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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불온함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그분과 대화하고, 묻고, 의심하고, 확인했던 날들의 기록이탈리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프랑스 등을 다니며 수도원과 교회, 미술관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과 공동체를 만났다. 물결처럼 사무치는 ‘고독’과 그분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침묵’,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며 건네는 ‘기도’를 벗 삼아 걸었던 순례의 날들을 잔잔하게 써내려간다.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지, 어떤 삶의 풍경과 마주할 것인지, 또 영원의 중심이신 분의 마음은 어떠한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40여 일의 순례 여정.
▒ 출판사 서평 “순례자의 가장 큰 특권은 길 잃을 권리” 나침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북쪽을 가리킨다. 한 번에 정확하게 북극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러나 올곧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일생 동안 ‘나침반처럼’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과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균형 잡힌 영성과 날선 통찰, 탁월한 수사학으로 주목받고 있는 청파감리교회의 김기석 목사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고 명료하게 분석하면서도 그 아픔을 절절하게 풀어낸 그의 설교는 ‘한국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설교’라 불릴 만큼 문학적이다.
그는 30년 동안 한 교회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역했다. 환경과 나라와 사회를 위한 기도 또한 멈추지 않으며 달려오다 마침내 안식의 기간을 선물 받았다. 안식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 있는 수도원과 교회, 미술관을 돌며 예수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이 책은 그 길 위에서 기록한 40여 일간의 순례 일기이다. 누구를 만날 것인지, 어떤 삶의 풍경과 마주할 것인지, 또 영원의 중심이신 분의 마음은 어떠한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을 저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써내려갔다.
30년 사역의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그가 스스로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불온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앙과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 언제나 의문부호를 붙이며 날이 선 채 살기보다 두루 원만하게 지내는 게 편해진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각을 잃어버린 사각형의 비애에 사로잡힌 그는 이번 순례의 여정에서 가장 큰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잃어버린 나의 불온함을 찾는 것’이었다.
물결처럼 사무치는 ‘고독’과 그분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침묵’,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며 건네는 ‘기도’를 벗 삼아 걸었던 순례의 날들을 저자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와 저자가 직접 찍은 60여 컷의 사진과 함께 만난다. 깊은 안식을 가까이 하면서도 단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과 공동체 속에서 보낸 저자의 ‘영혼을 닦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 길 위에 선 일상순례자 일기
김기석 목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로 ‘길 위의 사람’, ‘일상순례자’가 있다. 그에게 ‘길’ ‘삶’ ‘순례’라는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 그가 정말로 길 위에 혼자 섰다.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프랑스, 독일 등 두 달 가까이 치열한 사역 현장을 벗어나 진짜 순례를 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때론 오랜 시간을 걸으며, 때론 수도원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침묵하거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지내며 보냈다.
순례 기간 동안 정직하게 기록한 글에는 군중 속에서 느꼈던 외로움, 예기치 않은 소소함에 대한 감사함, 대하는 사람들과의 친밀함도 있다. 이것은 낯선 길 위에서의 순례와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순례와 얼마나 비슷한지를 알려준다.
♠ 문학과 영성이 어우러진 수도원 기행
이탈리아 아씨시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부터 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스 소피아, 조지아의 사메바 성당, 아르메니아 흐립시메 교회 등 여섯 개 나라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을 찾아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그곳의 숨겨진 가치를 기록했다.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미술관까지 그곳에 대한 역사와 배경을 기초하여 풀어낸 아름다운 문장은 마치 독자들도 함께 그곳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또한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에서 지낸 수여 일 동안 청소년과 사역자들의 연합과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배움을 풀어놓았고, 독일의 전시관과 건축물을 보며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생각했다.
여행지에 대한 해박한 배경 지식과 함께, 폭넓은 문학적 소양 그리고 깊은 영성까지 어우러진 책은 지금껏 나왔던 저자의 책과는 또 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 한국 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문
저자는 유럽과 아시아 등지를 다니면서도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마음을 계속적으로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아픔을 함께 느꼈고, GOP 총기 사고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지탄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고 사는 이들과, 눈물 마를 날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 내 문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가자지구 폭격 등과 같은 전 세계의 아픔을 품에 안았다.
순례의 길 위에서 자신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주위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는 그의 글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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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에서 그치는 신앙을 넘어 삶으로 증명하는 신앙으로!
산상수훈에서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과 영성! 희떠운 말의 성찬 속에 삶이 실종되어버린 우리 시대,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에 품고 몸으로 살아내야 할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목회자 겸 문학평론가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산상수훈이라는 맑고 깊은 샘물에서 비움과 나눔, 온전함과 하나 됨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고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의 ‘길’을 찾아간다. 신앙은 삶을 통해서만 입증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하나님을 정의라 고백한다면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앎은 넘치나 삶은 증발해버린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다시금 삶의 현장에서 참된 신자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책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 고백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희떠운 말의 성찬 속에 삶이 실종되어버린 우리 시대,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에 품고 몸으로 살아내야 할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왜 성경은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는가?
이 책은 목회자 겸 문학평론가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의 모습을 제시한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얻은 귀한 가르침을 토대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목회 현장에서 늘 시대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온 저자는 신앙생활을 가리켜 지난한 조율의 과정이라 말한다. 수시로 하늘의 뜻에 자기 삶을 비춰보고 그 뜻을 기준으로 삶의 목표와 과정을 조율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조율하며 살기를 원하고 시대정신을 거슬러 삶의 근본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은 너무나 선명하고 실제적인 삶의 길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산상수훈이 진정 우리의 길이 되려면 실제로 그 길을 걷는 이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앞서 걸었고 그분의 제자들이 따라 걸었던 그 길을 실제로 걷지 않는다면, 산상수훈은 더 이상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앎은 있으나 삶은 사라진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매를 걷어붙이고 돌을 치우고 온갖 잡된 것들을 뽑아내어”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이 길을 다시 함께 걷자고 권면한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걸어감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렇듯 삶으로 증명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누군가의 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하나님을 정의라 고백한다면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삶이고, 교회가 교인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교회가 할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신자들의 삶과 교회의 구조 속에서 구현되느냐, 이것이 교회의 성장을 재는 척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손과 발, 시간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서 말씀이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세상에 말하게 해야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앎은 넘치나 삶은 증발해버린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확인하게 해준다.
♠ 비움과 채움의 신앙
산상수훈의 첫머리 팔복을 묵상하며 저자는 받는 복 대신 사는 복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무조건적으로 ‘받는 복’보다는 ‘사는 복’, 바로 복된 삶을 사는 비결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바로 비움과 채움이라는 두 가지 열쇠에 달려 있다. 비움의 관점에서 저자는 가난한 마음이란 습관적으로 어깨를 견주어보고 각(角)을 세우는 자세를 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창고에 쌓아둔 ‘교만’의 칼과 ‘적의’의 창, ‘열등감’의 방패를 모두 쓸어내야 한다.
팔복이 신자들에게 주는 두 번째 열쇠로 저자는 ‘채움’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존재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가 그 존재를 규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그 존재 안에 성령님이 담겨 있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과 허망한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그는 ‘신자’라 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게 되는 나라도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요, 세상 아픔에 눈물 흘리는 자를 위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온유한 자를 알아보고 그에게 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에 가득 채워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 정의를 위해 슬퍼하는 신앙
목회 현장에서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저자의 설교와 글에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용산 참사와 촛불 시위 등 우리 사회의 현안을 외면하지 않을 뿐더러 팔짱을 끼고 멀찍이 서서 고통의 원인을 해석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도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를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요 교회의 본분이라 믿기 때문이다.
성경은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이 떨린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신다. 불의에 대한 고발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토라와 예언서를 꿰뚫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울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땀 흘릴 때, 정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허덕일 때, 비로소 예수의 십자가와 결합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한 슬픔은 자기 연민을 환기시키는 값싼 슬픔이 아니라, 이렇듯 존재의 다른 차원을 여는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궁극적 위로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 평화를 이루는 신앙
‘평화’와 ‘생명’ 역시 저자의 설교와 글을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거대담론으로서의 화두가 아니라 일상의 삶, 언어와 소비 습관, 관계를 통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우선 밥을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마음, 배가 고파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 산 짐승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밤과 도토리를 남겨두는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고 평화의 문을 여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힘으로 이루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애초에 저자는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고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영적인 바벨론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나눔과 섬김,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고, 평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으며 그분이 시작하셨으니 그분이 완성하실 것이라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의 태도이다. 우리는 헤아리고 낙심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심으라고 보냄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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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글은 언제나 잔잔하면서도 풍요롭다. 그건 참 묘한 경험이다. 침착함 속에 넘치는 열정과 그저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하는 성찰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의 영혼 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하나 있구나 하는 감탄이다. 대단한 독서가로 알려진 그의 글에는 그의 독서 편련이 묻어나고,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사와 현실에 대한 생각의 무늬들이 그대로 손에 만져진다.
《아슬아슬한 희망》은 제목 그대로 갈수록 암담하고 점점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대에 참된 삶의 의미를 묻고 사람과 역사에 대한 ‘희망’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루만지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을 말할 수는 없었”고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신앙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과 암울한 시대에 세월이 참 무상하지만 불멸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실천의 길에 들어설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이의 순결한 마음과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는 외로운 결연함이 스며있다.
어떤 이는 그의 글에 대해 “몸에 박힌 가시일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고통 받고 억눌린 이들의 현실을 주시하고, 이들의 삶을 괴롭게 하고 있는 권력과 현실의 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바로 그것이 예수의 마음임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에 깊숙이 박히고 있는 가시다. 그러나 그 가시는 진정 무엇 때문에 아파해야 하며 무엇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며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무엇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지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와 닿는다. 그의 글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하지만 그 진지함은 지루하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이 보여주는 성실함의 무게와, 성서 해석의 진실성,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픔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웃는 자와 함께 웃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억울한 고통에 시달려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다름 아닌 복음의 진정한 역할이다. 그런 까닭에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서슴없이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현실과 외롭게 쟁투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사람음의 본래 가치가 회복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염되지 않고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이 세상을 일깨우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생명은 기적이다”라는 글의 마무리에서 “내가 기적인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은 기적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면서 등굣길의 초등학생, 산책중인 아주머니,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할머니, 자원봉사중인 아저씨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린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게도 하나하나 사랑을 불어놓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그 사랑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힘과 싸워야 할 때는 물러섬이 없다. 그런데 이 예언자적 육성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쫓겨나고 밀려난 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
생명에 대한 소명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교회가 갈 길이라고 외치는 그의 육성은 그의 책 곳곳에 스며있다. 이는 어쩌면 이미 세상의 대세를 쥐고 있는 질서에 대한 역습과 전복(顚覆)이 된다. 하여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글은 오늘날, 힘없이 현실의 위력에 무너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된다.
김기석 목사의 설교가 고사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말씀의 전범(典範)이 될 만하다면, 그의 칼럼은 탁류가 넘치는 강을 뚫고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줄기와 같다.
바람 부는 날에도 밭에 나가고 구름이 낀 날에도 들판에 나간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의 갈 길이다. 이 암담하고 답답한 시대의 거리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온통 열기에 지쳐 가는 가 했더니, 생명의 멋진 바람이 분다. 김기석 목사의 말과 글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기력을 부어준다. 물론, 그것이 김기석 목사의 헌신과 능력의 소산이겠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득 담긴 말씀이기에 그렇다.
이제 그의 책에 대한 소개를 따로 뭔가 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그가 쓴 문장들을 음미하는 편이 훨씬 낫다. 자칫 그가 쓴 문장들을 추상화하고 그로써 글맛을 잃게 할까 싶어서다.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希 자에는 ‘바라다’라는 뜻도 있지만 ‘성기다’, ‘드물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상처를 빛나는 흔적으로 만들고, 연약한 것을 보듬어 안고, 뿌리가 드러난 것을 북돋는 이들이야말로 희망의 전사戰士라 할 수 있다.”(66쪽)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허황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이들과 더불어 새 세상이 도래한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과부와 같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희망의 나무는 커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희망의 나무’는 오롯이 현재의 삶에서 움트기 시작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래도 그는 묻기 시작한다.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건만 우리는 그 인생의 일상적 의미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상은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은 대개 담담하고 심심하다.”(153쪽)
그렇지 않은가? 일상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는 자랄 수 없으며, 그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길러지지 못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성찰은 자연히 뿌리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성찰의 시간을 익혀나가는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그건 마치 오랜 손맛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된장 맛이며, 그로써 우리의 일상에 건강함이 채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일상으로 제대로 돌아오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번거롭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리듯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삶의 길을 조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괜히 거짓의 맨 얼굴을 폭로하려다가 봉변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포승줄처럼 우리를 묶고 있다.”(100쪽)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대단한 것을 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과 영혼은 자꾸 폐허를 닮아가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진리’로 성숙해져야 할 영혼의 공간이 폐물이 되어간다는 것이 다. 우린 그걸 일상에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소소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건 조르쥬 쇠라의 그림 한 장을 보고 쓴 이야기다.
“조르쥬 쇠라가 1886년에 출품한 그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을 바라본다. 수많은 색점을 찍어 그린 이 그림은 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휴일의 한 때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호수에는 작은 배들도 떠있다. 그런데 화면은 마치 시간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린 듯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쇠라의 그림 속에서 일상은 영원과 잇대어 있다.”(70쪽)
이런 재창조의 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날로 그 삶이 폐허로 변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비극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할 때마다 김승희 시인의 <제도>를 떠올린다.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 공부 책을 칠하고 있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색칠이 나갈까 두려워한다. 아이는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답답하다. 죽은 풍경이다.”(168쪽)
그렇게 그는 인간을 옥죄이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때 인간의 존엄은 스러지고 만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돈의 전능함이라는 허구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유와 진리에의 열정이 회복되는 순간, 우리를 휘몰아가던 그 맹목적인 열정은 잦아든다. 비로소 이웃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100쪽)
아,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라는 문장 하나만 제대로 잡고 살아도 우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그의 단상은 또 이렇게 펼쳐진다.
“모든 길은 단순히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공간이 아니다. 길은 사람들이 걸어 생기는 것이지만, 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기억의 온축이다. 길은 지향이기에 희망이고,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그리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길을 잊었다는 데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걷는 동안에는 희망도 그리움도 떠오르지 않는다.”(55쪽)
우리는 사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건 일상의 경치다. 그러나 경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불안하다. 아니, 늘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런 인간들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해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해라’, ‘그 문제에 붙들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가 가하는 폭력이다.”(129쪽)
그래서 그는 이런 세상에 가득 찬 것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세계를 재배치한다. 그들과 만나 상처를 입지 않고 물러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를 닮았다.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넋이 빠진 친구들에 그들은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다. 욥의 죄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불행이 그의 죄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판 욥의 친구들이 참 많다. 쓰나미나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태를 두고 불신앙 운운 하는 종교인들 말이다. ‘모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앎’은 독선이요 폭력이 아니던가? 딛고 서야 할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우처럼 ‘안다’고 하는 자부심은 때로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나의 ‘앎’ 혹은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타자와 소통할 여지는 줄어든다. 타자는 동화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171쪽)
여기에 더해 이렇듯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앙과 관계없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표독’해지는 이들을 자기 확장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자유로운 질주는 불가능하다”며 날선 비판과 함께 가느다란 실눈을 뜨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 시대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정직이라 말하고, 남을 짓밟는 것을 경쟁력이라 말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쥐어짜는 것을 효율성이라 말한다.”(192쪽) “욕망의 특색은 도취와 중독이다. 욕망에 중독된 영혼은 파괴되는 문화와 자연을 위해 울지 않는다.”(28쪽)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있다.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눈을 뜨면 된다.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아니 우리가 차마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마음에 등불 하나 밝혀지면 과도한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의 꿈이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290쪽) “먼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욕망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내적 자유가 유입된다.”(250쪽)
주옥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그 주옥같은 이야기에는 진심이 있고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다. 그의 이러한 성찰은 교회, 기독교를 향해서도 가차 없이 쏟아진다.
“크기의 신화가 거룩함이라는 지향을 대체한 후 교회는 더 이상 다른 세계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교회는 시인으로 하여금 30만 원으로도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든든함과 넉넉함을 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추문거리가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상호금융권에 대한 감사를 벌이다 보니 교회에 대출해 준 돈이 4조9천억 원에 이른다 한다. 제1금융권이 대출해 준 4조원을 합하면 거의 10조에 이른다. 교회가 매달 금융권에 이자로 갚아야 하는 돈이 600억 원이라 하니,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했던 예수의 가르침이 무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라’ 했더니 세상의 ‘빚이 되었다’며 비아냥거린다.”(95-96쪽)
이제 그는 일상을 넘어 우리가 마주하는 시대의 아픔에 다다른다.
“분향소 앞,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색 깃발은 마치 죽어간 이들의 넋인 듯하여 나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돌아선 채 눈물을 훔쳤고, 또 어떤 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그러쥔 채 영정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애도의 물결을 막으려는 이들, 애도가 분노로 화하지 않을 방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저 펄럭이는 노란색 깃발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186쪽)
분향소 앞 광장에서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는 그는 이 시대의 아우성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 광장마다 내걸린 깃발은 우리를 ‘애수’의 정한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그들을 성급하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하냥다짐이다.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잊어도 신은 잊지 않는다. 신은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지은 죄를 당신이 받는 모욕으로 간주하신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189쪽)
이러한 애끓음은 팽목항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피에타를 보고 있다. 그 피에타는 저 무심한 진도 앞바다를 품고 있는 팽목항에 있다.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데 그 피에타의 품에는 자식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돈 귀신에 들린 기업가, 관리 감독 책임을 방기한 관료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보다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해경, 그리고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정부, 그리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별 일 없겠지’ 하며 무사안일하게 살아온 우리가 공모하여 죽인 이들이 지금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양심을 돌아보라고 다그친다. 팽목항 앞의 피에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그칠 수 없다.”(215쪽)
그러면 절망하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다가 ‘한 사람의 혁명’이라는 말에 붙들렸다. 깊이 각성된 한 사람이 검질기게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비록 좁지만 종국에는 생명 세상과 통하게 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식물에 물을 주고, 염천을 마다하지 않고 밴 것을 솎아내고, 벌레를 잡아주는 농부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혁명가가 아닌가? 누구는 그런 이를 가리켜 최초의 인간이라 했고, 하늘의 빛과 만나 눈이 밝아진 바울은 그런 이를 가리켜 새로운 아담이라 했다. 시절은 바야흐로 새로운 아담을 기다리고 있다.”(87쪽)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문풍지가 된 사람들’을 그리며 희망의 불빛을 티운다.
“어둑새벽 거리는 지난밤의 향락과 도취의 흔적들로 인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도시인의 말끔한 아침을 위해 야광천을 덧댄 옷을 입은 채 새벽거리를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들을 본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묵묵히 비질을 하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혼곤한 소비의 흔적들을 수거하기 위해 청소차에 매달린 채 달려가는 이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저편 어둠 속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을 돌보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을 본다. 절망의 황소바람에 맞서며 역사 속에 온기와 웃음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문풍지로 선 그들에게서 문득 거룩함의 온기를 느낀다.”(274쪽)
이런 모든 의식과 자세와 깨우침이 이 척박한 세상에 희망을 일구는 길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지켜내고 그 존엄한 권리를 옹호하며 생명의 세계를 평화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순례의 경건함으로 재창조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해서 성소가 되어간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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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좌표들이 방향을 잃은 시대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성경과 문학, 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낸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주어진 삶의 자리에 따라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지만,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가 있어야 한다. ‘예수’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는 거룩한 세 나침반을 한 책에서 만나다! 출애굽의 대강령 ‘십계명’, 예수 정신의 핵심 ‘주기도문’ 그리고 교회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을 통한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길 찾기. 길이 끊긴 곳에서 서성이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하지만 새로운 길’을 보여주다!
▒ 출판사 리뷰
“삶의 자리에서 몸으로 구현해낼 거룩한 메시지”길이 끊긴 곳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가장 견고한 이정표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
나침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북쪽을 가리킨다. 한 번에 정확하게 북극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러나 올곧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니며 확신에 차 있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어 회의를 느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렇게 일생 동안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과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뛰어난 영성과 날카로운 통찰, 탁월한 수사학으로, 한국 교회 강단의 새로운 모범으로 부상하는 청파감리교회의 김기석 목사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고 명료하게 분석하면서도 그 아픔을 절절하게 풀어낸 그의 설교는 ‘한국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설교’라 불릴 만큼 문학적이다.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얻은 가르침을 토대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던 《삶이 메시지다》 이후 두 번째로 포이에마에서 내는 저자의 책은 《삶이 메시지다》에서 보여주었던 ‘길 찾기’의 연속이자 심화과정이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 따라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걸을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가 있어야 하며, ‘예수’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거룩한 세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 세 가지 나침반은 출애굽의 대강령인 ‘십계명’, 예수 정신의 핵심인 ‘주기도문’ 그리고 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식상하고 낡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으로는 외되 몸으로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 걷지 않은 길’이며 ‘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나침반을 ‘오래된 새 길’이라 이름 붙였다.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의 문장 하나하나를 우리 삶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썼다. 앎과 신앙과 실천이 하나 되는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기독교인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될 이 책은 길이 끊긴 곳에서 서성이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하지만 새로운 길’을 보여줄 것이다.
♠ 세 가지 이정표를 한 책에 담다‘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이자,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할 메시지이다. 우리에겐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이 텍스트는, 예배시간에 입으로 외는 문자로 그칠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해야 할 강령이자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이 책은 ‘몸으로 구현해낼 기도’라는 주제로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한데 모았다. “고백 없는 실천은 건조하고, 실천 없는 고백은 공허하다” 말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결국 이 세 가지 메시지는 우리 삶에서 드러나야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각각 기독교 출판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이나,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모아,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한국 교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해 풀어낸 것으로 차별성을 두었다.
♠ 치열한 길 찾기 과정을 아름다운 문체에 담다이 책은 ‘십계명’의 열 개 문장, ‘주기도문’의 아홉 개 문장, ‘사도신경’의 열두 개 문장, 총 서른 한 개의 문장을 오랜 기간 치열하게 묵상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단순한 교리 강해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재해석한, ‘오늘날의 십계명,주기도문,사도신경’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교회와 성도, 공동체, 또 그들의 고된 삶의 발걸음들이 모두 들어 있다.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 개개인의 아픔과 같은 소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이주 노동자의 현실 등의 사회적 문제, 그리고 신앙서적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여러 문학작품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생한 삶의 현장을 포착하고, 또 그것을 길의 중심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 교회를 향한 열망을 명료한 언어에 담다저자는 또한 목회자와 성도, 교회의 성찰을 간곡하게 요청한다. 지금도 이 땅의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지만 진실된 영적 각성은 사라진 것이 한국 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설교 홍수 시대’에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나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틈도 없이 말씀을 생산해내야 하고, 성도는 더 이상 그런 설교를 들으며 예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서 ‘십계명,주기도문,사도신경’은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닌, 날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이다. ‘십계명,주기도문,사도신경’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지한 성찰 과정을 거친 교회가 예수와 함께 길을 걷기를 원하는 저자의 열망이 책 속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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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석 목사의 글에는 동서양의 고전과 영성가의 명언, 시인의 정제된 시구들이 풍성하게 인용되고 접속되지만 그 모든 인용과 참조의 글들조차 그의 글 속에 용해되면서 온전히 그의 말 가운데 성육되는 진경이 그의 글 가운데 펼쳐진다. 이러한 글쓰기의 진경이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그가 이전에 펴낸 일반 에세이집과 다르게 이 책은 성경 <요한복음>을 화두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성경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요한복음 주해나 강해의 성격으로 국한시켜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 전혀 색다른 성서 강해나 주해의 실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색깔은 김기석 목사 고유의 체취로 풍성하면서도 독창적인 요한복음 해석의 보화들로 넘실거린다.
이 책의 구성은 요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9장의 설교 메시지를 깔면서 그 전후로 또 다른 9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요한복음의 행간을 헤집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2.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4-5쪽)라고 언급하지만 그렇게 전투적이고 도전적인 성경 에 두고 그르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묵상의 자세가 오감의 독법을 지나 그의 가지런한 글속에 정돈될 때 그의 말들은 조야한 묵상의 찌끼를 사라지고, 놀라워라, 한 송이 꽃처럼 부드러운 초청과 권유의 메시지로 거듭난다.
이처럼 그의 글쓰기는 묵상의 발톱과 이빨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만용과 정반대편에서 치열한 도전과 투쟁의 몸짓을 겸손한 말의 품에 쟁여두는 부드러움의 해석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자기방어적인 변명을 위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설득과 권면을 위한 목회적인 부드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의 성경 해석에서 그는 그 말씀에 안주하기보다 모험하며 불편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을 내던지는 활공의 길을 택한다. 도저히 기존의 권위자들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 안주적인 성경 묵상에 도취한 세태를 비판하면서 그는 따끔하게 일갈한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84쪽)
3. 그렇게 요한복음을 용감하게 읽고 부드럽게 드러낼 때 요한복음의 성육하신 예수는 이처럼 시적인 아우라를 걸치고 재조명된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16-17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설파하며 ‘함’에 앞서 ‘있음’의 가치를 깨쳐 보여준 게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복음’이자 메시지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그 해당 구절은 바람의 이미지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함께 어우러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점입가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제시한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44쪽)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이미지를 상투적인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연계시켜 얼마든지 투박하게 평균치 교인 대중의 인식에 호응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 상투적인 투박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공교롭게 그 이미지의 실재를 조탁하여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마저도 신령한 작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기발한 상상에 의지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귀찮은 선악과 이야기도 새로운 해석의 돌파구를 연다. 요한복음의 존재론적인 숭고함의 신학적인 기틀 위에서 그가 재조명하는 바,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
사소한 듯 여겨지는 지극히 작은 생명 속에서 거룩함과 눈물을 보는 예수의 시선은 곧 이 땅에 일그러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얼굴에서 위선을 못 견뎌 그것을 뒤집고자 열망하는 저자 김기석 목사의 시선과 잇닿아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종횡무진 요한복음 독법은 이른바 ‘영해’와 ‘알레고리’의 늪에 빠지기 쉬운 본문들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 메시지의 신선함은 또 신산한 세상살이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뚫고 가는 이 땅의 대다수 생활인들에게 말씀이 육체로 현전하는 사건을 일상 가운데 온전히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그는 도저한 헌신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이 세상의 악마적 세력과 부대껴 싸우는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킨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집단의 제반 운동에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성을 저당 잡히는 운동권 이념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겉멋으로 고독의 폼을 잡는 게 아니라, 그 고독의 영성적 가치에 절절이 눈뜨고 그것을 그의 목회 현장,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군중을 떠나 홀로 독처하고자 움직인 예수의 동선을 서술한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는 ‘예수 정신’을 본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102쪽)
이렇게 ‘홀로 섬’과 ‘더불어 삶’을 오가며 그는 요한복음의 내밀한 빗장을 열고 독자들을 초청하며 권한다. 이제 이 땅에서 뱅뱅이질만 하지 말고 제발 도약하여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억압을 초월해보라고. 동시에 그는 이렇게 권하는 듯도 하다.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한 가운데가 바로 구원이 샘솟는 자리이니 먼 데로 한눈팔지 말고 그 일상의 세속에서 예수의 영을 살아내며 눈물 그렁그렁한 이웃들과 더불어 극진해지라고.
4. 이 책을 통해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에 넉넉한 포즈로 행복하게 거닐어온 묵상과 성찰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신학과 종교의 지도에 길이 없는 갈릴리의 대지를 걸어 다니며 개척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그의 부활과 함께 ‘그 길’이 되고 ‘생명’과 ‘진리’로 꽃피어났듯, 영지주의자, 초월적 신비주의자, 심지어 얼치기 성령주의자 등에 의해 혼돈의 늪 속에 허우적대던 요한복음이 이제 이 책의 생산과 함께 희한하면서도 심오한 진경의 오솔길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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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라고 하는 우리사회에서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출애굽 사건은 부활 사건과 더불어 성경의 핵심”이라고 본 저자는 고통을 “보시고”,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근심을 “아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애굽’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헬조선’이라고 하는 그런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규정한다. ‘애굽’은 지금 우리 속에도 있고, 우리 세계 속에서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곳에서 ‘애굽’은 발생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애굽’의 모형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제시하는 행복의 신기루를 바라보고 걷는 동안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기에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 가운데 살아남으려면 경쟁의식을 내면화하고 살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긴 이들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경쟁에서 떠밀린 이들의 가슴에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는다. 안식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오랜 꿈은 퇴색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보편적 격률은 가뭇없이 스러진다.
이런 시대에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 머물면서 존엄한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이들의 신음소리를 차마 뿌리치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릇된 권력에 의해 짓눌린 이들 속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셨다.
물론 그 길은 붉은색 카펫이 깔린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광야로 이어진 길이었다.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탈출 공동체는 매혹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옛 삶을 그리워했다. 광야, 그곳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몸과 마음속에 배어든 노예적 습기習氣와 결별할 것을 요구받는 학교였다.
지금 우리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는 저자는 이 시련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야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 속에 끊임없이 불안감을 주입함으로 그 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출애굽 사건이 그러하고,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러하다. 불안감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극복된다. 그런 신뢰가 회복될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유입된다. ‘너와 나’가 서로에게 공속된 존재임을 깨닫고 상대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려 할 때 ‘거룩한 백성’이 창조된다.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오래된 인류의 꿈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은 인류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로의 애굽으로 상징되는 강고한 벽에 틈을 만들어 역사의 봄을 선구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지은이의 바람처럼 “오늘 우리는 이 멋진 일에 부름 받고 있기”에 이 책이 역사의 긴 겨울에 지친 누군가에게 봄이 반드시 온다는 메시지로 읽혀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책의 구성은 전작인 요한복음 묵상집인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처럼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16편의 출애굽기의 현재적 메시지를 깔면서 그 사이사이에 또 다른 56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출애굽기의 주요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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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흔적으로 매 주일 저자의 삶의 지평 속에 만났던 이들에게 띠운 52통의 편지이다. 그들 중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맥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자기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렇듯 저자에게 다가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눠준 그 멋진 벗들이 들려준 고민에 대한 지은이의 응답이다. 편지 글은 잔잔하면서도 풍요롭다. 침착함 속에 넘치는 열정과 그저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하는 성찰의 힘을 느끼게 한다.
편지의 행간 곳곳에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실천의 길에 들어설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이의 순결한 마음과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는 외로운 결연함이 스며있다.
나아가 오염되지 않고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이 세상을 일깨우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반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게도 하나하나 사랑을 불어놓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그 사랑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힘과 싸워야 할 때는 물러섬이 없다. 그런데 이 예언자적 육성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쫓겨나고 밀려난 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어떤 경우에도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있어 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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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달프다는 아우성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세월호 참사가 난 지 3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만, 억울하게 죽임당한 영혼들의 피의 외침은 여전히 신원되지 않고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죽어간 이들의 신음 역시 경청되지 않는다. 아,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탄식이 흘러넘친다.
우리들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그래서 숨통마저도 조여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건들!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과 존엄한 위치를 박탈당한 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차라리 죽음에서 안식을 찾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 이렇게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는 갖가지 재난과 고통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를 우리보다 앞서 고민하고 생각했던 욥기 저자와 함께 한 땀 한 땀 풀어 나간다.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법조계, 의료계,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를 장악한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사이에 디딜 땅조차 없어 허공 위를 걷는 것처럼 허청거리는 사람들의 짓눌린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러한 때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욥’ 하면 사람들은 즉시 ‘고난’, ‘인내’, ‘순종’, ‘믿음’, ‘복’을 떠올린다. 모진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신앙의 영웅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보아도 되는 것일까? 평온하던 일상이 마치 일진광풍처럼 몰아친 시련으로 인해 풍비박산 난 후에 그는 뭐라 고백했던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람들은 고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그를 믿음의 본보기로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욥기는 히브리 성서의 심오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욥기에는 영문 모를 시련으로 인해 내상을 입은 존재의 아우성이 가감 없이 담겨있다.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나는 것 같은 시련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불경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고뇌의 심연을 맛보지 못한 친구들의 파리한 신학은, 욥의 그 도저한 절망을 이해하지도 담아내지도 못한다. 믿음, 순종,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복잡하고 모호하기만 한 생에 멀미를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무작위적으로 적용하려 할 때 그 말은 폭력이 된다.
저자는 “우리 시대의 욥은 누구일까?” 물으면서 “삶이 버거운 짐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운명처럼 닥쳐온 영문 모를 시련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 구조적인 폭력에 시달려 삶이 거덜 난 사람들, 미래의 꿈조차 저당 잡힌 채 현실 속을 바장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냐”고 답한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런 이들이 없는 세상이다.
하여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일이다. 욥의 자리에 서보는 일이다. 아픔의 자리에 서 진저리를 치고 있는 이들에게 신학적 해석을 들이밀지 않는 것이다. 관견管見에서 벗어나 더 높고 먼 시선으로 우리 삶을 살피는 일이다.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잠시라도 기도하는 것이다. 리 호이나키는 “순수한 기도는 나에게서 자아를 가져가고 그 대신 타인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욥기는 바로 그런 경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삶의 경험이 일천한 내가 욥기의 안내인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모한 시도를 한 까닭은 욥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빠꼼히 열린 문틈으로 조금 그 비밀을 엿본 듯하지만, 저 문 너머의 세계는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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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는 '사철누드제본' 방식으로 제작되어 책옆면과 표지과 부착되어 있지 않고 떨어져 있습니다. (파본이 아니고 특수한 제본방식으로 제작된 것이오니 구매시 참고해 주세요^^)
‘중심 부재’의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어떤 경우에라도 든든하게 견지해야 할 생의 가치는 무엇인가?”분주한 삶, 허청거리는 마음의 중심을 다잡아 주는 김기석 목사의 메시지! 생명의 기운이 일렁이고 느긋한 평화가 오래 머무는 문장들! 생명과 향유, 자족과 경탄, 정의와 환대, 사귐과 연대, 평화, 순례, 희년, 감사 등 지난 20여 년 동안 강단에서 신앙을 삶으로 번역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실천하려 했던 가치들.
[출판사 리뷰]
“어떤 경우에라도 든든하게 견지해야 할 생의 가치는 무엇인가?”
- 분주한 삶, 허청거리는 마음의 중심을 다잡아 주는 김기석 목사의 메시지!
- 생명의 기운이 일렁이고 느긋한 평화가 오래 머무는 문장들!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들을 상실한 우리 세대는 ‘궁핍의 시대’다. 어떤 경우에라도 든든하게 견지해야 할 생의 가치가 없다면 우리는 세태에 떠밀려 표류할 수밖에 없고, 중심을 상실한 우리의 삶은 부박할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두가 누리는 행복이 자신에게는 유보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은 자본주의 체제에 더욱 종속되게 만든다. 이런 체제가 견고한 세상에서는 우리의 상상력은 금방 고갈되고 만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길, 고단하기 그지없는 길만이 주어질 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기존 질서가 만들어서 유포하는 문법을 충실히 따를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을 상상하고 다른 삶을 살라고.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가 ‘거룩’과 ‘속됨’을 가르는 특권을 가졌다고 자부하며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던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시대의 약자들이 어깨를 겯고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평화의 세상, 힘을 가진 이들이 약자들 위에 군림하기보다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섬기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러한 꿈을 품고서 생명과 향유, 자족과 경탄, 정의와 환대, 사귐과 연대, 평화, 순례, 희년, 감사 등 지난 20여 년 동안 강단에서 신앙을 삶으로 번역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실천하려 했던 26가지의 가치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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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는 동안 길에서 만난 벗들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열아홉 편의 편지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예수의 길’이 ‘걷기 위한 길’이 아니라 ‘바라보고 찬탄하고 경배하는 길’로 변해 버린 건 언제부터일까?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린 시대, ‘그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저자가 서문에 쓴 대로 “인생은 길이다. 길을 떠난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어떤 때는 환히 열린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걷지만, 어떤 때는 막힌 길 앞에서 울기도 한다. 갈림길 앞에서 서성일 때도 많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갈린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길’이라는 단어는 유독 특별한 의미가 있다. 기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나의 길로 삼아 나도 걸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책에 실린 글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보여 준다. 저자는 시와 소설, 동서고전을 넘나들며 우리의 일상과 주변 풍경, 사회 현안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성찰한다. 살아오는 동안 길에서 만난 벗들에게 편지하듯 따듯한 문체로 써 내려간 열아홉 편의 글에는 강요하지 않는 깊은 울림이 있다.
다시 ‘그 길’을 이야기하는 이유《걷기 위한 길, 걸어야 할 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된 이 책은 원래 2004년 3월부터 2006년 6월까지 《기독교 사상》에 <김기석의 하늘·땅·사람 이야기>로 연재했던 글을 엮은 것이다. 무려 15년도 더 전에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고, 연재가 끝난 이듬해에 책으로 엮은 바 있는 원고를 다시 세상에 내놓는 이유는 저자가 그 당시에 고민했던 문제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로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을 까맣게 잊고, 덩치만 키워 힘을 과시하는 교회들이 세상의 고통에 눈감고 차별과 배제에 앞장서는 현실 앞에서,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로 전락한 참담한 이 시대야말로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을 다 같이 고민하고 지금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때다.
* 이 책은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출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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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으셨다. 이 책은 저자가 ‘묵상’을 통해 찾은 보화이고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준다.
자기의 근원과 목표를 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법이다.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은 잠시 지체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별명은 ‘그 길의 사람들’이었다. 길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말은 쉽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 욕망을 거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그 길을 거쳐야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길을 걷기 위한 ‘묵상’과 ‘기도’의 훈련을 담아내고 있다. 훈련은 형편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신을 단련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사들은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묵상을 한다. 기도가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이다. 개신교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훈련이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를 바치는 습관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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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으셨다. 이 책은 저자가 ‘묵상’을 통해 찾은 보화이고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준다.
자기의 근원과 목표를 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법이다.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은 잠시 지체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별명은 ‘그 길의 사람들’이었다. 길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말은 쉽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 욕망을 거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그 길을 거쳐야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길을 걷기 위한 ‘묵상’과 ‘기도’의 훈련을 담아내고 있다. 훈련은 형편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신을 단련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사들은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묵상을 한다. 기도가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이다. 개신교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훈련이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를 바치는 습관이 중요하다.
이 책은 김기석 목사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66권 설교 가운데 각기 한 편씩을 뽑아 묶었다. 66편의 설교는 마치 다성적인 소설이 그러하듯 특정한 플롯이 없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저자의 영혼이 거쳐온 사유의 궤적과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고민들, 교회의 전통과 역사와 사회, 시대의 성찰이 점점이 묻어 있다. 김기석 목사의 설교를 읽고 있으면 복음의 본래 가치가 회복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염되지 않고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이 세상을 일깨우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빙자하여 현실에 눈감게 만들고 욕망의 노예 또는 포로가 되게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무수한 강단이 부르짖고 있는 지점과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한다. 그 눈길이 달라지면서 우리는 복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혁명적 전복성이 뚜렷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김기석 목사의 설교는 그래서 고사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말씀의 전범(典範)이 될 만하다. 그건 탁류가 넘치는 강을 뚫고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줄기와 같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 오랜 시간 진리를 찾아 나선 순례길에서 만나 동행이 된 열 세 분의 소중한 저자의 길벗들이 이 책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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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세계에 머물며 불안과 강박으로 자신을 옥죄는 현대인에게
참된 자유를 향해 모험을 떠나라고 권면하는 신앙 안내서일상에서 집착하던 것들,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과 위안을 버리고 ‘조금 덜 갖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사는 삶을 연습하자고 권면하는 27편의 설교. 초조와 불안, 근심과 원망, 위선과 과시로 얼룩진 자아의 감옥에서 나와, 끝없는 소유욕과 성공에 대한 강박으로 커져만 가는 욕심 그릇을 줄이고, ‘우리’와 ‘저들’을 가르며 이웃의 고통을 방관하는 뒤틀린 태도를 버려야만, 비로소 참된 자유가 찾아든다고 당부한다.
[출판사 리뷰]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참된 자유를 향해,
담대하게 믿음의 모험을 떠나라시는 그리스도의 초대!《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에 이어 비아토르에서 선보이는 김기석 목사의 두 번째 에세이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한낱 소비자일 뿐이다. 우리는 사물을 ‘사용’할 뿐 ‘향유’하지 못한다. 쉼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상품을 소유하고자 자신을 착취하고 타인과 경쟁하며 고단한 영혼으로 또 하루를 버틸 뿐이다. 탐욕을 제도화한 세상은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오늘도 우리는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는 일에만 몰두한다. 소비자의 삶에 익숙해져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도 모른 채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큰 사람이 되려고 안달하며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린다.
저자는 이런 현대인에게 욕망의 그릇을 줄이면 걱정도 줄어든다고 타이른다. 조금 덜 갖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사는 삶, 마음 시린 이웃들에게 따뜻한 고향이 되어 주는 삶, 불의한 세상에 침묵하지 삶을 연습하자고 권면한다. ‘나를 옥죄는 감옥’, ‘채워지지 않는 욕심 그릇’, ‘이웃과 세상을 향한 뒤틀린 생각’, ‘참된 자유를 향한 여정’ 등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그릇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욕망이 나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갈 의욕을 불어넣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다. 그러나 욕망의 덫에 빠지면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욕망의 부림을 받는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욕망은 나를 망가뜨리고, 인간관계를 망치고, 세상을 살벌하게 만든다. 그러니 “사나운 말의 고삐를 낚아채는 마부처럼 우리도 욕망의 고삐를 잘 낚아챌 줄 알아야 한다”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를 선물로 받고 내 삶에 다른 이들을 맞아들일 여백이 생긴다고, 나눔과 돌봄과 섬김을 통해 얻는 기쁨만이 영혼의 허무를 메울 수 있다고 말이다.
참된 자유를 향한 신앙의 모험아브람은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고, 야곱은 이리저리 떠돌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해야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도, 이집트의 왕자로 살던 모세도 저마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떠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떠난다는 말은 취약해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한 세계에 매달리며 소유로 존재의 불안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한계 상황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유한성에 대한 자각, 질병, 죽음, 허무가 불시에 찾아와 우리 삶을 뿌리째 뒤흔든다. 삶을 든든히 지켜 주리라 믿었던 것들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때가 바로 도약의 기회라고 말한다. 좋아하여 집착하던 것을 떠나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 신앙의 모험을 감행할 때라고 말이다.
설교자의 외침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욕망의 바다에서 설교자의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가닿을 수는 있는 것인가? 실상을 대면할 용기가 없어 허상에 집착하는 현실에서 설교자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말의 무력감을 절감할 때가 많은데도 자꾸 외치고 글을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 저자는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스스로 길을 찾기 위해서, 세상에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여기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지금과는 다른 삶,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 저자와 함께 믿음의 모험을 시작해 보라.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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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닿기 위해 오늘도 길을 떠나고 있는가?
모든 생각을 주님께 드리며 뚜벅뚜벅 가고 있는가?우리의 욕망을 넘어 더불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연민과 연대,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김기석 목사의 기도문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기도의 자리에 나가본 이들은 안다. 마음만큼 선뜻 기도가 나오지 않는 자신에 놀라고, 어느새 자신의 욕망을 겁 없이 내어놓는 어리고 이기적인 자아를 보며 또 한 번 놀란다. 그러면서도 간절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이 솔직한 마음이지만 기도의 내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기도에 이익관계를 넘어선 순수한 타자는 있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정의 공동체를 향한 기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김기석 목사는 바로 이 기도의 자리에서 통렬히 주님을 부르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는 분명히 가야 할 목표”이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푯대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안개가 서린 듯 가물거릴 때도 있다”고 말하며, “푯대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 지향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덧붙인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자가 택한 길이 기도이다. “그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저자는 삶과 사회의 부조리한 현장과 소외되고 그늘진 이들을 돌아보며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기도의 대상으로 가져온다.
”하나님, 비틀거리며 걸을지라도
기어코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이 책은 김기석 목사의 수년간의 기도가 고스란히 담긴 기도문집이다. 김기석 목사는 설교 후 잠시 침묵하며 말씀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기도하는 ‘거둠의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을 통해 회중 각자는 물론 공동체가 하나님께 다시 한번 결단하는 은혜를 구한다. 수년간 드린 거둠의 기도에서 선별된 이 기도문들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기도에 가까울 만큼 진솔하면서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지향을 돌아보게 한다.
본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광야길”이라는 인생길을 “사귐과 연대로의 초대”로 해석한다. 성도의 이 여정은 결국 “거룩함을 향한 순례”라고 해석하기에, 1부는 삶의 여정을 시작하며 주님을 부르며 지향점을 찾는 기도를, 2부는 순례자가 만나는 두려움과 욕망을 넘어서는 기도를, 3부는 그럼에도 평화와 생명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삶으로 드리는 아멘”의 기도로 이루어졌다. 통렬한 지성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무릎으로 내려온 저자의 기도문들은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영적 울림이 있다. 개인 기도 시간뿐 아니라 소그룹에서 함께 기도하거나 기도회와 모임을 마칠 때 사용하기도 적합하다. 기도할 힘이 없을 때, 힘든 시간들을 보내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에게 선물용으로 좋다.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의 자리에 즐겨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이다.
[서문에서]삶은 누구에게나 낯섭니다. 익숙한 세상에 살면서도 늘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 있습니다. 살갗이 벗겨진 것 같은 쓰라림 속에 사는 약자들입니다. 익숙한 세계에서 평안한 것은 대개 강자들입니다. 낯선 세계에 가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귀에 들리는 낯선 언어는 우리가 이방인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낯선 곳에 가서도 마치 자기 집인양 당당하게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낯선 세계에서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일까요? 저는 오히려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이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 했습니다. 물론 정처 없는 나그네는 아니겠지요.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에 당도하기 위해 늘 길을 떠나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순례자의 발걸음을 붙드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다섯 가지 색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사람 귀를 멀게 하는 법입니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가려 듣는 사람이 참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력 없이 저절로 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치열하게 획득해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몽테뉴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가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푯대이십니다. 길을 걷다 보면 그 푯대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안개가 서린 듯 가물거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푯대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 지향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설교가 끝난 후 모든 교인들이 잠시 침묵의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마음이 너누룩해진 후 말씀이 가슴에 배어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아주 간단하게 거둠의 기도를 올립니다. 말씀에 응답하여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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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마침내 시인이 온다』(성서유니온)에서 설교자가 시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이기에, 설교자들에게 병든 세상에 마주선 대안의 세상을 시적으로 구성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모두 시인이고, 예수님도 시인이었다. 그리고 브루그만이 말하는 시인을 오늘 찾는다면, 그중 한 사람은 김기석 목사일 것이다.
「매일성경 순」에 연재를 의뢰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세상을 꿈꾸게 주는 메시지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리고 첫 번째 편지를 받아 읽어내려 가면서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아래의 내용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삶은 좀 달라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살기보다는,
예수께서 열어 보이신 ‘다른 세상’, 즉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힘겨운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꿈꾸는 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의해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김기석 목사의 생각은 연재가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었다. 그의 글은 연재를 거듭할수록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그의 글에 인용되는 수많은 시를 위시한 문학, 미술, 영화, 대중음악까지, 장르를 넘나들었다. 글에서 인용된 작품들을 직접 찾아보았다는 독자들도 있었다. 때론 마치 그 인용된 작품 때문에 이 글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용된 작품들은 글에 잘 녹아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다른 시선으로 현실을 보게 했다. 정신이 번쩍 날 만큼 뼈를 때리기도 했다. ‘도전’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결코 고압적이지도 무례하지도 않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대한 애정으로부터 말미암는 글이라는 것을 독자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연재를 끝낸 그의 글들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매일성경 순」이라는 제한된 독자가 아니라 더 다양한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다른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고민하며, 다른 시선으로 지금을 보았으면 한다. 김기석 목사의 말처럼 힘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분을 사로잡은 꿈이었기에, 우리도 그 꿈에 사로잡혀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하는 편지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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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성찰할 새 없이 욕망의 벌판을 겅중거리다가
어느 틈엔가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격려와 당부교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것만 같은 위기의 시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는 듯하나 도무지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워 난감한 시대, 돌이킬 수 없다는 비관론이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한 현시대에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게 만드는 책!
[출판사 리뷰]삶을 성찰할 새 없이 욕망의 벌판을 겅중거리다가
어느 틈엔가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격려와 당부!교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것만 같은 위기의 시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는 듯하나 도무지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워 난감한 시대, 돌이킬 수 없다는 비관론이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교회의 민낯을 드러낸 코로나19코로나19는 그동안 숨겨 왔던 한국 교회의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교회가 조롱거리로 전락하면서 혐오와 적대감이 가득한 시선이 기독교인을 향하고 있다.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들이 늘어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교회에 절망한 이들은 제도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교회 다니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자고, 몽매함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차지 말고 불의와 공모하며 살았던 삶을 회개하자고 말이다.
다시 푯대를 바라보고 뚜벅뚜벅 걸어갈 시간도무지 걷힐 줄 모르는 안개 속을 걸을 때면 왠지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에 사로잡히기 쉽다. 따라서 모든 게 불확실해 보이고 불안감이 엄습할수록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느 쪽인지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두려움에 휩싸여 잠시 길을 잃은 듯해도 사실 우리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본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든 마땅히 걸어가야 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넘어지면 다가와 일으켜 주고, 걸음이 느려지면 기다려 줄 줄 아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주며,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호한 삶의 길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오늘날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깊이 숙고할 수 있도록 돕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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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간 속을 걷는 길벗들을 마음에 그리며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편지‘사회적 거리 두기’,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친교를 나누는 전통이 어느새 지역 사회와 이웃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변해 버린 2020년 봄부터 겨울까지, 아슬아슬한 희망을 품고 고단한 시간을 건너는 길벗들과 그리운 교우들에게 보낸 스물아홉 통의 편지를 엮은 책이다.
[출판사 리뷰]낯선 시간 속을 걷는 길벗들을 마음에 그리며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스물아홉 통의 편지
코로나19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낯선 장소와 시간 속에 우리를 던져 놓았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체온을 재고 QR 코드 찍는 일이 익숙해졌고, ‘사회적 거리 두기’,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친교를 나누던 신자들의 아름다운 전통이 어느새 지역 사회와 이웃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변해 버린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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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봄부터 겨울까지 교우들에게 보낸 목회 서신이 책은 공식 예배 시간을 통해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본질적 가치에 관해 선포해 온 저자가 2020년 봄부터 겨울까지 ‘목회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교우들에게 보낸 스물아홉 통의 편지를 엮은 책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함께 잃어버린 시간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지향이 무엇인지 상기시키려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비록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마주 잡고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지는 못해도,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픈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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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그만 쓰고 싶은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순간그러나 편지 쓰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이들에게 너무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인들이 겪는 절절한 삶의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면 말의 부질없음을 새삼 자각하곤 했다. 그런 순간순간을 되돌아보며 저자는 “할 말이 없을 때도 있었고, 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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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사람의 마음이라도 어루만지길 소망하며그래도 저자는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썼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분노와 염증을 유발하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시대에 오랫동안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품고 살아온 이들이 느낄 고통과 비애와 상실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저자는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는 심정”으로 매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지금이야말로 폐허 더미를 정리하고, 무너진 터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할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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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위로와 힘이 되고, 때로는 도전이 되기를 바라며,
세상을 향해 말 건네듯 느린 호흡으로 쓴 편지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2021년 1월 첫 주부터 11월 첫 주까지, 주어진 일상을 정성 들여 살아 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운 교우들을 생각하며 쓴 마흔네 통의 편지를 책으로 엮었다. 2021년에 출간한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을 잇는 두 번째 목회 서신이자, 덧정 없는 시간의 강물에 떠밀리면서도 지향해야 할 방향을 잃지 않고자 몸부림쳤던 한 사람의 기록.
[출판사 리뷰]때로는 위로와 힘이 되고, 때로는 도전이 되기를 바라며,
세상을 향해 말 건네듯 느린 호흡으로 쓴 편지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2021년 1월 첫 주부터 11월 첫 주까지, 주어진 일상을 정성 들여 살아 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운 교우들을 생각하며 쓴 마흔네 통의 편지를 책으로 엮었다. 2021년 3월에 출간한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을 잇는 두 번째 목회 서신이자, 덧정 없는 시간의 강물에 떠밀리면서도 지향해야 할 방향을 잃지 않고자 몸부림쳤던 한 목회자의 기록.
* 시간의 공백을 메우고 싶어 쓰기 시작한 편지코로나19가 세상을 점령하고 2년 남짓한 시간, 처음에는 용어조차 생경하기 그지없던 ‘비대면 예배’가 어느새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는 대신 집에서 인터넷을 켜고 영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저자는 언제쯤이면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시간의 공백을 메우고 싶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좁게 보면 청파교회 교우들을 염두에 두고 쓴 편지이지만, 넓게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 내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든 이들을 생각하며 쓴 편지다. 어린 시절 저자가 서울에 유학 와서 살 때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처럼, 혹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허균과 권필 등 옛 선비들이 주고받은 편지처럼, 혹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우뚝 서기를 바라며’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도전이 되길 바라며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였다.
* 욕망에 조율된 삶은 지속 가능한가저자는 코로나19를 일종의 ‘멈춤 신호’로 해석한다.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느라 숨 가쁜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제 꼴을 좀 돌아보라’는 경고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멈춤 신호’에 담긴 뜻을 헤아리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고 씁쓸해한다. 우리는 그저 하루빨리 예전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란다.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예전처럼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욕망에 조율된 지금의 삶이 과연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지, 무한 경쟁이라는 수레바퀴 속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 현재의 시스템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곧 우리는 일상을 회복할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거리 두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욕망과 거리 두기’라고 말한다. 마음의 속도를 조금만 줄이고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자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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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자는 게 아닌데,
인간의 욕망은 늘 과도한 방향으로 흐르기가 쉽고,
그 과도함은 아름다운 관계를 차단하기에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 김기석욕망에는 죄가 없다. 욕망이 없다면 문명도 없고, 삶도 불가능할 것이다. 욕망은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욕망은 결핍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결핍은 채움을 갈구하고, 채움을 위해 사람은 자기 삶을 조절한다. 욕망은 움직임이다.
하지만 욕망이 욕심이 되고, 욕심이 죄를 낳고,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면 욕망은 선한 것이 아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전락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럼 욕망은 어느 때부터 욕심이 되고 죄가 되는가? 저자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기 시작할 때부터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것임에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 함께 나눠야 할 것을 독차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권력으로 타인을 사물화 하며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는 모든 것을 없애고자 한다. 마땅히 공동체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사유화 하고, 그 욕심을 채우고자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역사의 현장은 아주 가까운 시간에까지 얼마든지 존재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책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욕망을 따르다 죄에 이르고, 죽음에 이른 욕망의 15가지 페르소나를 소개한다. 욕망은 질투, 돈, 오만, 미련, 원망, 권력, 욕정, 자랑, 갑질, 잉여의 독식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성경의 인물들에 비추어 오늘을 사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관을 쓴 채 설 수 없다. 신에게 속한 것을 사취하려는 인간은 결국 자기 파멸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의 비루함과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엄함을 함께 이야기한다. 이 책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고 과도하게 집착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타인을 바라보고 돕고 함께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정하고 각자도생을 요구받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내면화 한다. 이런 내면화된 두려움은 나눔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축적만이 살길이라고 사람들을 오도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오도된 감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은 이웃이라고.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뒤처지면 기다려 주면서 더디다 못났다 탓하지 않는 사람,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 주고 조각난 마음을 기워 주는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추기는 그런 이웃이라고. 이제 우리 이런 이웃이 되어 보면 어떠냐고 저자는 이 책에서 간절히 이야기한다.
[출판사 리뷰]욕망해도 괜찮아,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히지는 마!얼마 전에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책이 나와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책의 내용을 떠나 억눌려왔던 인생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는 말이 꿀처럼 들렸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욕망은 독점을 지향한다. 타자는 욕망 충족의 걸림돌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오순도순 살라고 보내 준 이웃을 경쟁자, 타자 혹은 물화한다. 이렇게 이웃을 물화한 사람은 외롭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한다. 갈망은 또 다른 갈망을 부르고 내가 사는 세상은 불모의 사막이 될 뿐이다.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풍요를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도 평안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사는 이들도 있지만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생을 탕진하는 이들도 있다. 소리 없이 쌓이는 먼지처럼 전락의 씨앗은 과도한 욕망 속에 조용히 자리 잡는다. 이 책은 그렇게 전락한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수천 년 전에도 똑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면, 어쩌면 거기서 오늘을 사는 우리 인생의 변화와 회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인간은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참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모두가 욕망을 향해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달려 갈 때 욕망의 인력에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과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 은총 앞에 자신을 바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되길 요청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영적 감수성이야 말로 살풍경한 세상의 희망이며 그럼으로써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전재조건이 되는 그런 세상이 만드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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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넘어 우정과 환대로 나아가신 주님처럼
우리도 이제 안부와 다정함의 인사를 건넵시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향한
김기석 목사의 시대 고민이 책은 김기석 목사의 시대 고민을 담은 칼럼집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교회 문턱을 넘어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주체들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환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자 정의”라고 하면서, “탐욕에 이끌리던 삶을 나눔과 절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고립의 세상에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을 언급했다.
코로나 기간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보면서 저자는 현상 너머의 더 깊고 큰 이야기들을 칼럼을 통해 나누었다. 친구는 무슨,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며 관계를 맺는 시대적 현상에 대해 저자는 성경적 기준에서 비복음적, 반복음적 가치관에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익과 욕망, 실적과 권리의 가치에서 벗어나 용기를 내어 사랑과 평화를 위해 과감히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가 지향하는 환대와 영적 우정은 결국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현실의 삶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고 함께 미래를 소망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탐욕과 고립에서 나눔과 연대로
영적 환대의 삶을 만들어가자저자가 2021년부터 발표한 칼럼들을 선별한 이 책에서 목회자들은 더 깊이 고민하고, 성도들은 어떻게 가정과 일터와 지역에서 다정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씨름해 볼 수 있다. 왜 시대의 흐름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 왜 타인과 약자를 위해 나의 삶을 개방해야 하는지 복음의 의도와 역사와 교양에 근거한 그의 설명은 자신을 돌아보아 실천 가능한 지점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웃, 직장 동료, 뉴스 속 타자들과 약자들을 끌어안고 기도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체 2부로 구성되어 믿는 자들과 고민할 것들과 대사회적 이슈들을 토대로 한 고민들이 어우러져 있다. 각 칼럼들 사이 “머무름”과 “함께함” 코너를 통해 잠시 머물러 생각을 정리하며 여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교회에 대해 고민하는, 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반문이나 설명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오랫동안 교회 문턱을 넘어오지는 못하는 이들, 사회 선교나 지역 복음전도와 선교로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함께 읽으며 대안을 나누기에도 적합하다.
[서문에서]우리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을 보는 눈이 열릴 때 욕망의 확고한 종살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종살이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이웃의 얼굴에 어린 하늘이 보인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동시에 정의이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탐욕에 이끌리던 삶을 나눔과 절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고립의 세상에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 시대를 고심하며 쓴 짧은 글들을 모았다. 어둠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아주 작은 빛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것이 등장했다가 재빨리 사라지는 세상에서 그래도 지속적인 가치들을 찾아보려 애썼다. 이 작은 책이 시대의 우울을 앓고 있는 이들의 발 앞을 비추는 한 점 불빛일 수 있으면 좋겠다.
신은 허무와 비존재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 자체다신은 없는가? 신학자가 과학을 재단하지 않듯이 과하자도 신학을 판정내리면 안된다. 하지만 도킨스는 마치 종교 심판자나 된 양 종교를, 신을 비판한다. 그의 말투에서는 흡사 선전선동에 능한 전체주의 시 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과학 지성이 지녀야 할 냉정함을 잃은 도킨스의 논리에 반박하는 이 글은 과학과 종교가 다르지 않고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한 인간 정신의 두 갈래 여정" 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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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을 읽으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는 순간,
일상은 경건의 통로가 된다.“생각의 길이 막힐 때마다 그림을 보곤 한다.
성경의 주름진 갈피에 서린 하나님 체험을 읽어내는 순간,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영성 있는 설교가이자 글쓰기로 이름난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의 신작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림에서 시작해 신앙의 본질에 다가서며 신학적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 로댕 <대성당>, 샤갈 <이삭의 희생>까지 22편의 그림으로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삶의 고단함, 타자의 고통, 신앙의 역설을 넓게 펼쳐서 보여준다. 깊숙이 들여다보는 순간, 모호한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깊어지고 타자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커진다. 또한 성경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림에서 출발해 신비와 일상 사이를 넘나들며 사유의 지평을 넓히다 1부 ‘거룩한 삶은 어디에 있는가’와 2부 ‘우리는 모두 흔들리기에’에서는 평범하지만 거룩한 일상의 순간들을 펼쳐 보이고, 우리가 덮어두고 싶어 하는 불안과 탐욕, 의심, 분노, 절망을 꼼꼼히 읽어간다. 3부 ‘소란한 세상에서 균형을 찾다’에서는 흔들릴지언정 중심을 잃지 않고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전한다. 4부 ‘탄생부터 부활까지’에서 세상의 슬픔을 짊어지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모습은 나를, 내 삶을,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5부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으로’에서는 빛과 어둠,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있는 삶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깨닫게 된다.
메시지와 그림의 만남 성경 이야기를 담은 명화의 감동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펼쳐볼 수 있는 크기에 180도로 쫙 펼쳐지는 누드사철 제본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는 명화를 선별하여 제작한 32장의 메시지 카드이다. 눈길이 닿는 곳에 두었다가 북마크로 활용하거나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해도 좋을 것이다.
[서평]여전히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
40여 화폭이 한 책 안에 펼쳐져 있다. 세계 유명 화가들의 성경 명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독자는 호강을 넉넉히 누린다. 성경 본문이 일찍이 화가에게 녹아들었다. 그것이 화가의 상상력과 만나 저마다 독특한 구도와 색채로 재구성되었다. 시각화된 본문이 독자에 따라서는 청각을 거쳐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말씀을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한 이들을 저자 김기석 목사는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이라고 일컫는다. 평생 말씀에 사로잡혀 설교를 통해 청중과 독자를 신비한 성경의 세계로 안내해온 저자는 성경 독자들이 성경 본문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화가의 작품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자신의 체험을 먼저 밝힌다. 저자는 성경 본문이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그 의미가 생명체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저자는 화가들마저 줄곧 반복해서 화법을 달리하고 재료를 바꾸어 같은 본문, 같은 주제를 그린 경우가 있었음을 놓치지 않고 소개한다.
‘열린 책, 닫힌 독서’를 염려하는 저자만의 군걱정은 아니다. 우리 역시 같은 ‘토라(율법서)’를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산 예를 바리새파 사람들과 나사렛 예수에게서 본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람을 박해하고 죽이려 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응수하셨다. 열린 말씀을 닫힌 법조문으로 읽어 스스로 말씀에 갇히는 닫힌 독서가 있는가 하면, 열린 성경 본문에서 해방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열린 독서가 있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술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7쪽)”이라고 말한다. 구약을 형성한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문인들이 전승시킨 작품이다. 유대교의 이 세 지도층은 대극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는 셋 중에서 어떤 한 전승을 택하거나 다른 전승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능이 다른 세 전승이 함께 있어야 완전한 경전이 된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초기 기독교는 랍비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사도 서간과 계시록을 한데 묶어 결합했다. 유대교에서 가져온 히브리어 성경을 <구약전서>라고 부르고, 기독교가 수집하여 정경으로 만든 그리스어 성경을 <신약전서>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합본하여 <성경전서>라고 하는 경전을 갖기에 이르렀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없이는 이런 상이한 대극적 전승들이 한 경전으로 결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의 맥락과 본문 자체를 주목하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지해주는 증빙구 같은 본문만을 선택하고, 급기야 그것을 지배적 본문으로 삼아, 나머지 본문을 해석하는 잣대로 활용한다면 성경의 신비한 세계는 삭막한 사막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은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예술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성경이 지닌 역동적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_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으셨다. 이 책은 저자가 ‘묵상’을 통해 찾은 보화이고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준다.
자기의 근원과 목표를 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법이다.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은 잠시 지체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별명은 ‘그 길의 사람들’이었다. 길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말은 쉽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 욕망을 거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그 길을 거쳐야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길을 걷기 위한 ‘묵상’과 ‘기도’의 훈련을 담아내고 있다. 훈련은 형편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신을 단련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사들은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묵상을 한다. 기도가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이다. 개신교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훈련이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를 바치는 습관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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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목회자이자 설교자, 기독교 사상가,
김기석 목사의 고별 메시지!
“이제 우리는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비견할 만한
또 하나의 고백록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김영봉, 나희덕, 손성현, 최종원 추천
"김기석 목사의 삶과 신앙, 경험과 통찰의 정수를 담다“이 책은 우리 시대의 목회자이자 설교자, 기독교 사상가인 김기석 목사의 고별 메시지다. 오랜 세월 청파교회를 섬겨 왔고 은퇴를 앞두고 있는 그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CBS ‘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을 비롯한 방송 및 온라인 설교를 통해 국내외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특히 그의 설교와 강연은 풀리지 않는 인생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 교회 안과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막힌 숨을 틔워 주었다.
이 책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신실하고자 달음질해 온 한 고독한 구도자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많은 설교와 강연, 저술을 해온 그이지만, 이 책은 그것들과는 사뭇 성격을 달리한다. 오롯한 한국의 기독교 사상가로서 김기석의 면모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는 43년을 목회자로 살아왔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한다. “목회 은퇴를 앞두고 그동안 내가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만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차분하게 돌아보고 싶었다. 이 책에는 아주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주는 기쁨과 든든함, 그리고 안다 싶은 순간 또다시 낯설어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시와 산문, 현대문학과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글쓰기의 향연”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의 언어에 다양한 시와 소설, 철학과 미술의 언어를 함께 짜 넣으며 다양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 준다는 점이다. 저자는 동서고금의 문학가와 철학자와 예술가와 더불어 깊은 영적 차원을 풀이함으로써 그 매력적인 신 체험으로 독자들을 초청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걸음 앞에서 나를 이끄셨다. 그분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다가오셨고, 그때마다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 책이 개념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거울로 삼아 현대를 살아가는 구도자이자 신앙인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이 책은 격려한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부른다.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이들, 지독한 방황으로 흔들리는 이들,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났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가는 궁극적인 지점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불안에 시달리고 때때로 흔들리지만, 대지에 발을 굳게 딛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때 희망이 이 세상에 유입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시간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며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이고, 그 사건을 통해
평화의 나라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저자가 아내와 딸, 동료, 청년 등과 나눈 ‘인간의 실상’과 ‘망각한 역사’, ‘연민과 공감’과 ‘혐오와 배제’, ‘인생’과 ‘몸의 윤리’, ‘신앙의 본질’과 ‘종교’, ‘영성’과 ‘신성’, ‘우정’과 ‘타자’, ‘쉼’과 ‘평화’ 등 12편의 대화와 멀리서 밝혀 오는 불빛의 따뜻함과 같은 11편의 편지로 구성된 이 책은 어두운 일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인생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대화든 편지든 이 모든 과정에 평생 수많은 세계의 지성들과 지적 대화를 하면서 말씀 전달자 역할을 해 온 저자 김기석의 지혜나 관조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의 시각을 바꾸고, 자숙과 참회와 자정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이들이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나, 아예 모든 문제에는 감각이 없는 둔감한 이들도 위로와 격려를 받고, 각성과 책임의 도전을 함께 받게 된다.
거의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오는 동안 길이 막힐 때마다 시편을 붙들고 살았다는 저자는 시편의 구절들이 거친 바다를 비추는 등대 구실을 해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층위를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욕망 사이에서 바장인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확신과 회의,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이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들며 삶의 무늬를 만든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시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쁨의 찬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탄식이 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가 하면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다. 가없는 용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도 있지만 악인이나 원수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시도 있다. 시편을 읽다가 가끔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놀라는 당혹스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편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마음을 다해 시편을 읽거나 낭송하는 일은 우리 속에 들끓고 있는 소리를 잠재우는 일이고,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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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에 가담하거나 또는 앞장서고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교회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서야 할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고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명백히 죄악이다.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야할 이들이 권력과 재물의 옹호자가 되고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난폭한 자들의 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리기 위한 장식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지난 겨울은 정말 춥고 뜨거웠다. 퇴행을 거듭해온 역사의 이면을 보면서 우리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변혁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기에 뜨거웠다.
이런 때 예레미야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황무지로 변한 땅,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악행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셨다.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읽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땅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기 위함이다. 이 책이 그러한 길을 모색하는 이들 앞에 던져지는 희미한 불빛이다.
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깊게 새기고 있는 저자가 써내려가는 글들은 여기서 그 어떤 수식도 거부하고 있다.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예레미야의 심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위대한 선지자의 육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