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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에 있다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용기를 배우다이방인 혼혈의 유다 지파 지휘관,
여호수아에게 밀린 2인자 갈렙.
그는 어떻게 삶의 위기를 극복했을까?
세상의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조차 나를 비켜 가는 듯한 답답한 상황우리는 공의가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 계급이 정해져 있고, 더 올라가고 싶어도 두꺼운 유리 천장은 여전하다. 사회의 공정만 문제인가? 살다 보면 원치 않은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질병에 고통을 받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관계가 원치 않게 무너지기도 한다.
인생이 그렇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장 위를 걷는다. 이런 위기의 지뢰들이 어떤 특정 지대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사방 곳곳에 보이지 않게 매설되어 있다.
세상의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조차 나를 비켜 가는 듯한 답답한 상황,
위기를 살고 있는 당신을 위해 갈렙을 꺼냈다.불공정은 갈렙이 살던 시대에도 동일했다. 갈렙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유대 족속이었으며, 정탐꾼에 선발되었으나 소수의 입장에 있었다. 마지막 지도자 경쟁에서도 밀렸다. 그의 인생에는 위기가 계속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믿음을 지켰다. 갈렙은 일생 전체에 걸쳐 위기를 만났다. 아니, 위기와 함께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언제나 ‘온전함’이 있었다. 그는 항상 믿음으로 옳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의연하게 수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했다.
갈렙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위기는 존재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위기가 나의 삶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비공정의 때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이 순간을 견딜 수 있는가?’ ‘억울한 심경, 혹은 박탈감을 어떻게 넘겨낼 수 있는가?’ 하는 삶의 여러 질문의 답을 갈렙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갈렙이 믿음으로 위기를 이겨낸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믿음으로 능히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응원한다. 때때로 닥쳐오는 삶의 부당한 상황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견디며 헤쳐 나가야 하는지 갈렙이 그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갈렙을 온전한 길로 이끄신 하나님을 만나 그와 같은 인생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격려한다.
“나는 이 책에서 갈렙을 들어 공정한 세상을 만들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공명정대하지 못한 세상의 틀에서 실력을 갖추고도 부당하게 기회를 놓치고 뺏기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위기 상황은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복병들이다. 이런 시대에 갈렙을 무대로 등장시켜 세상의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조차 나를 비켜 가는 듯한 답답한 상황의 실타래를 풀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갈렙을 꺼냈다.”
-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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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잃은 사람들이
기도의 불씨를 다시 태우게 되기를
나는 비록 상처 난 사람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기도를 받으셨고 열매들이 나타났습니다.아내가 중병으로 5년을 견디다 병원에서도 포기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저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절실하게 20일 금식 기도를 했다. 당연히 아내가 치유되는 응답을 기대했던 저자는 원하던 응답이 없음에 기도에 상처를 받고 말았다. 상처를 받은 후에도 '목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는 했지만 형식만 있을 뿐 알맹이는 없었다. 그러던 저자가 기도를 회복하게 된 계기는 기도에 있다. 그가 아프고 힘들고 지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과 상황을 만지시고 회복시키시며, 저자의 마음을 만지셨다.
이 책은 어느 누구의 기도로 회복된 간증 스토리가 아니다. 기도로 큰 힘을 발휘하여 고난을 이겨낸 다양한 성경의 인물 이야기다. 단지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인 보통의 인간이 기도를 통해 어떻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말씀을 통해 다시금 보는 계기가 된다. 많은 한국 교회가 기도를 잃어 가고 있다. 공예배와 모임들이 사라지며 기도 소리도, 찬양 소리도 사그라들었다. 더욱더 기도가 필요한 이 때에 성경을 통해 다양한, 올바른 기도의 방식을 배우고 그 응답을 누리면서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이 책을 통해 기도에 상처를 받았던 독자들이 기도로 회복되는 귀한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한다.
“나는 비록 하나님께 상처 난 사람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기도를 받으셨고 열매들이 나타났다. 그것이 재미가 있어 더 많이 기도했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원래의 기도자로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기도로부터 온 상처는 기도로 치유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은가혜 되든, 되지 않든 계속 엎드리고 기도했다. 그러다 보니 기도의 상처가 아물어 가고 응답 실패의 상흔도 희미해져 갔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도에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쓰는 기도 필살기에 해당한다.” _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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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예배가 되며
삶이 전도가 되자
‘이미’ 구원과 ‘아직’ 성화 사이에 있는 크리스천들이여
나이롱을 벗고 진짜 성도가 돼라!'성화'는 죄악된 옛 본성을 벗고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은 개인의 성품과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크리스찬북뉴스〉의 편집인 정현욱 목사는 존 라일의 《거룩》을 평하면서 “성화는 성도 안에 심어진 생명의 말씀이 발화하여, 생각과 삶을 통해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거룩, 즉 성화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삶을 통해 결실을 맺어야 한다. 성화가 없는 신자는 죽은 신자, 즉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 1위 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거룩함 사이의 간극으로 인한 괴리감이 크다. 저자는 이를 "개인의 신앙이 성화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하며, "성화는 내 생각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고, 삶 전체가 성화의 자리에서, 내가 살아가는 생활 영역이 성화이 자리가 될 때 개인에서 나아가 교회가 세상 가운데 교회다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화 신앙만이 다시 재림신앙 순교신앙을 회복시키고, 정직하게 살아내고자 하는 성화에 대한 갈망만이 한국 교회를 다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의 신앙이 구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여 삶에서 드러나도록 권면하며, 신앙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예배가 되며, 삶이 전도가 되도록 많은 크리스천을 십자가의 거룩함 앞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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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회학교 비전 제시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미래에 대한 교육의 투자이다. 교육은 투자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교육의 순리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현재에 투자해 놓고 미래에까지 열매를 보려고 한다. 따라서 필자는 2천년대 미래 교회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교육에 투자할 것을 제언했다. 두번째는 교사론이다.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교사들에게 있다. 시대가 어떻고 교회 당국의 지원이 미비하고 등등은 변명이 될 때가 있다. 교사들이 살면 성경책 한 권 갖고도 얼마든지 교회교육을 부흥시킬 수 있다. 교사들의 분발과 새로운 부흥을 촉구하는 부분이다. 세번째는 현장적인 이야기들이다. 새롭게 시도되는 프로그램, 교육내용들을 교회학교교육의 일선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본서에 수록했다. 이 책이 교회교육을 걱정하는 많은 분들에게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찾아나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기쁘겠다. - 저자 머리말 중
[본문중에서]
1.왜 생명경시 현상이?
몇 년 전에는 경쟁처럼 자살 소동이 벌어지더니 요즈음에는 별의별 일들이 꼬리를 물어 국민들을 경악시키고 있다.
보험금을 노린 아버지가 자식의 손가락을 절단하더니 슈퍼마켓 주인이 자신의 발목을 절단했고, 택시운전사는 철로에 발을 묶어 스스로 발목을 절단하는 기상천외한 자작극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사방곳곳에서 공짜 돈을 노린 자해의 범행들일 수없이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초등학생이 급우를 총기로 살해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중학생이 자기보다 학년이 낮은 여중생이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목을 찔러 현장에서 즉사하도록 만들었다.
지난날의 자살, 투신, 분신 등은 나름대로 명분이라도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신 자살을 하거나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학생들은 공부에 짓눌려 어린 마음에 공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지금은 죽는 것도 아니고 보험금을 노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끼친다. 한 사람이 시작하면 곧장 그것을 모방하여 멀쩡한 사람들까지 순간적으로 미혹되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살인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날의 살인은 먹고 살기 위해 살해하는 특정인이 있었고 살해하는 목적도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상이 불특정 다수이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대상도 없이, 원한도 없이 살해한다.
얼마 전 젊은 엄마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였다. 살해의 동기를 물었더니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는 것이다. 마음이 울적하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어린 아기가 칭얼대는 것을 보니 짜증이 나서 그냥 죽였다는 것이다.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없다. 이유라면 '그냥'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는 것은 얼마나 가공할 만한 야수성인가?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류의 살해 충동이 평범한 사람들의 심정 속에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째려보았다고 죽이고, 좋은 차 타고 다니는 게 약이 올라서 죽이고, 몇 천 원 빼앗으려고 죽인다. 전화 오래 건다 불평했다고 느닷없이 칼을 꺼내어 백주에 도로에서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그야말로 파리 목숨보다도 가치가 없다. 우리 주님께서는 온 세상과 맞바꿀 수 없는 게 생명이라고 하셨지만, 현대인들에게 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의사들과 그 가족들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 보려고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적들과 싸우고 있는데, 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 알기를 우습게 여겨 살해하고 자살하고 함부로 생명을 단축시킨다.
문화가 점점 발달하고, 문명이 향상되면 인간 생명에 대한 가치도 높아가야 하는데, 지식 수준이 높아가고 삶의 질이 향상 될 수록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뭔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반증이요.
인류는 파국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한다.
2.세상 종말의 징조
역사적으로 한 시대가 멸망하고 사회가 멸망하려면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 생명경시 현상이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 인간으로 변장하고 찾아간 천사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을까? 소돔성의 남자들은 남색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롯을 살해하려 들었다.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지 못했다고 롯을 죽이려 덤벼드는 처사에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우습게 여기는 생명경시의 사상이 들어 있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악질 인간이 있어 왔지만, 현대는 생명을 경시 여기는 현상이 일반화, 보편화되고 있다는데 문명의 위기가 있다.왜 이런 생명경시의 현상들이 일어설까?
첫째, 어릴 때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자연과 함께하고 생물들과 함께 자라나므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스러움을 습득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자연고 함께 자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삭막한 아파트의 숲, 흙 내음새를 차단시켜 버리는 아스팔트의 메마른 도로,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짐승과 식물 등에서 아이들은 생명의 경외라는 것을 참지 못한다.
모든 것이 물건화, 물질화가 되어가고 있다. 물건은 손상되었다가도 수리되고 북구 된다. 수리가 안 되면 내버리면 그만이다.
주변에는 얼마든지 물자가 풍부하고 좋은 제품들이 많다. 이런 사고가 생명 문제까지도 이어진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3백 원이나 1천 원씩 하는 병아리를 한 마리씩 구입해서 아파트 친구네 집으로 몰려간다. 자기 병아리의 발목에 제 이름을 쓴 쪽지를 테이프로 붙이고 10층 꼭대기에서 내 던진다. 어느 병아리가 가장 마지막에 죽는가? 어느 병아리가 살아남느냐가 아니다. 아이들은 돈내기를 한다. 생명을 걸고 돈내기를 한다. 병아리가 떨어져 바득거리며 죽었다는 불쌍한 생각보다는 일찍 죽어서 돈을 잃었다는 아까운 마음들만 팽배해 있다.
지난날, 병아리가 죽으면 눈물 흘리고 마당 한구석이나 뒷산에 묻으며 눈물 흘리던 이야기는 전설(?)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눈물 흘리기는 고사하고 묻어 주지도 않는다.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식탁 앞에 앉아 밥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조금도 없다. 자연과 함께 자라지 못하고 자연 속의 생명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른다.
둘째, 인간 생명에 대한 가치가 절대 하락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많아지면 그만큼 그 가치는 하락한다. 인구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가 그만큼 헐값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인구수가 많지 않았을 때는 누구 한 사람이 죽어도 큰 뉴스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수도 많고 대형 사고로 수백 명씩 목숨도 잃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다보니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점점 엷어지고 죽음이 우습게 여겨진다. 특히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는 동정심보다는 구경꾼 입장이 되고, 심지어는 엄청난 보험료에 더 관심이 가는 야릇한 심정이 된다.
생명은 제품이 아니다
지금 세계 인구는 70억을 돌파했다. 지구상에 70억의 인구는 과포화 상태이다. 앞으로의 위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인구문제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자연히 물 문제, 식량 문제, 대기오염 문제 등으로 국가간에 인종간에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고 살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구는 자멸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예언적 추측들이 결국에는 인간의 죽음을 방조하고 생명경시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지구가 살아 남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것은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제 수명을 채우면 인간 세상은 과밀 인구 때문에 파멸하기에 재해, 교통사고, 질병, 전쟁으로 인해 일부의 인간은 죽어 주어야 지구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이런 사고가 암암리에 모든 사람들에게 오염되면서 생명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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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다.
당신 안에 예수가 있는가?믿음이 있으면 뒤쳐졌다 생각하는 세대에 묻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우리 시대에 종교는 꼭 필요할까?지금 세상은 무신론, 종교 해악론, 종교 말살론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인류가 신의 섭리에 따라 서로를 짓밟고 살아왔기에 지금부터는 인간다운 판단과 실천으로 신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이라는 존재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일종의 폭력행위이며, 나쁜 역할도 많이 했고, 인류 역사에 지은 죄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신론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종교를 공격하는 집단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비판받고 폄훼되고 사방으로 공격을 당하는 중이다. 비이성적이고 독선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 종교 유물이라 조롱한다. 이런 주장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청소년, 청년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탈 기독교를 외치며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처럼 인간은 종교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정말 종교 없이도 행복할까?
믿음이 없어도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구원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은 없다하나님 없이도 쾌적하게 살 수는 있다. 자녀들을 잘 키우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믿음을 갖고 있고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서도 소중하지만 삶과 죽음이 교대하는 그 순간에 더욱 필요하다.
유한한, 영원에 비하면 점 하나에 불과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분명한 것은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도 아니고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 산물도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약속된 구원으로 지금도 그 이후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진화론적 종교’와 ‘창조론적 종교’ 사이에 있다. 과학과 진화론이 감당할 가시권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종교와 창조론이 감당하는 비가시권은 분명 존재한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살지만 우리 영혼을 채우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권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주의 시작과 끝을 계시하는 성경을 토대로 우리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토대로 하는 믿음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론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책은 진짜 믿음, 진짜 구원, 영원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교생활이 정말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는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구원의 확증과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고자 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