폭발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아이콘을 비롯한 성상 파괴 명령은 730년에 공포되었다. 이때부터 아이콘, 모자이크, 각종 형상을 금지하는 칙령이 강력하게 적용되었고, 이를 따르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의 활동도 급증했다.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
레오 3세의 직접적인 관할영역을 벗어나 있던 요한이 자신의 입장을 담아 대중들에게 전한 세 편의 논문이 바로 우리가 번역 출간하는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하나님 성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항한 3개의 변증》이라는 책이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중심적인 것만 지적하려 한다.
첫째, 요한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아이콘은 경배(λατρε?α, adoration)되어서는 안 되지만, 공경(προσκνησι?, honor)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경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성상을 공경한다. 그것은 물질에 공경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상에서 사용되는 물질을 통하여 보여지는 분들에게 공경을 드리는 것이다. 성 바실리우스가 말하듯이, 성상에 드려지는 공경은 모두 그 원형으로 이전된다.[41번]”
둘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거룩한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성육신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드러내 주었기 때문에, 이후에 인간이 예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이나 다양한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더이상 신성모독이 아니다.
셋째, 자기 자신의 주장을 서술한 후에, 바실리우스 등을 포함한 많은 초대교부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증을 강화했다. 초대와 중세기독교 신학자들이 즐겨 의존한 교부들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와 함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강력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넷째, 요한의 논증은 결코 쉽지않은 이 주제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주면서 단순하게 설명해 준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었다. 요한이 죽은 이후 성상 문제로 10만 명 정도가 죽임을 당하거나 사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1890년에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로마교황청에 의해 신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아이콘 논쟁, 레오 3세에서 여성황제 이레네까지
콘스탄티노플 황실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대 상황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과 성인들의 거룩한 이미지를 공경하는 것을 이단이라 주장하면서 이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이 황실 내부로 포진했다. 레오 3세는 전임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교부들과 성인들을 그린 어떠한 상이라도 파괴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성 게르마누스(St. Germanus)는 적극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인근에 있던 요한에게 주목했다. 요한이 나서서 황제의 칙령에 반대하는 신학적인 글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요한은 〈거룩한 이미지들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법적 논문들〉이라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일까? 이는 그를 당장 유명인사로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요한을 “다마스쿠스를 흐르는 황금의 강” 즉 황금 시인과 문인으로 칭송했다.

비잔틴제국과 기독교의 갈림길에 선 황제, 레오 3세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와 문화적 황금기는 유스티아누스 1세(Justianus I, 481-565) 시절이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스티아누스 법전》(Codex Justianus)의 주역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세계적인 종교건축물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건립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의 힘없는 몰락과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목격한 비잔틴제국은 군인양성에 보다 많은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양성한 군인들은 이후 정치적인 쿠데타와 전복을 일삼았고, 비대해진 군인 지도력은 일반 국민들을 진절머리나게 했다. 어찌 보면 이러한 혼란의 종지부를 일시적으로 찍어준 사람이 바로 레오 3세였다.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는 유스티아누스 1세 이후 거듭된 군부 출신 황제들로 인한 혼란과 거침없이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던 시대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전임 황제 테오도시오스 3세(Theodosius Ⅲ, 재위 715-717)를 강제로 퇴위시키기 위해 레오 3세는 협상과 위협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717년 마침내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이때만 해도 그가 단명 황제가 되느냐, 아니면 지지부진한 비잔틴의 자존심을 회복해 주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다.
레오 3세가 논란 끝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그해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틴제국이 큰 위험을 직면하던 때이다. 이슬람의 8만 대군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바다와 육로를 통해 포위했다. 이곳을 이슬람에게 넘겨주면 바로 유럽의 옆구리에 좋은 침략의 비단 길목을 깔아주는 형국이었다. 임진왜란 시절 우리가 일본에 굴복했다면, 일본은 그 비단길을 고즈넉이 밟고 중국으로 향했을 상황과 같았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동안 서방기독교와 이슬람제국 사이의 완충역할 역시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3세는 1년 어간을 견디며, 결국 이슬람의 진출을 저지했다. 결과적으로 레오 3세의 용단과 저항 기질이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확장을 막았고, 그는 이후 100여 년에 걸친 이사우리아 제국시기(717-802)를 열었다. 지금까지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을 제거한 그는 심지어 병으로 죽기 직전인 740년 아크로이온 전투에서 승리해 비잔틴과 이슬람 사이의 전투에 잠시 종지부를 찍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안정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성상파괴론, 왜 레오 3세는 기독교권에서 그리 욕을 먹었을까?
군부를 통제하면서 정치적 승리를 얻어낸 레오는 종교적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서방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벽화와 아이콘 문화가 발전한 비잔틴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성인과 교부들에 대한 존경은 예술적 표현을 통해 종종 숭배의 경지까지 가곤 했다. 모든 종교의 발전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좋은 의미로 시작된 것에 주술적이고 샤머니즘적 옷이 입혀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거룩한 이미지’들은 성인숭배와 경배의 수준까지 가버린 경우가 사실 많았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가던 레오 3세는 이런 상황에서 ‘성상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방기독교가 성상숭배에 엄격히 반대하고, 비잔틴기독교는 이를 처음부터 옹호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이 시기 로마기독교라고 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신학적 담론이나 사상이 정교하게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도 긴 시간이 서방기독교뿐만 아니라 비잔틴기독교에서 필요했다.
레오의 성상금지 칙령에 당시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Ⅱ, 재위 715-731)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라벤나 지역을 통해 반 비잔틴 황제, 실정법에 따르면 역적과 반역에 해당되는 봉기를 부추기기도 했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 아직도 다섯 곳의 총대주교들이 기독교 세계를 분점해 리더십을 발휘하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베니스(베네치아)를 비롯한 로마의 기독교 상황이 보여주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방과 서방의 경계선이 아직은 모호했다.
서방기독교의 격렬한 반응과 레오 황제의 결정은 비잔틴과 로마의 치열한 논쟁과 공격뿐만 아니라 비잔틴제국 내에서도 찬반논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웅이 되고 손목이 잘린 사람이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레오 3세에 대한 평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역할은 이슬람 세력을 잠시 주춤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24년간의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성상문제는 다른 모든 것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방에 비해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비잔틴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 레오 3세는 황제 즉위 24년인 741년에 병에 걸려 죽었고, 그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V, 재위 731-775)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더 극렬하게 성상 파괴를 실행했다. 이후에 짧게는 787년 제2차 니케아공의회까지 성상파괴문제는 가장 중심적인 정치-종교적 화두로 자리했다. 바로 그 출발점에 레오 3세가 있었다.
레오 3세의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제국인 로마가 동과 서로 나누어지면서 점차 멀어졌는데, 성상 문제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중단기적으로 300년쯤 후에는 서방기독교와 비잔틴기독교가 분리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리고 1453년 로마기독교로의 환원이라는 서방의 조건부 지원에 반발하여, 동로마 제국의 문은 닫혔다.

다섯 곳의 총대주교 시스템
지금처럼 기독교가 로마가톨릭, 개신교, 비잔틴기독교 등으로 구별되기 전에 기독교권 전반에서 Catholic(universal, 보편적인) Faith(소문자 catholic이 아님)를 고백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계적으로 하나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다섯 곳의 교회 수장들이 총대주교라는 이름으로 주요신학과 신앙의 모본들을 체계화해 나갔다. 초기 기독교와 중세 초기 기독교의 주요한 의제들은 이런 공의회들을 통해 하나둘씩 정립되었다. 비록 때론 정치와 종교가 버무려져서 말이다.

5곳의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은 곳들에 위치해있었다.
- 베드로의 전통성과 수장권을 강조한 로마 총대주교(교황)
- 서로마 몰락 이후 실질적인 권력 기반을 가진 콘스탄티노플
- 초대교회와 초대수도원운동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 신,구약/이슬람 세력의 중심지 예루살렘
- 갑바도기아 신학의 핵심지역 안티오키아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이슬람 세력이 급격히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소아시아를 공격하고 점령하기 전까지 다섯 개의 총대주교 시스템이 나름 정상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이후에도 각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들이 참여하거나 의견을 표명해 회의를 열고 주요의제를 정리해 나갔다.
광대한 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인 회의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다. 예수의 신성보다 인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하면서 소집된 제1차 회의부터 총 일곱 번의 공의회가 서방과 동방의 교회를 비롯한 보편적인 기독교의 회의로 자리해 왔다.

제1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년)
제2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
제3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에페소스공의회(431년)
제4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칼케돈공의회(451년)
제5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553년)
제6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680-681년)
제7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

이 회의들을 통해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오늘날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학적인 논쟁으로 가다듬어 온 결과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곧 다시 오신다는 예수의 재림은 소식이 금방 없었고, 신앙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제기한 각종 문제는 대답을 기다렸고, 교회는 이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했다. 시대에 대한 대답은 325년부터 787년까지 열린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공의회를 통해 주어졌고, 이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이슈들을 보편적 회의를 통해 집대성하고 정리해 나갔다.
모든 교회가 수용하고 인정한 일곱 번의 공의회가 모두 비잔틴 제국의 영토에서 열렸다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로마의 몰락 이후 비잔티움의 전개에 우리 개신교인들이 다소 무지하다는 지적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회의와 공의회라 이름을 붙일만한 회의가 많이 열렸지만, 더이상 동방과 서방교회들이 연합해 추인할 상황이 아니었다. 언어의 차이, 지역의 광대함, 신앙행태와 문화의 선호도 차이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신앙’(One Faith)를 고백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었다.

레오 3세와 콘스탄티누스 5세의 반격도 막을 내리고…
서로마제국의 몰락의 여파는 컸다. 하지만, ‘로마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언덕’을 넘어서는 로마교회의 수장권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제 막 태동하던 서유럽 형성기에 기독교는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가고 있었다. 비록 비잔틴제국의 권력은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군벌과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슬람의 군사적 위협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막아내면서 비잔티움을 지켜낸 황제 레오 3세는 성상금지라는 종교적 악수를 두었다. 그가 시작한 종교적 혼란은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숫자의 종교적 순교자를 만들어 내었다.
775년 콘스탄티누스 5세가 죽고 나서야, 그의 후계자 레오 4세(재위 775-779)가 즉위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그의 아내 이레네(Irene)는 성상을 옹호했던 여인이었고, 레오 4세가 즉위 5년만에 병사하고, 10살밖에 되지 않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6세로 즉위하자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쉽게 말해 이제 전설적인 여자 황제 이레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레네 황후의 정치력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배경 삼아 섭정과 함께 권력을 쥐기 시작한 황후 이레네는 기존교회가 지켜온 에큐메니칼공의회의 장점을 활용하려 했다. 그녀는 먼저 로마교황 측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를 썼고, 서유럽 권력의 정점으로 달리고 있던 카를 대제와 혼인척을 맺기 위해 고민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레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와 카를 대제의 딸과의 결혼은 그런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성상파괴를 옹호했다가 사임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자리에 자신의 비서 출신 타라시우스(Tharasius)를 급조해 총대주교의 자리에 앉혔다. 이레네의 종교적 정치적 술수를 잘 보여준 은밀하지만 치열한 싸움이었다.

제7차 에큐메니칼공의회(787년 9월과 10월)
786년에 시도한 제7차 공의회는 성상자체를 반대하는 군인들의 회의장 난입사건으로 1년 연기되어, 787년 가을에 마침내 개최되었다. 새롭게 건축된 성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개최된 공의회였다.
9월 24일 로마교황의 사절단을 비롯한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타르시우스가 공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3주에 걸쳐 여덟 차례 회의를 진행한 이 공의회는 마지막 8차를 제외하고 모두 성소피아 성당에서 열렸다.
이때 같이 규정된 22개의 교회생활 규율은 당대 교회 권력의 문제를 살짝 엿보게 해준다. 바로 한 구절 한 구절이 당대 기독교뿐만 아니라, 중세기독교 전체의 화두가 되었다.
- 세속권력은 주교, 사제, 부제를 임명하지 못한다.
- 주교는 아래 있는 성직자들에게 돈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 성당마다 유해를 모셔야 하며, 유해가 없이는 축성하지 못한다.
- 성직자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교구를 떠날 수 없고,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해서 안 된다.
- 주교나 수도원장은 교회 재산을 세속권력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

이레네의 삶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7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이로써 726년 레오 3세의 회의 소집과 함께 불기 시작한 성상관련 억압과 박해의 광풍은 일단락 되었다. 7차 공의회 참석자들이 기존 회의록을 읽고 이를 거부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이다. 레오 3세가 그렇게 강조한 성상숭배금지 법령은 폐지되어, 이제는 성상을 만들고 공경하는 것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인 성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에 대한 흠숭을 구별했다. 이 회의는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여전히 종교적,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논의의 신학적 기초는 다름 아닌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무대의 기획자는 비잔틴제국 최초의 여성 황제 이레네였다. 하지만 아들의 눈알까지 빼버린 이레네의 본 모습을 볼 시간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아직은 이레나가 카를 대제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야심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다마스쿠스의 논쟁은 이 공의회로 일단락되었다. 명예회복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레네에게는 이 공의회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이런 맥락을 염두하고 본 작품을 읽는다면, 한층 더 진지하게 그 내용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짧지만 깊은 감사의 말 추가
다양한 비잔틴기독교의 자료를 접하게 해 준 하버드대학과 연관된 덤바턴 오크스 도서관(Dumbarton Oaks Library)에 감사를 표한다. 본 한글 번역과 편집작업은 오랜 세월 다양한 언어로 진행되어 온 각종 자료들을 사용했으며, 성 블라디미르신학교 출판사(St. Vladinir’s Seminary Press)의 여러 번에 걸친 업데이트된 자료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13,000 → 11,7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650
힐데가르트는 두 개의 수도원의 설립자요, 비전가와 성경신학자요, 선지자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작품들을 남긴 작가요, 작곡가요, 자연과학자요, 치료자이다. 12세기 학문과 신앙적 활동에 있어서 독보적인 활동을 했던 힐데가르트는 다방면에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이번에 펴낸 <빙엔의 힐데가르트 작품선집>은 그녀의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의 일부라도 독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편집자가 소수의 글을 선택해 담았다.
이 책은 힐데가르트의 비전적인 3개의 작품들의 일부를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40년 이상이나 거듭해서 발전된 힐데가르트 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너의 길을 알라>Scivias의 “선언”은 힐데가르트의 모든 저작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이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좀더 자세히 보여주는 제1부와 그녀의 천사론을 담고 있는 6부를 추가하였다. 3부작의 두 번째인 <삶의 보상에 대한 책>Liber vitae meritorum은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침을 35개의 악과 덕에 대한 은유적인 논의로 담은 책이다. 여기서는 제1부의 서론과 첫 번째(세속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와 여섯 번째(화와 인내)의 악과 덕에 대한 논의를 담았다. 3부작의 세 번째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Liber divinorum operum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담고 있는 3번째 비전을 담았다.
그밖에 당대 최고의 영성가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자연치유의 선구자인 힐데가르트가 제안한 건강한 삶을 위한 6가지 실천적 규칙, 지금도 세계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힐데가르트의 음악의 한 측면을 맛볼 수 있는 <심포니아>Symphonia의 성가를 담았다.
힐데가르트의 많은 저작들은 인간과 우주, 신과 인간의 근원적 모습과 관계를 그려주는 상징의 힘과 원형적 이미지가 갖는 능력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은 인간 언어가 의미하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고, 인간의 영적인 감수성과 민감성과 저 깊은 마음의 바다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또한 신과 인간의 영이 만나는 접목 지점과 거기서 생겨나는 비옥함과 풍요로움과 생명을 ‘비리디타스’ viriditas(비옥함, 풍부함을 뜻하는 인간의 최상의 상태와 긍정의 힘을 나타내는 라틴어 단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이로서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해 우주에서 인간에 이르는 상호 연결된 존재들에 어떻게 풍요로움을 선물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프롤로그]

비벌리 M.킨질리Beverley M. Kienzle
(전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이번에 새로 출간되는 흥미로운 이 작품선집은 한국인 독자들에게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의 매력적이고 심오한 글들을 접하게 해줄 것입니다. 김재현 박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명석하고 부지런한 저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매우 뛰어났으며, 중세연구에 있어서 북미와 유럽의 주요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논문들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매사추세츠주의 캠브리지에서 그가 조직한 콜로키움에서 한국 학생들과 하버드 신학대학의 교수들이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원 학생 시절 김 박사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는 빙엔의 힐데가르트였습니다. 이번에 나오는 이 중요한 작품선집은 힐데가르트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힐데가르트는 두 개의 수도원의 설립자요, 비전가와 성경신학자요, 선지자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작품들을 남긴 작가요, 작곡가요, 자연과학자요, 치료자였습니다.
그녀는 여느 중세인도 쉽게 성취하지 못했던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작품들은 12세기에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와 성 빅토르의 휴(Hugh of St. Victor)와 비견될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가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이었듯이, 힐데가르트는 12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여성이었습니다.
김 박사는 힐데가르트의 크고 작은 작품들과 그녀의 신학적 주제들이 갖는 풍부함을 한국인 독자들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힐데가르트의 중요한 작품들을 골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이 책은 우선 힐데가르트의 비전적인 3개의 작품들의 일부를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40년 이상이나 거듭해서 발전된 힐데가르트 신학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너의 길을 알라>(Scivias/ Know the Ways), <삶의 보상에 대한 책>(Liber vitae meritorum/ Book of the Rewards of Life),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Liber divinorum operum/ Book of Divine Works)
첫째로, <스키비아스>에서, 힐데가르트는 1141년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놀랄만한 비전과 영적인 설명들을 성경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 설명합니다. 1158년에 또 다른 비전을 받아 <삶의 보상에 대한 책>을 발간했습니다. 당시 힐데가르트는 61세의 나이였는데, 교황청은 프레드릭 1세가 교황권에 반대해 야기한 교회의 대분열1159-1177때문에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삶의 보상에 대한 책>에서 우주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네 방향을 보고 있는데, 인간의 죄악 된 행위, 인간에게 다가올 심판을 상기시키는 것을 포함해 그녀가 본 것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35개의 악을 생기 있게 그려주고, 그들에 상응하는 처벌과 참회와 함께 악을 치료할 수 있는 덕을 보여 주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세 번째 비전적인 작품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은 1163년에 받은 강력한 비전에서 시작해 1167년 좀더 온화한 비전에 이르는 계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비전은 특히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켜 주었는데, 힐데가르트는 그 관계를 자신의 작품에서 야심차게 해석했습니다. 이번 한국어 작품선집은 이 책의 제1권의 일부를 담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신체를 지배하는 네 가지 체액들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4요소(불, 공기, 물, 흙)의 영향(열과 불, 호흡과 공기, 피와 물, 육체와 흙)을 느끼는지 기술합니다.
이러한 비전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선집은 힐데가르트의 가장 잘 알려진 편지를 선별해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광대한 서신 교환은 오늘날까지 300편 이상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교황에서 고위 성직자들, 수녀들, 수사들, 일반인들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들입니다.
<원인과 치료들>(Causae et curae, Physica)에서 선별된 개념들은 힐데가르트의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작품들로써 자연세계와 의학과 치료를 위한 자연치유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가장 잘 알려진 예전적인 찬송인 심포니아(Symphonia)에 실린 77편 중에서 이 책에 담긴 다섯 편의 노래는 시와 노래의 이미지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기독론을 잘 보여줄 것입니다. “오, 영혼의 목자시여”(O, Pastor animarum)라는 성가의 이미지와 주제는 요한복음 10장 11-16절에 기초한 두 편의 설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제가 출간한 <복음서 설교>(Expositiones evangeliorum)에서 선별해 김 박사가 한글로 번역해 담았습니다. 첫 번째 설교에서 힐데가르트는 창조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전개시키는 방식으로 구절을 해석합니다. 두 번째 설교에서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신학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덕과 악이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탁월하게 잘 선택된 본문들에 대한 한글 번역본 말미에 김 박사의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이 책은 별미로 힐데가르트의 작품과 관련된 적절한 이미지들과 유용한 타임라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이 김재현 박사가 힐데가르트의 작품에서 세심하게 선별해 번역해 아름답게 나열한 이 선집을 통해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21년 3월
미국 메사추세츠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하나님의 숨결에 휘날리는 하나의 깃털’과 같이 살다간,
하늘의 비전을 글과 삶으로 그려낸
12세기 여성 예언자, 빙엔의 힐데가르트


‘불쌍하고 어린 여성’-독일의 여자 선지자
‘독일의 여자 선지자’라 불린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평생을 수녀와 수녀원장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독일을 기반으로 유럽 전체를 상대로 활약하며 수많은 다른 이름을 가진 시대의 인물이요 영웅이었다. 무엇보다 힐데가르트는 비전과 예언성에 기초한 천재적인 신학자로 신학과 우주론과 윤리학에 대한 묵직한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베네딕트 전통에 굳건히 서서, 신학에 여성적 이미지를 옷 입히고, 신비적이고 예언적 영성으로 당대 교회와 사회에 희망을 노래했던 열정적인 선지자였다.
예술가로 특별한 재능을 지녔던 힐데가르트는 천상의 노래를 만들어 영감이 깃들인 70여 개의 예배송을 지었고, 자신이 하늘에서 받은 어려운 신학적 담론을 수많은 그림들을 통해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어갔다. 그녀는 또한 상담자와 치료자였다. 43살이 될 때까지 말하고 기록하기를 주저해 왔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 이후 그녀는 수녀에서 황제와 교황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담했으며, 수많은 서신 교환과 설교여행을 통해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다 갔다. 당대 수도원장과 수녀원장에게 기대되었던 대로, 그녀는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를 치료하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약초를 포함해 심지어 진귀한 돌과 보석들을 사용해 사람들을 치유했다. 그녀는 또한 당대 여성으로 특이하게 농업과 어류에 대한 작품을 남길 정도로 현실적인 주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1159년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 3명의 반-교황(혹은 대립교황,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된 교황에 대립된 존재지만 교황이라는 이름과 권한을 주장하고 행사하는 자를 이른다)과의 20여 년에 걸친 혼돈의 시기에 힐데가르트는 당대 교회의 회복을 위해 싸웠고, 여성적 이미지를 활용해 자신만의 거대한 신학적 해석학을 만들어 내었다.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에서 태어나 43세가 되던 1141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고, 이후 그녀 인생의 절반 정도인 40여 년을 당대 누구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았다. 사후 꾸준한 인기를 누려온 힐데가르트는 소천 800주년을 맞이한 1979년부터 독일과 영어권 학자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심지어 14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와 신학자였던 시엔나의 캐더린(Catherine of Sienna, 1347-1380)과 16세기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요 수도원 개혁가였던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에 이어 가톨릭교회 세 번째 ‘교회의 박사’로 청원되기도 했다.

힐데가르트의 작품선집 구성
12세기 학문과 신앙적 활동에 있어서 독보적인 활동을 했던 힐데가르트는 다방면에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한 권 한 권이 한글로 번역되어 우리사회에 심도 있게 소개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우리가 이번에 펴내는 작품선집은 그녀의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의 일부라도 독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편집자가 소수의 글을 선택해 담을 수 밖에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신학과 우주론과 윤리학을 각각 논한 3부작과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여기서는 수십 년에 걸쳐 집필되어 힐데가르트의 신학과 영성의 핵심을 보여주는 몇 개의 흥미로운 글을 온전히 담아 보았다.
<너의 길을 알라>(Scivias, 스키비아스)의 “선언”은 힐데가르트의 모든 저작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로 가장 많이 인용된다. 이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좀더 자세히 보여주는 제1부와 그녀의 천사론을 담고 있는 6부를 여기 담았다. 3부작의 두 번째인 <삶이 보상에 대한 책>(Liber vitae meritorum, 리베르 비타이 메리토룸)은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침을 35개의 악과 덕에 대한 은유적인 논의로 담은 책이다. 여기서는 제1부의 서론과 첫 번째(세속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와 여섯 번째(화와 인내)의 악과 덕에 대한 논의를 담았다. 3부작의 세 번째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Liber divinorum operum, 리베르 디비노룸 오페룸)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담고 있는 3번째 비전을 여기에 담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계시를 기록하고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당대 최고의 영성가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를 담았다. 그리고 자연치유의 선구자인 힐데가르트가 제안한 건강한 삶을 위한 6가지 실천적 규칙을 풀어 담았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세계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힐데가르트의 음악의 한 측면을 맛볼 수 있도록, <심포니아>(Symphonia)에서 다섯 편의 성가를 담았다.

몇 가지 독법
이 작품선집을 읽으면서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몇 가지 주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상징적이고 원형적인 언어의 힘이 필요한 시기
힐데가르트의 많은 저작들은 인간과 우주, 신과 인간의 근원적 모습과 관계를 그려주는 상징의 힘과 원형적 이미지가 갖는 능력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은 인간 언어가 의미하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고, 인간의 영적인 감수성과 민감성과 저 깊은 마음의 바다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또한 신과 인간의 영이 만나는 접목 지점과 거기서 생겨나는 비옥함과 풍요로움과 생명을 ‘비리디타스’(viriditas, 비옥함, 풍부함을 뜻하는 인간의 최상의 상태와 긍정의 힘을 나타내는 라틴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이로서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해 우주에서 인간에 이르는 상호 연결된 존재들에 어떻게 풍요로움을 선물하는가를 보여준다.

겸손의 영성-“하나님의 숨결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깃털과 같이”- 담대한 예언자의 힘의 근원
힐데가르트의 영성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그녀가 평생 간직한 겸손과 주저함의 영성이다. 그녀는 하나님이 어린 시절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준 비전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을 인내했다. 때론 하나님이 내린 육신적인 병을 얻어 드러눕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보다 명확한 명령을 엎드려 기다렸다. 당대 최고의 종교지도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쓴 글에서 보았듯이, 그녀는 확신에 찬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맘에 품고 인내하면서 공개적인 발언의 때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힐데가르트는 자신을 ‘하나님의 숨결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깃털과 같은 존재’로 규정했다. 자신의 무의지, 무능력은 고대 사막의 수도사들이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던 개념과 같은 것으로 인간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일하도록 했다.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호흡과 공기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했기 때문에 그녀는 대신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가 온전히 하나님의 손길과 호흡에 들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수행할 때는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4세(Anastasius IV)에게는 “관용의 잠에 빠지고 인식이 마비된 상태에서 깨어나라.”고 경고했다. 1159년 이후 두 번째 대립-교황을 임명한 독일의 프레드리히1세(Fredrich I)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힐데가르트는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말했다.
“오, 왕이시여. 당신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신비로운 비전을 통해, 나는 당신이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미친 듯하고, 말도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조력자들, 결코 혼자 걸어 갈 수 없는 인생의 길
힐데가르트는 본인이 똑똑하고 명석했지만, 그녀가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는 과정에는 여러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의 숙녀 주타(Jutta)는 어린 힐데가르트를 받아들여서 교육시킨 장본인이었다. 주타는 힐데가르트에게 성경과 기초적인 라틴어와 시편찬송을 가르쳤다. 힐데가르트가 노동과 기도의 조화와 학문과 신앙의 조화를 이룬 베네딕트 전통에 평생 머물렀던 것도 주타의 공일 것이다.
귀족 출신으로 많은 시간 힐데가르트를 도왔던 리카르디스(Richardis)는 힐데가르트가 라틴어 저술을 하면서 수녀원을 이끄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힐데가르트의 비전을 기록하고 성숙시키도록 평생 격려했던 사람은 한때 그녀의 고해성사 신부였던 폴마르(Volmar)였다. 그는 그녀의 선생이요 영적인 안내자였고, 고백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영성을 알아본 폴마르는 스승의 자리에서 내려와 평생 힐테가르트를 도와 라틴어를 교정해주고, 교부들의 작품을 안내하고, 하늘에서 받은 비전을 통해 그녀가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 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힐데가르트의 가장 신뢰받은 비서요, 조력자요, 친구였다.
당대 최고의 영성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힐데가르트의 카리스마를 인정하고 비전을 지속하도록 권면하고, 심지어 교황에게 그녀를 인준(1147/8 년 트리어회의)하도록 강력히 추천했다. “그토록 찬란한 빛이 침묵 때문에 덮여지지 않도록 하고, 이러한 카리스마를 (교황) 자신의 권위를 통해 확언해 달라.”라는 내용을 담아 교황에게 보낸 베르나르의 편지는 그 자신이 힐데가르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힐데가르트를 알아야 할 10가지 이유
본인이 1997년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사실 힐데가르트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다행히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에서 문자 그대로 ‘나의 손을 붙잡고’(manuductione) 중세연구의 세계로 이끌어준 비벌리 킨질리(Beverley M. Kienzle) 교수는 힐데가르트 라틴어 설교문 영어해제 작업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이 책에 실린 두편의 설교는 그때 킨질리와 같이 작업했던 결과의 일부이다. 내가 쓴 논문 초록을 국제 학술지에 실리게 해주고, 미시간 주 칼라마주에서 열리는 중세국제학술대회에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하게 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서서히 힐데가르트에 빠져들었다. 2003년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와서 한국기독교의 문헌연구와 국제화작업이라는 이유로 오랜만에 이제야 힐데가르트를 손에 잡아들었다.
여기서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12세기 중세의 여성신학자인 힐데가르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10가지 목록을 뽑아 보았다. 이는 본인이 앞으로 전개해야 할 과제나 다름이 없지만 말이다.

-풍부한 상징, 은유, 해석학, 상상력을 찾는 주된 도구
- 인간과 우주, 자연과 만물의 통합성, 상호연결성의 힘
-근-현대적 담론과 함께 잃어버린 소우주와 대우주의 심포니
-생태신학과 푸르름과 비옥함(viriditas)의 영성, 생명의 소생
-복음에 충실하되, 역사의 현실에 뛰어드는 담대함의 본보기
-시대의 예언자성을 확보하는 방안과 정신
-여성들의 신학함, 여성들의 독특한 영성의 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예언적 비전
-건조한 개신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해줄 중세의 영성
-신학과 삶과 시대정신의 통합적 대안

필자는 이러한 연구 과제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면서,
이제 본격적인 힐데가르트 연구에 들어가려 한다.

김재현
키아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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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경 영국 중동부에서 수도원적 삶을 살았던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쓴 관상수행(또는 관상기도)에 대한 책으로 '관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이 책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를 가로막는 무지와 망각의 구름을 뚫고 나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영적 지침서이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을 뜻한다. 여기서 이 깨달음이란 인간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회귀하듯이 향하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즉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러한 존재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늘 접하는 일들이 있다. 천상의 도시로 가는 길에는 피해야 할 함정들과 극복해야 할 뜻하지 않게 만나는 장애물이 있고, 반드시 거쳐나가야 할 필수적인 훈련이 있고, 호렙산의 구름처럼 뚫고 지나가야 할 안개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모든 부정과 긍정의 인식과 지성을 넘어서 진정한 '무'(無)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하는 책이 바로 《무지의 구름》이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열정과 사랑의 화살로
무지의 구름을 뚫게 하는 영성의 안내서

중세 신비주의의 교본을 남긴 14세기 영국의 무명 작가
《무지의 구름(The Cloude of Unknowyng)》은 중세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최초 원본은 시인 제프리 J. 초서(Geoffrey Chaucer)가 활동하던 14세기 후반인 1370년경에 영국 이스트 미들랜드의 지역 방언으로 기록되었다. 영국 중동부에 살았던 이 익명의 저자는 총 7편의 작품을 남겼다. 클리프톤 C. 월퍼스(Clifton Wolpers)는 이 글이 담고 있는 남성적 감각, 방대한 신학지식, 제자를 가르칠 때 보여준 확고한 권위의식을 근거로 저자가 남성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이 책의 75장 마무리에 "하나님의 축복과 나의 축복"을 근거로 그가 사제였음을 강조했다. 그 이외에는 중세 신비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 책의 저자의 개인적인 삶과 배경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실, 이 책의 저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경우와 같이 기독교 역사에서 종종 사상적, 신학적, 정치적 이유 등으로 자신의 작품을 타인의 이름이나 필명이나 익명으로 출간해 온 전통은 낯선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의 구름》의 저자가 기독교 신비주의와 관상을 깊이 이해하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고, 몸소 수도원적 삶을 살아갔다는 점은 확신한다. 저자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목적하고 있는 '높은 수준의 관상'을 거듭 강조하지만, 자기와 동조하지 않거나 수련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쉽사리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균형감각을 갖고, 비판보다는 온화한 격려와 배려와 인정을 보여주면서 따뜻한 마음을 글 곳곳에 담았다. 또한 시인과 문학적인 기질을 갖고서, 다소 엄격하고 딱딱할 수 있는 주제를 독자들에게 간결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해 주었고, 교양과 학문과 영성을 두루 겸비한 사람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을 뚫고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들
기독교 신비주의의 관상기도와 관상적인 삶을 다룬 이 책은 14세기 후반에 기독교 신비주의와 중세 영성의 역사 분야의 가장 유명한 영적 안내서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복잡한 신비주의적인 인식론과 역설적인 신학적 담론을 읽을만한 산문으로 단순하게 제공해준 명작이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관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되었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를 가로막는 무지와 망각의 구름을 뚫고 나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영적 지침서이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신자들이 좀 더 진보된 아니면 좀 더 엄격한 단계의 관상(명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길 권면하고 있다. "당신이 이 책의 혜택을 받을 것이라 판단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디 아무에게나 이 책을 권하지 말아 주십시오."
중세 신비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무지의 구름'과 '호렙산의 구름'이란 단어가 그리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지'의 대상이 되는 'Unknown'이란 단어는 '알려지지 않은 자' 혹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존재'인 신, 즉 하나님을 뜻한다. 그리고 '무지의 구름'은 절대자에 대한 내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앎의 결핍을 의미한다.

Via Negativa et Via Positiva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누구를 통해 이런 종교적이고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을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보통 세 명의 사람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둘째, 6세기 중반의 인물로 알려진 위-디오니시우스, 셋째, 12세기의 성 빅토르의 리차드(Richard of St. Victor)이다.
하지만 이 책의 70장은 저자가 디오니시우스로부터 공식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9세기 카롤링거왕조의 궁정신학자인 에리우제나(John the Scot, Eriugena)가 디오니시우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서방기독교에서의 디오니시우스의 영향은 점증했다. 사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디오니시우스를 직접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디오니시우스의 《신비 신학(Mystical Theology)》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無)', '무지의 구름', '긍정의 길(Via Positiva)'과 '부정의 길(Via negativa)' 등을 비롯한 많은 언어와 설명구조에서도 부정신학의 선구자요 대가인 위-디오니시우스의 영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 혹은 절대자를 'Nothing'(무, 그 무엇도 아닌 분, 여행 끝에 마주하게 되는 존재, 어디도 아닌 곳)이라는 단어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나 지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와 상태를 뜻한다. 신은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어 존재하며, 지성의 빛과 이성적인 노력으로 파악하거나 넘을 수 없으며, 이성 속에 들어있는 이해의 빛으로 도달하기 힘든 존재이다. 즉, 긍정의 방법(Via positiva, cataphatic way)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때문에 신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방법으로 신비주의의 정통적인 방법인 '부정신학'을 사용하고 있다. 부정신학은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닌가를 강조(apophatic)하면서 신의 타자성과 초월성, 비교 불가능성과 묘사 불가능성을 규명하는 신학적인 인식론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의 방법의 최종 목적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의 본체 주변에 끼어있는 먼지와 '부스러기'들을 털어버리고 진실된 신 자체를 알아가는 데 있다.

비워내기, 받기, 나아가기
중세기독교의 구도자들은 영성수련을 보통 정화(purificatio), 조명(illuminatio), 완덕(perfectio)이라는 3단계로 설명했다. 설명 방법은 약간 다르지만, 《무지의 구름》에서 제시하는 영적 수련도 큰 흐름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학자들은 《무지의 구름》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수련과정의 주안점을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첫째,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지의 구름이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인간이 지닌 모든 인식과 지성은 그 어둠의 구름을 뚫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인간은 이 망각의 구름 안에 머물며, 세상의 모든 것과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까지 다 버려야 한다. 어두움과 망각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가장 단순한 언어로 하나님을 찾을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어둠의 구름을 뚫을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먼저, 선행적으로 베풀어 주는 은총과 사랑이다(1장, 67장, 34장 참조).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받은 인간만이 본격적인 수련을 해나갈 힘을 갖게 된다.
셋째, 인간은 '위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 나가고, 그분과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랑은 그런 존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서 사랑은 선한 의지, 혹은 열망이란 단어로 문맥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사랑을 통해 '그대의 의지가 적나라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35장)이 저자가 강조하는 관상의 최고 목표에 도달하는 자세이다. 예리한 사랑의 충동, 사랑의 달콤함,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갈망이 그러한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게 안내하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

전체적인 개요
1-3장 도입부분으로 책의 핵심을 담고 있다.
4장 하나님의 일인 관상과 인간의 의지적 응답.
5-12장 지성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13-25장 겸손과 자애라는 사랑의 열매, 마르다와 마리아(16-23장).
26-33장 죄와 죄의 습격을 막아내는 방법.
34-50장 관상생활의 몇 가지 특성.
51-61장 저자의 말을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
62-65장 오해를 걱정하는 저자의 우려를 심리학적으로 설명.
67-70장 '무지'로 뛰어들기.
71-74장 구약성서와 관련된 관상체험.
75장 수련의 부르심이 어디서 오는가?

다시, 관상이라는 안내자를 통해 삶의 질곡을 넘어 그분에게 이르기를 기대하며
이 책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복잡한 신비주의적인 인식론과 역설적인 신학적인 담론을 읽을만한 산문체 형식으로 일반적인 구도자들도 따를 수 있게 단순하게 제공해준 데 있다. 다시 말해, 관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와 생소함을 잔잔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나갔다. 번역자는 이 책의 이름과 관상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무지의 구름》이나 '관상'이라는 단어가 이 책과 용어가 의미한 뜻을 객관적으로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단어가 이미 한국교회에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관례를 존중하기로 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을 뜻한다. 여기서 이 깨달음이란 인간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회귀하듯이 향하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즉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러한 존재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늘 접하는 일들이 있다. 천상의 도시로 가는 길에는 피해야 할 함정들과 극복해야 할 뜻하지 않게 만나는 장애물이 있고, 반드시 거쳐나가야 할 필수적인 훈련이 있고, 호렙산의 구름처럼 뚫고 지나가야 할 안개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부정과 긍정의 인간의 인식과 지성을 넘어서 진정한 '무'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하고 있는 책이 바로 《무지의 구름》이다.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무지의 앎, 보이지 않는 봄,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현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경지에서, '목격하게 되면 모든 천지 만물이 몸을 떨고, 모든 학자는 바보가 되고, 모든 성인과 천사들의 눈이 멀도록 만드는 하나님 자신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진가'(13장)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바람과 필요는 14세기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뿐만 아니라, 21세기 혼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한국기독교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본질과 근원적 주제에 대한 희구가, 바로 우리네 삶의 일상적인 영적 수련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과 군주들을 대상으로 쓴 대표적인 논문으로, 특별히 이 논문에서 루터는 독일 그리스도인이자 자국민인 귀족과 군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했다.
루터가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이후, 교황을 비롯해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 정치가와 신학자들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한편인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는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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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허울만 남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례전을 비판하며,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루터는 이 논문을 통해,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인 성례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하나인 <교회의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곱 성례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13,000 → 11,7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650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글이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이후에도, 루터는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특별히 그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중 한 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라며 루터는 이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김재현 | KIATS  
13,000 → 11,700원 (10.0%↓) 소득공제도서정가제650
중세시대에 교회뿐만 아니라 봉건제도의 정착에도 큰 영향을 미친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신비신학》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신비신학》은 “숨겨진/은폐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이것이 이제 계시되어 밝혀졌음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5장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중세 천 년간 신비주의 신학과 비전적 신학(Mystagogia, mystagogue)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신비신학과 부정신학의 핵심을 보여준 이 책은 중세 사상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출판사 서평]

키아츠 기독교 영성 선집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배출된 신앙인들의 삶과 글, 그리고 묵상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본질과 삶의 자세를 다시금 되묻는다. 주목할만한 세계 영 성가들의 글이 시공간을 넘어 우리 삶 한가운데 던져진다. 무엇보다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아시아, 그리고 한국의 영성이 우리 신앙의 본질에 던지는 질문은 한국 기독교인의 내면과 신앙의 자태를 보여 줄 것이다. 키아츠의 ‘기독교 영성 선집’은 한국, 아시아, 그리고 세계 기독교 영성가들의 원전을 한 글로 소개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 작품선집’과 ‘한국기독교 고전선집’과 더불어 세계 속의 한국 신앙을 찾는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 전통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그 옹달샘의 중심부에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의 교회뿐만 아니라 봉건제도의 정착에 이르기까지 위-디오니시우스가 중세에 미친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신비신학》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신비신학》은 “숨겨진/은폐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이것이 이제 계시되어 밝혀졌음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5장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중세 천 년간 신비주의 신학과 비전적 신학(Mystagogia, mystagogue)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신비신학과 부정신학의 핵심을 보여준 이 책은 중세 사상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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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중심으로 신비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중세시대에 최고의 인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번역한 첫 번째 책이다. 총 86편의 아가서 설교 중에서 12편을 묶어 수록했다. 베르나르는 사랑에 대한 온갖 감각적이고 난해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아가서를 86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 사랑”과 “인간의 하나님 사랑”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사랑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모든 능력을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창조에서 타락의 전환점을 거쳐 구속과 회복의 여행을 진행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자 추동력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꼬이고 얽혀있는 인간존재가 원초적 출발점을 회복하는 힘, 다시 말해 인간 스스로 참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책은 독자들의 신앙 생활과 영혼의 현 상태를 성찰하도록 안내하고, 삶과 신앙의 지향점을 교정해 나가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해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출판사 서평]

Epilogue
김재현 키아츠 원장

중세 구도자들의 사랑
기독교가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보통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창조주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랑에 대한 강조는 지난 2 천년 동안 기독교를 다른 세계적인 보편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불교와 다르게 특징지어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새롭게 관심을 갖고 있는 중세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어떠했을까? 근대 이후에 비해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절대자인 신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중대 시대에, 그것도 전문적인 기독교 구도자들이 생활하던 수도원에서 인간보다는 신에 대한 사랑개념이 훨씬 더 발전되었다는 점은 과도한 추측이 아니다. 수도사들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했던 ‘모세의 등정’, ‘영혼의 여행’, ‘알려지지 않은 존재, 즉 무(無)’에 대한 논의의 핵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정점에 이른다. 9세기 에리우제나(Eriugena, John the Scot)가 설명했듯이, 모든 선한 것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세계창조는 발현과 전환점과 회귀라는 신학적 얼개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 사랑과 인간의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었다. 신비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서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의 경우에 나타나듯이, 시대와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랑을 설명하는 방법론은 중세 신비주의 전반에 사랑이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성경에서 사랑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책은 아가서였다. 지금은 누구라도 아가서를 펼쳐 읽을 수 있지만, 중세시대에는 아무리 전문 종교인이라 하더라고 아가서는 제일 마지막에 읽어야 하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성경 사본이나 책이 희귀해서가 아니라, 아가서가 사랑에 대하여 그만큼 깊고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오경뿐만 아니라 역사서와 시편에 통달하고 깊은 명상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차례로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랑에 대한 온갖 감각적이고 난해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아가서는 독자들을 언제든지 잘못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중세 연구가라면 사랑을 중심으로 신비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최고의 인물로 주저 없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손꼽을 것이다. 특히, 그가 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De diligendo Deo)와 《아가서 설교》(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는 사랑에 대한 기독교 영성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역사의 굴곡의 파도를 넘어 이름이 남겨진 인물들이 보통 그렇듯이, 베르나르도 격변의 시대를 살다 갔다. 1090 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수도자의 길로 접어든 베르나르는 10세기 프랑스 디종에서 시작된 클뤼니수도회에서 시스터시안 수도회로의 변혁 과정에 중심 인물이었다. 당대의 부유함과 관습적 족쇄에서 허우적거리던 클뤼니수도회와 일전이라도 하듯이, 베르나르는 엄격한 규칙과 근검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염색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 백색의 수도복을 입을 정도로 단순한 삶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점차 유럽의 중심축으로 등장하던 국가와 왕 권을 상대로 당대 기독교의 자리매김을 위해 애썼다. 그는 1146년에 지리적 외형이 배의 모습처럼 생긴 프랑스의 베즐레 마을에서 ‘신이 원하신다’(Deus vult)라는 말씀으로 십자군의 등정을 축복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였던 교황 유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회를 좀 더 선한 곳으로 이끌 기를 염원했다. 그의 말년에는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진 카타르인들(Cathars)을 누르기 위해 ‘윙윙거리는 벌’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말에 올라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었다. 그는 115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중세 어떤 종교지도자보다 바쁘게 일생을 분주하게 살았다.
내 개인적으로 베르나르는 오랜 연구주제였고, 마음속의 스승이었다. 내가 1998년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여름에 가진 첫 번째 유럽 역사 현장 연구 시절에 처음으로 방문한 수도원이 바로 프랑스 몽바르(Montbard)에 있는 클레르보 수도원이었다. 또한,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독일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오늘의 위치를 갖게 된 것도 베르나르의 도움이 대단했다. 베르나르가 당대 교황 유게니우스 3세에게 힐데가르트 같은 인물의 저술을 깊이 받아들이도록 권면하지 않았다면, 중세 최고 의 신비주의였던 힐데가르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2011년에 번역하고 약간의 설명을 더해 출간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많은 독자 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책의 서론에서(pp.7-19) 베르나르 의 생애와 그의 사랑에 대한 이해의 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고, 2004년 발표한 논문 “De diligendo Deo: 베르나르 Bernard of Clairvaux의 사랑 개념 연구”(〈종교연구〉 제23호 (2004년 12월, pp. 1-26)에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발간한 책은 또한 《아가서 설교》 중에서 20 번째 설교인 〈사랑의 세 가지 특성〉과 83번째 설교인 〈사 랑〉을 추가로 담아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고자 했다. 그리 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동안 간간이 작업해 온 총 86편의 《아가서 설교》 중에서 처음 12편을 묶어 이번에 제1권으 로 간행하게 되었다.

아가서 설교(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 사랑(Caritas)
베르나르는 그의 나이 45세경인 1135년부터 《아가서 설교》를 쓰기 시작해서 살아 생전 86편을 남겼지만, 그가 의도한 아가서에 대한 시리즈 전체를 마치지는 못했다. 베르나르 사후 영국의 호이랜드의 질버트(Gilbert of Hoyland, d.1172)가 47편을, 또 다른 영국 시스터시안인 포드의 존(John of Ford)이 120편을 추가로 써서 시스터시안 수도회의 아가서 설교 시리즈 전체를 완성했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독자들이 듣기보다는 읽기를 더 원 했음직한 86편의 설교를 통해, 원숙한 경지에 이른 한 수 도사의 깊은 영성의 경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가르치고 다듬어 온 핵심적인 영적인 가르침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아가서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성경적인 가르침과 수도자의 경험을 역동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특별히 사랑이란 개념은 이 설교집의 중심 주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말씀과 유사한 이는 사랑을 받는 만큼 또한 사랑하면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그분과 유사해지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사랑할 때 영혼은 말씀과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일치보다 더 사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설교 83:3]

“사랑은 위대한 실체인데, 만약 사랑이 스스로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삶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면, 사랑은 그것으로 부터 새로워져 거리낌 없이 흐를 것입니다. 사랑은 영혼의 움 직임들과 분별들, 그리고 그 연모함 가운데 최상의 것이니, 피조물은 그 사랑을 통해, 비록 평등하게는 아니지만, 자신의 창조주에게 응답할 수 있고 그분의 은총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설교 83:4]

베르나르는 〈아가〉를 설명해 가면서 수많은 다양한 단어와 예를 들어 사랑을 그려나갔다. 위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은 때로 인간의 영혼이 지닌 모든 능력을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창조에서 타락의 전환점을 거쳐 구속과 회복의 여행을 진행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자 추동력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꼬이고 얽혀있는 인간존재가 원초적 출발점을 회복하는 힘, 다시 말해 인간 스스로 참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영혼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연구보다 사랑하기 개인들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명상하고 성찰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특별히 교 회 성장과 축복이라는 기복적 분위기가 만연된 목적 위주 의 한국개신교의 신앙 행위는 신학을 했던 나 자신마저 영 적인 고갈을 겪게 했다. 나 자신 역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이란 핑계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둘기와 각종 새를 파는 사람같이 살아왔었다.
기독교가 한국 땅에 들어온 지 150년 만에 최고의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기독교인 개개인의 영적 고뇌와 ‘영혼의 위로와 생명의 등불을 전해줄 신랑을 찾아 헤매는’ 신부들이 어느 때보다 많다.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가나안 성도들’이란 폄훼적인 표현에는 나는 사실 동의하기 힘들다.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는 발바닥에의 입맞춤에 대한 준비도 못 한 사람들이 손에 대한 입맞춤을 넘어 입술에 대한 입맞춤을 무례하게 요구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철부지 신부와 애타는 신랑의 모습을 넘어설 수 있게 도와줄 세련된 지침서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신부의 열망을 안내자 삼아 나 자신의 신앙생활과 영혼의 현 상태를 성찰하고, 삶과 신앙의 지향점을 교정해 나가면서, 신랑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신부가 바로 그렇게 소중한 내 영혼이고 인간의 영혼이고, 신랑은 말씀이고, 영혼이 말씀과 하나 되어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원래의 고향인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귀에 속삭이는 사랑의 동 반자가 이 책이 아닐까? 그리고 그 개인적 대전환과 우주의 대전환의 중심점에 바로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딱딱한 명사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위로하고 사랑할 대상에 맞추어주는 동사이다. 사랑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과 행함의 주제이다. 베르나르의 삶, 특별히 아가서 설교에서 맛볼 수 있는 베르나르의 삶과 인격이 동사로서의 사랑의 모범이었다. 율법과 신학과 수많은 스승들의 지적 가르침이 신부와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야 하고, 그 길목길목에 수많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랑을 동사로 풀어 써야 한다. 길목의 교차로에서마다 기다리고 있는 말씀의 방문과 조언을 통해 부지런하게 삶을 통해 앞으로 나가야 한다. 특별히 평생 학자와 글쟁이로 살아온 내게 명사적 연구보다 사랑을 동사로 풀어 쓰라고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 매우 중요하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의 비참함이 어떠한지, 영혼의 깊은 계곡에서 매우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작은 영혼의 절규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동시에 선함 자체이고, 자비로 가득하고, 인간의 영혼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등 불을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기초한 유사성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신랑 되신 말씀이 ‘그의 입의 입맞춤으로 그가 내게 입맞추게 하라’라는 무 례해 보이고 당돌해 보이는 신부의 요청마저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구원의 서곡을 열어 주신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은 단순성과 불멸성과 자유의지를 밀고 당김으로 하나님의 품 안을 향한 인간 영혼의 대서사시의 감초 역할을 한다.
신랑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커도, 신부와 나와 우리가 나태와 태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랑을 만나기 전에, 신랑의 입의 입맞춤을 얻기 전에 순종, 참회, 가책, 정결함, 인내, 단순성, 겸손 등으로 이어지는 덕을 살아야겠다. 베르나르의 동시대인이었던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가 35개의 악과 덕의 심포니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삶과 덕의 함양을 애썼던 것처럼, 삶을 더없이 사랑스럽게 만들 관상과 성찰의 작은 도구들을 삶에서 실천해야겠다. 그럴 때 신랑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사랑을 받고, 감동을 하고(afficiamur), 더욱 사랑스럽게 사로잡히지 않을까? 더 큰마음의 황홀경과 사랑의 황홀경에 접어들 수 있지 않을까?
영혼의 고양을 꿈꾸는 농부신학자
나이 50에 이른 2016년부터 시작한 화천농장에서의 생활은 삶과 신앙과 학문을 깊이 있게 되돌아보는 계기였다. 덕지덕지 농약에 중독된 채소 같은 한국교회를 반성하고, 뒷밭의 닭들이 신선한 알을 낳듯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낳듯 나도 낳음의 신비를 고민해 보았다. 더이상 과거의 신학적 관습과 인식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도 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전환기의 산물 중의 하나가 이번에 출간되는 《아가서 설교》 첫 번째 책이다. 작년에 오랫동안 작업한 《빙엔의 힐데가르트 선집》도 그런 결과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에 동시에 출간되는 《위-디오니시우스 의 신비신학》도 그런 변화의 결과로 넣은 신선한 달걀이다. 《아가서 설교》는 분량 면에서 독자들이 읽기 쉽게, 이번처럼 앞으로도 12편 내외를 묶어 시리즈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번에 첫 번째 책을 내면서, 벌써 두 번째 책을 차례 대로 교정하고 있다.
이 책을 작업하면서, 지금까지 내 중세 연구의 등불 역할을 해 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안내해 주신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 시절 은사이셨던 비벌리 킨질리(Beverley M. Kienzle) 교수와 프린스턴신학대학 시절 나를 아껴주신 펜실베니아대학의 앤 매터(Ann Matter)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면서, 성장추구형 교회와 목적 지향적 신앙생활을 넘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와 개인의 삶을 갈망하는 많은 독자와 이제 새로운 영적 여행을 신나게 떠나봐야겠다. 동사로 삶을 풀어내고 나누면서, 내 영혼과 우리 영혼의 고양을 꿈꾸는 농부신학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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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은 경건주의 운동에 기초를 놓은 책으로 필립 야콥 슈페너가 저술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크푸르트로 온 슈페너는, 1675년에 요한 아른트의 설교집에 들어갈 서론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당대 유명인의 책에 더해진 서론 형식으로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번에 발간된 《경건한 열망》이다.
슈페너의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첫째, 슈페너는 당대의 교회, 정치가들, 성직자들, 그리고 교인들의 도덕적 태만과 세속성을 다루었다. 둘째, 당대 기독교인들에 대한 슈페너의 비난은 사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필수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과도한 교리화에 진저리나는 종교전쟁의 무기력 가운데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슈페너는 교회 개혁의 구체적인 단계를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출간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이 책은 그해 가을 독립적인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때는 원래 쓰인 서문에, 《경건한 열망》을 비평적으로 논의하고 보완해 줄 만한 두 편의 글이 추가되었다.
프랑크푸르트와 독일어권에서 영향력을 확인한 이 책은 1678년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슈페너의 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건주의를 유럽 전역에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감수 에필로그
김재현 박사(키아츠 원장)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총신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철학박사)에서 종교,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2004년 인문학연구기관인 키아츠(KIATS)를 설립해 지금까지 원장으로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천상의 위계》(2011, 번역),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 《한국기독교 성지 순례 50 Belt》(2017),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2022) 등이 있다.
이 책은 580년경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행정가이자 수도자, 신학자인 막시무스의 “진실한 고백과 금욕적 삶이 만들어 낸 사랑”에 대한 금언집이다.
막시무스는 모든 사람이 수도사적 이상을 지향하는 금욕적인 삶에서 사랑의 깊은 맛을 깨닫기를 원했고, 당대 신학적 난제들을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특히,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추가하여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는 서방 기독교, 즉 유럽 중세기독교의 신학과 신비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사랑에 대한 400가지 교훈>은 짧은 경구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으로,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것을 지속해서 강조한다. 막시무스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열망과 욕망을 품지 말고, 자기와 사물들에 대한 애착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모든 악의 근원에는 자기애(self-love, 자기 사랑)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할 때 소망이 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과 정욕을 극복하고 덕을 쌓는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인간의 본성과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궁극적인 영원한 존재(eternal-being)가 될 수 있다.


감수 에필로그
김재현 박사(키아츠 원장)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총신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철학박사)에서 종교,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2004년 인문학연구기관인 키아츠(KIATS)를 설립해 지금까지 원장으로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천상의 위계》(2011, 번역),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 《한국기독교 성지 순례 50 Belt》(2017),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2022) 등이 있다.
귀고 2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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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중세 기독교 시대에 등장한 카르투시오수도회 9대 원장 귀고 2세(1114-1193)의 두 작품, 《수도사들의 사다리》와 《관상적 삶에 대한 서신》을 담은 책이다.
《수도사들의 사다리》는 렉티오 디비나의 네 단계, 즉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이라는 네 가지 개념을 총 15개의 장으로 설명한다. 이 책은 수도사들의 영적인 삶의 핵심인 렉티오 디비나의 실천을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다룬 가장 중요한 초기 작품이다.
《관상적 삶에 대한 서신》은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용적인 지침서로 12개의 묵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고 2세는 이 작품에서 침묵과 고요함, 혹은 정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지금도 카르투시오 수도사들은 필수적인 예배와 특정한 노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개인이 거하는 독방과 작은 정원에서 보내면서 고독과 침묵을 벗 삼아 기도와 성경 읽기 등의 영적인 삶에 매진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침묵과 정적을 지키는 삶은 개인의 집이요, 미리 맛보는 작은 천국이다.
《수도사들의 사다리》가 렉티오 디비나에 대한 4 단계의 틀을 제공해주는 반면, 《관상적 삶에 대한 서신》은 내면의 평화와 고요함을 증진시키는 영성훈련의 안내자라 할 수 있다.
특별히, 프랑스 샤르트뢰즈에 위치한 본원과 한국 성모 카르투시오 수도원, 한국 주님탄생예고 카르투시오 수녀원으로부터 각종 자료와 사진(프랑스 본원 등), 영상파일을 제공받아 부록에 수록하였다.


감수 부록
김재현 박사(키아츠 원장)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총신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철학박사)에서 종교,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2004년 인문학연구기관인 키아츠(KIATS)를 설립해 지금까지 원장으로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천상의 위계》(2011, 번역),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 《한국기독교 성지 순례 50 Belt》(2017),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2022) 등이 있다.

자료 협찬 및 감수
한국 성모 카르투시오 수도원
한국 주님탄생예고 카르투시오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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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가 남긴 독일어 설교 중에 지금까지 비교적 널리 읽혀온 18편의 설교를 번역한 책이다. 학자들이 정선한 에크하르트의 86편의 독일어 설교 중에서 18편의 분량은 숫자상으로는 20%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에크하르트 설교의 특징과 신비주의적인 신학의 진미를 맛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설교 한편 한편은 워낙 풍부하고 함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간단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교에 익숙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에크하르트의 설교는 결코 쉽지 않을지 모른다. 매 설교가 주제로 삼고 있는 성경 본문을 훌쩍 뛰어넘는 신비적 해석에 더해, 에크하르트는 몇 가지 자신만의 중심주제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일관된 사상과 신학을 마치 다양한 변주곡처럼 설명해 나간다. 이 책이 담고 있는 18편의 설교도 다음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식탁에 앉아 손수건을 접듯이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분리와 초월, 버림과 채워짐, 신성, 빛과 인간 영혼의 작은 불꽃, 존재와 아무것도 아닌 것, 존재와 무, 하나 됨과 연합, 사랑의 풍부함, 선과 하나 됨, 토대와 정점….”
클리마쿠스의 요한이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비잔틴기독교에서 성경책과 전례서 다음으로 많이 읽혔고 서방기독교에서도 인기를 누린 고전이다. 교단과 분파를 넘어 고전적 위치를 차지한 이 책은 금욕적인 삶과 영적인 삶의 성장을 추구하는 기독교 수도자들의 지침서로서 오랫동안 자리해 왔다. 이번에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 출간하였으며 상권에는 1단계부터 15단계를, 하권에는 16단계부터 30단계를 담았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는 수도사가 30개의 영적인 수련과 훈련과정을 통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요한은 야곱의 사닥다리 모티브를 차용했고, 그는 다리를 30개로 구상해 다양한 영성 훈련의 주제들로 하나씩 풀어나갔다. 즉, 수도사적 삶으로의 회심, 필요한 덕과 악에 대한 묘사들, 신비적인 하나 됨에 이르는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부분을 30개의 주제로 탁월하게 담아내었다.
이 책은 영적인 삶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조언과 지침을 제공한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심오하게 분석하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도전을 깊이 있게 고찰한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장애물을 더 깊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요한이 지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개인들(수도사들)의 내적인 경험이다.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성장을 직접 알고 보고 맛보고 느끼는 개인적인 경험과 만남은 필수적이다. 그는 육체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마음의 겸손과 청결이 더 중요함을 강조했고, 그리스도인이 주도적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질문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도록, 그래서 신앙의 도약이 이루어지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 점은 많은 경우 너무 명확한 답을 정해 놓고 성도들을 그쪽으로 이끌어가는 오늘날의 교회에 좋은 시사점을 준다.


감수.에필로그
김재현 박사(키아츠 원장)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총신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철학박사)에서 종교,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2004년 인문학연구기관인 키아츠(KIATS)를 설립해 지금까지 원장으로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천상의 위계》(2011, 번역),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 《한국기독교 성지 순례 50 Belt》(2017),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2022) 등이 있다.
클리마쿠스의 요한이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비잔틴기독교에서 성경책과 전례서 다음으로 많이 읽혔고 서방기독교에서도 인기를 누린 고전이다. 교단과 분파를 넘어 고전적 위치를 차지한 이 책은 금욕적인 삶과 영적인 삶의 성장을 추구하는 기독교 수도자들의 지침서로서 오랫동안 자리해 왔다. 이번에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 출간하였으며 상권에는 1단계부터 15단계를, 하권에는 16단계부터 30단계를 담았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는 수도사가 30개의 영적인 수련과 훈련과정을 통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요한은 야곱의 사닥다리 모티브를 차용했고, 그는 다리를 30개로 구상해 다양한 영성 훈련의 주제들로 하나씩 풀어나갔다. 즉, 수도사적 삶으로의 회심, 필요한 덕과 악에 대한 묘사들, 신비적인 하나 됨에 이르는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부분을 30개의 주제로 탁월하게 담아내었다.
이 책은 영적인 삶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조언과 지침을 제공한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심오하게 분석하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도전을 깊이 있게 고찰한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장애물을 더 깊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요한이 지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개인들(수도사들)의 내적인 경험이다.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성장을 직접 알고 보고 맛보고 느끼는 개인적인 경험과 만남은 필수적이다. 그는 육체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마음의 겸손과 청결이 더 중요함을 강조했고, 그리스도인이 주도적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질문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도록, 그래서 신앙의 도약이 이루어지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 점은 많은 경우 너무 명확한 답을 정해 놓고 성도들을 그쪽으로 이끌어가는 오늘날의 교회에 좋은 시사점을 준다.


감수 에필로그
김재현 박사(키아츠 원장)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총신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철학박사)에서 종교,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2004년 인문학연구기관인 키아츠(KIATS)를 설립해 지금까지 원장으로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천상의 위계》(2011, 번역),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 《한국기독교 성지 순례 50 Belt》(2017),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2022) 등이 있다.
길선주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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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목사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끈 부흥사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요, 한국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창건자 길선주 목사의 설교와 중요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을 길선주 목사가 해석한 설교이다. 민족적 고난을 반영하듯,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에 남기신 말씀을 통찰력 있는 해석을 곁들여 소망과 축복의 메시지로 전한다. 제2장은 생명, 영혼, 사랑 등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길선주 목사만의 강렬한 언어로 외치고 있다. 제3장은 죄와 시험, 신자의 기본적 본분을 구수한 한자와 한글을 통해 한국 사람 특유의 정감으로 전달해 준다. 제4장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설교가요 민족적 지도자인 길선주 목사의 면면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 주는 글들이다. 특히 <그리스도신문>에 실린 두 편의 글은 길선주 목사의 성경 해석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리고 “추수감사일의 조선 유래와 그 의의”는 한국에서 추수감사절이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평화의 서”는 일제의 검열 속에서 설교 중 일부가 삭제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일제 통치의 서슬 푸르던 시대에 역설적으로 평화의 기본을 소리 높이고 있다.


[출판사 서평]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이름, 길선주(1869-1935) 목사. 격동하는 대변환기에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몇 개의 수식어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어림짐작으로 그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이렇게나 많다.

-1907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명.
-한국 교회사의 전환점이라고 불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끈 부흥사.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4인 중 한 사람.
-한국 기독교 산업전도의 첫 시도로 간주되는 평양 노동자 연합전도를 이끈 기독교 지도자.
-이념으로 혼란했던 192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시대를 연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사》,《평양연합부인회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적인 글을 남기고, 설교와 설교에 관한 저서를 간행한 한국 교회 제1세대의 주도적 인물.

이처럼 길선주 목사를 지칭하는 화려한 수식어는 많지만, 정작 그의 글을 접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책은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삶을 잘 보여주는 설교와 중요한 글 24편을 모아 엮었다. 특별히 그는 기독교가 한국인에게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역력히 보여준 한국 교회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질곡의 한국 근대사 초기에, 기독교의 복음은 사후 천당만이 아니라 실제 모든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그것을 실감하게 한 것이 길선주 목사였다. 이 책은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깊은 통찰력과 열정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성경을 우리 삶의 골수에 닿게 하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일, 일상의 일을 성경의 가르침과 꼭 맞는 고리를 찾아 맞추는, 비범한 관찰력을 지니고 있다. 성경이 실제 나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처럼 잘 보여준 설교가는 당대에 거의 없었다.
길선주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핵심으로 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거기서 어긋나는 어떤 경우도 용인된 적이 없다. 따라서 그의 설교에는 때로 무서울 정도의 비판과 경고가 따랐다. 한 예가 이 책에 수록된 ‘감독의 책임’이라는 설교인데 길선주 목사 자신도 ‘말이 격하여 차례가 없고 예를 결함이 있을 것도 양해’ 바란다는 서두로 시작할 정도이다.”
-민경배(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김익두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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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무디로 일컬어지며 한국 기독교 초기의 대부흥을 이끌었던 김익두 목사가 남긴 20여 편의 설교를 묶은 책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말씀과 성령’에서는 성경,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성신을 받으라”나 “성신 받는 분별”이라는 설교는 평양 대부흥운동 이래 한국 기독교의 상징이 되어 온 성령에 대한 이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2장 ‘기도와 순종’에서는 기도, 근신, 순종과 같은 기본적이지만,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에 대한 설교를 담았다. 3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관한 다양한 지침을 담고 있다. 특별히 주일성수와 같이 복음과 삶의 일치를 위한 주요 요소에 대한 설교에서는 20세기 초반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출판사 서평]

이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100여 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기적, 이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래 내용은 실제로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어느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 눈 먼 장님이 기도를 하던 중에 눈이 뜨였다. 기도 안수를 받던 중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 귀신들린 사람, 각기병, 풍증 등에 걸린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기적과 치유의 사역이 전국을 휩쓸었고, 동시에 곳곳에서 쏟아지는 의심과 비방이 잇따랐다. 곧 이적에 대한 교회 안팎의 비난에 황해노회의 임택권 목사를 중심으로 이적명증회가 조직되었고, 조사와 연구를 거쳐 1921년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 발행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100여 년 전 좌우를 돌아봐도 소망 없는 우리 민족에게 ‘이적’의 방법을 통하여 일하셨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김익두(1874-1950) 목사가 있다.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이적과 치유의 기사가 나타났고, ‘김익두 목사의 이적사건’은 한국 교회와 사회 전반에 큰 화제가 되었다.
김익두의 집회에 참석한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김익두는 자신이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단순히 따랐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설교를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그는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 주님의 부활, 천국에 갈 자의 회개 등 순수한 복음을 증거했고, 군중들을 일으키고 깨우쳤다. 그의 설교는 슬픔과 고난의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민족에게 구원의 소망과 확신을 주었다.
김익두 목사의 글을 읽다 보면, 김익두 목사의 불 같은 열정과 함께 마치 그의 목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과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대개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린 소외계층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가 설교에 사용한 언어의 형태와 구성 역시 이들과의 동질성 체험 때문에 대중들에게 밀도 있게 파고들었다.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성령 강림의 체험은 한 인간의 존엄을 약속할 수 있었고, 기존 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을 신앙을 통해서 지탱케 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메시지는 대중의 공감을 일으켰다. 그것은 일제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찌들고 허탈에 빠진 민족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학교, 대신대학교 총장)
주기철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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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자’로서의 ‘투사’, 혹은 ‘저항적 인물’로 각인되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점이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이번에 출간한 《일사각오》는 주기철 목사가 생전에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했던 글과 개인적인 편지, 사후 기록과 증언을 엮은 것으로, 2008년에 출판한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주기철》을 개정한 것이다. 특별히 이번 개정판은 젊은 세대도 쉽게 읽을 수 있게 고어와 한자를 가능한 한 풀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일부 어투도 쉽게 바꾸었다.
일사(一死)를 각오한 주기철 목사의 글은 수난의 역사를 통과한, 삶으로 증명된 글이다. 그래서 투박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힘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주기철 목사가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 주기철 목사가 열렬히 사랑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주기철 목사는 한국 교회가 낳은 최대의 순교자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국가와 교회에 대한 이해,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 사상 등 한국 교회의 신학과 교회적 삶에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삶의 여정은 무엇에 복종하고 무엇에 저항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고, 한국 교회에 순교 신앙의 실제성을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주기철 목사의 삶에서 가장 주요한 점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일관된 반대와 저항이었다. 이 점이 그의 목회적 삶의 행로를 결정했고 순교자로서의 주기철 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와 목회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종교 정책, 특히 기독교 정책과 이로 인한 한국 교회와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복음적 신앙이야말로 그의 생을 이끌어 간 힘의 원천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사참배를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사참배는 제1, 2계명을 범하는 죄악이었다. 이 점이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둘째, 개인의 신앙 양심과 신교(信敎)의 자유를 억압, 탄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계속적인 탄압은 종국에 한국 교회를 훼파하려는 저의가 있었으므로 주기철 목사는 신교의 자유와 영적 자유를 주장하고 신앙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저항인의 길을 갔지만, 동시에 가난한 영혼을 감싸는 목회자였다.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훼파하려는 세력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자상한 영혼의 목자이기도 했다. 그는 삶, 목회, 설교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에 복종할 것인가에 대한 일관된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 행동의 토대는 개인적 감정도, 민족주의도, 심리적 고집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가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감옥에서 투쟁하고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간 것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가 주기철 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삶, 평생 하나님만을 열렬히 사랑했던 태도일 것이다.
- 이상규(고신대학교 명예교수)
손양원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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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한센병 환자들의 친구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저항했던 투사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애양원의 한센인들을 피난선에 태워 대피시키고 자신은 애양원에 끝까지 남아 거동이 불편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결국 공산군에게 잡혀 순교 당했다.
이번에 출간한 《순전한 기독자가 되십시오》는 복음으로 시대를 얼싸안은 손양원 목사가 남긴 친필을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2009년에 출판한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손양원》을 개정한 것으로, 젊은 세대도 쉽게 읽을 수 있게 고어와 한자를 가능한 한 풀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일부 어투도 쉽게 바꾸었다.
순전한 기독자가 되라는 손양원 목사의 글은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모든 사상을 사로잡아 십자가 아래만 복종하라고 재촉한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의 설교문은 그가 어떻게 신앙의 열정으로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며 시대적 문제를 초월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손양원 목사가 외친 순전한 기독교, 순전한 기독자의 원형을 만나게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키아츠는 2007년 겨울부터 애양원,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그리고 지금은 작고하신 이광일 목사의 협조를 얻어 손양원 목사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손양원 목사는 일기, 편지, 설교대지(大旨), 예화 등 총 2,000여 쪽에 이르는 글을 남겼지만 그가 남긴 원고들은 깨알 같은 글씨로 썼거나 흘려 쓴 글들이어서 판독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친필 원고를 직접 읽어 낸 적은 거의 없었다. 또한 그가 남긴 글 대부분이 단편이거나 설교대지라는 점도 원자료의 편집을 더욱 어렵게 했다. 물론 단편적인 글들은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원자료 작업에 대한 몇 가지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가 남긴 2,000여 쪽의 글을 해제하고 일반인과 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글을 선별하였다. 그리고 2008년 홍성사와 함께 협업하여 한글은 홍성사에서, 영어 번역본은 키아츠에서 발간했다. 그리고 그간의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반영해 이번에 내용을 보완하고 순서를 약간 변경해서 키아츠의 영성선집의 일환으로 새롭게 출간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은 전환기 한국 기독교에 좋은 모델과 도전이다. 손양원 목사가 고민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의 핵심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기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손양원 목사는 사회운동가나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복음의 핵심이 가르치는 바를 충실하게 따랐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환센병 환우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고, 한국전쟁 당시 애양원에 남아 있는 환우들을 두고 자기만 피신할 수 없어 피난선에서 내려 자기를 기다리는 죽음의 장소로 묵묵히 걸어갔다. 그것은 마치 골고다로 걸어가는 예수의 모습과 같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를 신앙의 힘으로 뛰어넘어 자기 아들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오로지 신앙의 길만 고집했던 손양원 목사의 일생은 역설적으로 당대 한국 사회에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일제의 억압, 그리고 분단과 분열의 상징인 남북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한 인간, 한 신앙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은 모든 시대적 문제를 초월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했다. 바로 이러한 깊고 무게 있는
신앙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지금도 복음의 핵심적 가르침이 세상을 바꾸고,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확신을 준다. 그런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을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 김재현 키아츠 원장
이성봉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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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디’로 불리는 이성봉 목사는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요,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한 부흥사이다.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였지만 그의 사역은 초교파적이었으며,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여 신자들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었다.
이번에 출간한 《성결의 복음》은 이성봉 목사가 부흥회에서 사용한 원고와 각종 설교를 엮은 것이다. 2008년에 출판한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이성봉》을 개정한 것으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어와 한자를 가능한 한 풀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일부 어투도 쉽게 바꾸었다.
이 책을 통해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성령에 이끌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산 제물로 바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았던 이성봉 목사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출판사 서평]

이성봉 목사가 한국 교회에 미친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의 부흥사역이다. 그는 20세기 중반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던 부흥사였다.
이성봉 목사의 메시지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중생과 성결, 신유와 재림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다. 또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변화를 이루는 것이었고, 그의 부흥회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이 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이성봉 목사는 자유주의자도, 교리만 강조하는 정통주의자도, 남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더욱이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매우 경계했다. 그는 건전한 복음주의에 근거하여 항상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다.
또한 어려운 신학을 말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된장 냄새 나는 우리의 언어로 바꾸었다. 특별히 그가 표현하는 “신앙은 밤송이 같다” 또는 “가시밭의 백합화” 같은 이야기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용어였다.

이 책은 이성봉 목사 생전에 발간되었던 《임마누엘 강단》(1955), 《사랑의 강단》(1961), 《부흥설교 진수》(1963)와 성결교가 발행한 <활천>의 글 중 일부를 선별해 엮은 것이다. 1장 ‘주님을 좇는다는 것’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와 자세를 역설하고 있다. 2장 ‘성결한 삶’에서는 성결교와 한국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성경과 경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루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성결이다. 이런 점에서 1부의 ‘주님을 좇는 것’과 2장의 ‘성결한 삶’이 일치하고 있다. 3장의 주제이자 이성봉 목사의 신앙 핵심은 바로 ‘재림’이다. 다시 오실 재림의 주, 신랑 되신 그리스도 앞에 순결한 신부로 서려는 삶의 자세가 바로 주님을 좇는 길이기도 하고 성결의 길이기도 하다. 4장에서는 ‘부흥’과 6·25와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담에 기초한 설교를 묶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국부흥사로 활약한 이성봉 목사의 열정과 또한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이성봉 목사의 성결의 메시지, 종말론적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와 같은 대중적인 부흥사를 필요로 한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부흥운동의 열기가 식어 가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성봉 목사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부흥사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명예와 물질에서 자유한 이성봉 목사와 같은 부흥사가 다시 출현할 때 한국 교회에는 다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정약종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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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저술한 최초의 천주교 한글 교리서이자 기독교의 교리를 과학적,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는 호교론적(護敎論的) 신학서이다.
《주교요지》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 등을 간결하게 담고 있다. 또한 불교나 도교 같은 동양 종교에 대한 비평적 고찰과 함께 일반적인 행동규범에 대한 천주교적 입장을 간략하게 논하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1) 신 존재 증명, (2) 천주의 속성, (3) 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 (4) 상선벌악과 천당과 지옥, (5) 천지창조, (6) 천주의 강생과 구속, (7) 예수의 부활, (8) 원조의 범죄, (9) 영혼 불멸, (10) 천주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 등이다.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과 하층민들에게 신앙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주교요지》를 썼다. 그리고 이 책은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처럼 정약종 한 사람의 열정과 그가 저술한 《주교요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 역할을 감당했다.


[출판사 서평]

《주교요지》의 저자 정약종과 그의 가문은 한국 그리스도교, 특히 천주교의 형성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779년 경기도 인근 남인(南人) 계열의 몇몇 양반 자제들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講學會)로 모여 18세기 후반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과 관련된 책들을 읽은 후,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에 입문했던 것이 한국 천주교 신앙의 기원이 되었다. 이는 외국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생적인 신앙고백과 더불어 교회가 설립된 매우 드문 예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천주교에 입문했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동생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뒤를 이어 정약종은 형제들보다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丁未泮會, 반촌에서 서학을 공부하던 자들을 성토한 사건)와 1791년 진산 사건(제사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 사건) 이후 신해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이 천주교에 입교한 사실 때문에 정치적 유배를 당하자, 그의 형제들이 공식적으로 신앙을 저버렸던 것과 달리, 정약종은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주교요지》는 한국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천주교 한글 교리서이자 호교론적(護敎論的) 신학서이다.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들에게 신앙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주교요지》를 썼다. 당시 대부분의 책이 한문으로 쓰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천주교 교회의 최초 교리서가 한글로 쓰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중인, 농민, 아녀자 등 하층민들과 소외계층까지 포괄하여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가장 천대받던 천민마저도 차별 없이 형제로 대우하는 신앙의식의 발로였다. 어쩌면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주교요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 역시 이 책이 중국의 《성세추요》(盛世芻要)보다 나은 책이라 호평했다. 정약종 한 사람의 열정과 영성이 초기 100년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이다.
최병헌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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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명경》(聖山明鏡)은 한국 감리교회 초기 목사인 최병헌이 전통 동양종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저술한 작품으로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성산(聖山)의 영대(靈臺)에 모여 토론하다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최병헌은 한국사회에 이미 토착화되어 있던 전통 동양종교들과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이는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전도방식과도 다르고 종교다원주의자들처럼 기독교를 상대화시키는 방식과도 다른 것이다. 특히 전통 동양종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기반으로 삼아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신학적 과제를 비교 종교론과 기독교 변증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현대 한국 신학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출판사 서평]

《성산명경》은 감리교 계통에서 발간한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에 1907년 제5권 제1호부터 제5권 4·5호까지 총 4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셩산유람긔> 원고를 증보하여 출간한 단행본이다. 《성산명경》의 초판은 1909년 3월 20일 정동황화서재에서 발행하고 대동광지사에서 인쇄했으며, 재판은 1911년 8월 3일 동양서원에서 발행하고 조선인쇄소에서 인쇄했다. 본서에서는 총 80쪽 분량의 재판을 저본으로 영인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달았다.
《성산명경》은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성산의 영대에 모여서 토론하는 형식의 글이다. 성산이라는 비현실적이고 상징적 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작자가 꿈에서 목격한 사실을 스스로 해몽하는 방식으로 기술한 작품으로서, 당시 개화기문학으로 유행했던 토론체소설의 양식과 몽유록(夢遊錄)의 특징을 활용했다. 이에 따라 인물의 성격에 따른 사건의 전개나 갈등이 없고, 대화 위주로 진행된다. 토론 양식이 종교간 비교와 변증을 위한 체계와 논리를 갖추기 위한 통로였다면, 몽유록적 형식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 교리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감성적으로 수용하도록 신비적 연출을 하는 데 일조했다. 《성산명경》은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 등의 동양종교전통의 기반이 강했던 20세기초 한국에서 동양종교와 기독교의 사상적 비교를 감행함으로써 합리적 토론과 대화를 통해 지성적 선교 혹은 점진적 개종을 체험하고 지향했던 한국 기독교의 지성적 흐름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전통 동양종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기반으로 삼아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신학적 과제를 비교 종교론과 기독교 변증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현대 한국신학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위-디오니시우스
디오니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함께 중세 기독교 사상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중세 신학과 철학, 특별히 ‘상징과 신비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디오니시우스의 이름은 532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스스로 바울과 히에로테우스(Hierotheus)의 제자라고 주장한 디오니시우스는 다섯 권의 작품을 남겼고, 그 작품들은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시기까지 절대적인 사도적 권위를 가졌다. 다만, 우리는 현재의 학문적 논의를 통해 그가 프로클루스(Proclus)의 철학과 갑바도기아(Cappadocia)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6세기의 시리아 수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세종
이세종 개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나이 40에 이르러 예수를 믿었는데, 그 전까지의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세종은 1880년에 전라남도 화순 등광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서 어렵게 자라났고, 28세 때부터는 남의 집 양자 겸 머슴으로 생활했다. 십여 년 머슴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적지 않은 재산도 모았다. 자녀를 갖기 위한 방책으로 산당을 짓고 굿을 하기도 했지만, 40세에 예수를 믿고 나서 그의 삶 자체가 변했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
사랑을 중심으로 신비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중세 최고의 영성가. 1090년 프랑스 디종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1113년, 자신의 형제들과 삼촌 등 30여 명을 이끌고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시토 수도원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운 뒤 수도원장으로 일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베르나르는 이곳을 중심으로 68개의 시스터시안 수도원 공동체를 새롭게 세웠고, 이 수도원 아래로 360여 개의 수도원 공동체가 모여들었다. 특히, 제도화된 의례와 의식을 강조하던 당시의 클루니 수도원에 맞서 베르나르는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강조했다. 한편, 12세기라는 격변기에 그는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 활동을 펼쳤다. 십자군 운동을 독려하고, 당시 최고의 비판적 지식인 아벨라르(Abelardus)와도 논쟁을 벌였다. 1145년에는 한 때 자신과 함께 지냈던 유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이 됨으로써, 베르나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153년에 죽은 베르나르는 1174년에 성인으로 추인되었고, 1830년에는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겸손과 교만의 단계에 관해서》 《아가서 설교집》 《숙고할 문제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등이 있다.
엮은이 한국고등신학연구원
KIATS(Korea Institute for Advanced Theological Studies, 한국고등신학연구원)는 세대를 잇는 기독교 인물 양성, 한국 기독교 유산의 집대성과 세계화, 동양과 서양 기독교의 상호이해와 소통,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범 교단적인 장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설립된 단체로 '사람, 인프라,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하늘의 비밀을 훔쳐보고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발굴하여 세계적 시각으로 기독교 연구를 수행할 능력과 비전을 갖춘 인물을 키우고, '한국 기독교를 위한 연구의 장을 마련'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신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적절한 기반과 여건을 제공하며, \'아시아 기독교와 서구 기독교의 파트너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이해와 공동번영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노르위치의 줄리안
영국의 여성 은둔 수도자인 줄리안은 중세 후기 유럽의 대표적인 기독교 영성가 중의 한 명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과 성장 과정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줄리안이 대략 1342~1416년 사이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가 당시 영국 노르위치Norwich 성 줄리안 교회St. Julian’s Church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의 이름을 따서 그녀를 노르위치의 줄리안이라 부른다.
줄리안의 경우 성 줄리안 교회에 딸린 작은 방에 머물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그녀는 교회가 제공하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보살핌에 의존해 종교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은둔자들과 봉쇄수도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줄리안은 자신이 살던 공간 중에서 외부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인 작은 창문을 통해 순례자들과 영적인 대화와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당대 은둔 수도자들이 살았음직한 모습들을 그려 내는 것 외에, 줄리안이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시작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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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미상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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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디오니시우스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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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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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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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한국고등신학연구원,소록도연합교회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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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위치의 줄리안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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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그리우스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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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시아의 베네딕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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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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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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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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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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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엔의 힐데가르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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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그리스도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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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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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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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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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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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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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야콥 슈페너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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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자 막시무스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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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고 2세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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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마쿠스의 요한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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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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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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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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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봉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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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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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 / KI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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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KIATS 기독교 영성 선집 시리즈 세트(전32권)
저자저자 미상,위-디오니시우스,이세종,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엮은이 한국고등신학연구원,소록도연합교회,노르위치의 줄리안,에바그리우스,누르시아의 베네딕트,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외,아타나시우스,이현필,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빙엔의 힐데가르트,무명의 그리스도인,마틴 루터,김재현,필립 야콥 슈페너,고백자 막시무스,귀고 2세,에크하르트,클리마쿠스의 요한,길선주,김익두,주기철,손양원
출판사KIATS
크기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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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구성상품설명 참조
발행일2024-01-21
목차 또는 책소개상품설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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