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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아옴으로써 그저 잊혀져 버릴 삶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린 해피엔딩의 주인공 룻처럼 지금,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 속으로 들어오라!룻기는 그야말로 "은혜의 보고" 다괴테는 룻기를 가리켜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이다"라고 극찬했고, 필립 얀시는 은혜를 "우리 시대 최고의 마지막 단어다"라고 했으며, C.S. 루이스는 "기독교를 규정짓는 유일한 단어는 "은혜" 밖에 없다" 라고 했다.
상실의 현장이자 텅 빈 밭이요, 주울 것은 보리이삭밖에 없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주어진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룻처럼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다.
룻처럼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장일지라도 꿈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보리이삭"을 줍는 이 땅의 신실한 여성들에게 이 책이 희망과 격려가 되고, 룻이 이룬 해피엔딩이 모든 독자에게 임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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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_삿 13:7
"삼손 이야기는 믿음과 애국심의 스릴 넘치는 무용담으로 승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천박한 드라마로 전락해 버렸다. 그는 대부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에 빠진 플레이보이로서 자신을 탕진해버렸다. 삼손 그는 젊고, 강하고, 잘 생기고, 도도하고, 용감한 데다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였다. 모골이 송연한 탈선행위를 일삼았으며, 숱하게 많은 애인이 있었다. 그는 강한 남자가 왜 실패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정말 그러할까?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헤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더라 " (삿 13:21~25)
그 동안 삼손에 대한 평가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왜곡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실패자'의 상징적 인물이 아니라, '승리자'의 모델이었다 그는 진정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선배요, 멘토였다. 더욱 큰 수확은 4장에 불과한 짧은 '삼손 드라마'에서 약한 자일지라도 들어 쓰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믿음의 반열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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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상의 성공 공식으로 얼룩져 있는 이 세대를 향한 느헤미야의 외침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성공과 힘’에 대해 세상이 정의 내린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독특한 용어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느헤미야가 살았던 페르시아 수산 궁에서부터 시작하여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힘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 힘의 역사 가장자리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다. 포로생활 속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유일 신앙과 독특한 이상을 가지고 세속 역사와 맞서 싸웠다.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세속 역사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반면, 말씀 중심으로 굳건히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흥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느헤미야의 진정한 힘의 이야기를 그려 낸다. 이 책을 통해 ‘성공과 힘’에 대한 재정의를 해 봄으로써 생각하고, 바라고,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 출판사 서평세상의 성공 공식으로 얼룩져 있는 이 세대를 향한 느헤미야의 외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정한 ‘힘’의 이야기
느헤미야는 어떻게 ‘힘’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세상을 지배해 온 성공 공식을 당당하게 뒤집은 느헤미야의 내밀한 저력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밝혀 낸다.
가짜 힘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지금의 한국 사회는 위기의 시대다. 대학 합격을 위해, 승진을 위해, 취업을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한다. 자칫 멈칫했다가는 ‘위기’라는 놈이 언제 목을 물고 늘어질지 모른다. 삶 곳곳에 무서운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이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다. 세상이나 교회 모두 할 것 없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의미를 상실한 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성공주의와 맘모니즘이란 세상의 거대한 물결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과연 이들이 그토록 찾고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낭떠러지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이 위기 속에 서 있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제시하며 책의 문을 연다. 교회조차도 더 많은 부를 쌓아야만, 명예를 얻어야만 그것이 ‘힘’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학력과 뛰어난 외모가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사회적으로 정의를 상실한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가치를 찾기란 이제 너무 힘들다. 실패하면 안 된다고, 반드시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세뇌 당하듯 살아왔지만 정작 무엇이 진짜 실패이고 성공인지,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이처럼 삶의 방향을 상실한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세상의 성공 공식 속에서 허우적댄다. 그러나 곁에서 지푸라기나마 건네줄 도움의 손길은 찾을 수 없다.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멘토 같은 스승이 절실한 지금이다. 바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의 따뜻한 심정으로 영적 스승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책을 펴보면 글귀마다 시대적 어둠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과는 대조적으로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목자의 애타는 심정이 묻어나온다. 저자는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깨우고,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돌아가 그 혜안을 건네주고 있다. 즉 ‘성공과 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정의 내린 제한된 틀, 그 오해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틀을 세우고, 내면을 채운 느헤미야에게서 그 답을 찾아 힘의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느헤미야는 누구일까?
느헤미야의 키워드, 말씀, 성전 사모, 회개, 중보기도, 약한 자와 함께하는 것! 느헤미야가 살았던 당시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힘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정한 힘을 찾아 당당하게 나선 자였다. 자신이 누리던 부와 명예, 영광을 다 버리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 조국으로 돌아왔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은 지금의 한국 사회와도 같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힘의 원리는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엔 엉뚱해 보인다. 느헤미야는 쓰러진 조국으로 돌아와 유일하신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은 것이다. 외적인 성만 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적으로 무너져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잃었던 진정한 힘을 비로소 찾게 된다. 느헤미야의 외침,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힘이니라”는 말씀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원리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퇴색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 책의 묘미는 간결하며 명료한 화법을 손꼽을 수 있다. 느헤미야서에서 발견한 독특한 힘의 원리, 진정한 힘의 본질을 꿰뚫는 저자의 명쾌한 메시지는 “당신이 추구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확실한 대답을 미루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유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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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꿈이다!”
지금 우리의 꿈이 산산 조각나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 꿈을 멋지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꿈의 회복>은 옥성석 목사의 강해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오늘날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적으로 더 많이 방황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영적인 방황의 대답으로 ‘다니엘서’를 제시한다.
세상을 이긴 다니엘의 삶은 꿈에 연결되어 있다.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지만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을 붙잡고 힘과 권력으로 무장한 제국에 굴복하지 않는다. 지금은 거대한 제국처럼 보이지만 곧 망해져 없어질 것을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다니엘은 방황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처럼 세상의 가치관과 재물과 믿지 않는 자들의 유혹에 흔들리는 이유를 다니엘이 보았던 그 꿈을 잃어버린 것에서 찾는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데도 보이는 세상에 발목 잡혀서 꼼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니엘이 가졌던 그 꿈을 하나하나 보여 주며 우리도 잃어버린 꿈을 회복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저자의 깊이 있고 탁월한 적용은 꿈을 회복한 우리가 힘으로 무장한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지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 준다. 꿈을 회복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인도하심이 손이 잡히듯 두 눈에 비쳐진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자고 그대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 주시며 세상의 중심에 우리를 세우실 것이다.
▒ 출판사 서평하나님의 꿈은 힘으로 무장한 세상을 이긴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잡고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 주신다.
다니엘은 겨우 열여섯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의 세 친구들도 비슷한 연령대였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아니한 이 소년에게 닥친 현실은 가혹했다. 조국은 망했고, 성벽과 성전은 불타 허물어지고, 한순간에 포로가 되어 고아 아닌 고아로 전락했다. 그리고 대제국 바벨론에서 3년 과정의 바벨론화(化) 세뇌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왕이냐, 주냐?’ ‘벨드사살이냐, 다니엘이냐?’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저들은 과감히 느부갓네살이 아닌 주(主)를, 벨드사살이 아닌 다니엘을, 육식이 아닌 채식을 선택한다. 두라 평지에 높게 세워진 금신상과 칠 배나 더 뜨거운 불 앞에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며 ‘꼿꼿장수’를 고집했다. ‘어인’(御印)이 찍힌 금령이 내린 줄 알면서도, 굶주린 사자 굴조차 개의치 아니하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주신 꿈대로 살아라!
이런 다니엘의 선택을 보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다니엘이 찾은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어진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게 했던 단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해답은 바로 ‘꿈’, 다니엘의 가슴속에 주셨던 하나님의 ‘꿈’이라고 말한다. 다니엘에게 있어 꿈은 삶의 의미요 이유였다. 다니엘은 꿈을 통해 지금은 거대해 보이지만 곧 망할 제국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곧 망할 나라에 굴복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방황은 바로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주셨고 우리에게도 주신 ‘꿈’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꿈이 그의 ‘삶의 의미’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꿈을 회복함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으라고 강권한다.
그래서 꿈의 회복이다.
이 책에는 꿈을 잃어버린 느부갓네살과 꿈을 간직한 다니엘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꿈을 빼앗으려는 존재와 그 꿈을 회복시켜주시는 존재가 대비되어 나타난다. 느부갓네살로 대표되는 악한 사탄, 흑암의 세력은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주신 꿈을 빼앗아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꿈을 빼앗는 것은 ‘삶의 의미’마저 함께 빼앗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빼앗기는 순간,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거대한 제국에, 힘으로 무장한 세상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꿈의 회복’(Recover the dream!)이다.
만일 우리가 꿈을 회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을 극복할 수 있는, 그리고 오히려 반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하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처한 힘들고 어려운 현장에서 시온의 대로를 볼 것이다. 꿈을 회복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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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같이 거대한 현실 앞에 섰으면
다윗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던져라. 나의 물맷돌이 기도보다 앞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 삶을 가로막는 골리앗 앞에서 내 손안에 든 물맷돌보다
먼저 의지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 골리앗은 그저 기회일 뿐이다.
엎드려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내 지식보다, 스펙보다, 잘난 것보다
하나님이 먼저 뚫는 은혜의 꽂힘을 붙들어야 한다.
물맷돌이 아니라 기도다. 연습이 아니라 은혜다.목동 다윗은 어땠을까? 과연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아무런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단지 물맷돌 하나 들고 골리앗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갔을까? 과연 그랬을까? 골고다 십자가라는 골리앗을 앞에 둔 예수님은 어땠을까?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골리앗을 앞에 두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땠을까?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다윗은 당시 어떤 심정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을까?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4-5).
다윗이 쓴 시편 55편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언제 쓴 시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다윗 역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서 떨었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진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그렇게 담대했을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를 찾아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그의 마음에 어떤 확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어느 틈엔가 그를 짓누르던 두려움, 공포, 떨림이 밀려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드디어 그는 원수를 향하여 나아간다. 손에는 칼도 없다. 갑옷도 방패도 함께하는 자도 없다. 아무것도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가슴엔 ‘여호와의 이름’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1, 3).
이렇게 외치며 나아간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조그마한 물맷돌에 맞아 거대한 원수 골리앗이 쓰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물맷돌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는가? 물맷돌의 무엇이 거대한 거인을 위협했단 말인가? 물맷돌보다 먼저 날아간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도, 다윗의 기도다. 다윗의 기도가 골리앗을 경직되게 했고, 약점을 노출하게 했고, 물맷돌을 그 약점 중앙으로 빨아들이게 했다. 이 사실을 믿는가?
나의 물맷돌은 무엇인가? 경험, 지식, 지혜, 학력, 물질, 사람, 배경, 젊음, 건강, 달란트… 이 모든 것이 물맷돌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물맷돌에 불과하다. 이것을 가지고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세상을 이길 수 없다. 나의 물맷돌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원수를 향해 쏘아지도록 해야 한다. 나의 물맷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해야 원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가?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도가 먼저 날아갈 때, 나의 골리앗을 정복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물맷돌로 골리앗을 무찌르셨다. 하지만 다윗이 먼저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손에 든 물맷돌을 통해 역사하신다. 예수님도 십자가란 골리앗 앞에서 먼저 기도하셨다. 땀이 변하여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셨다(눅 22:44).
오늘 내 앞을 가로막는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는 내 손안에 있는 물맷돌이 아니라 기도다. 그 기도가 먼저 날아갈 때 골리앗이 무너진다. 그 기도가 먼저 갈 때 지혜, 약점, 해결 방안,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다. 기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내 앞에 선 골리앗을 물리치는 능력을 주신다. 기도가 먼저 날아갈 때 골리앗은 그저 기회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세상을 이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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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적 술람미다!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지기 노동자였다. 누더기를 걸치고, 거무스름하며, 냄새나는 여인이었다. 왕의 사랑을 받을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솔로몬 왕은 포도원까지 찾아와 그런 술람미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둘은 지극한 사랑을 나누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몄다.
술람미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누더기를 걸친 존재, 거무스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거룩한 왕의 사랑을 받을 어떤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찾아온 솔로몬 왕처럼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찾아오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 낮고 천한 땅, 우리 삶의 현장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고 신부 삼아 주셨다.
우리는 왜 아가서를 읽어야 할까? 아가서가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나의 관계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나의 영적 신랑인 예수님은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분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나는 어떻게 화답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왕인 솔로몬이 포도원지기 술람미를 찾아와 지극히 사랑한 모습이 우리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주는지, 신부로서 우리는 어떤 향기를 내야 하는지 소개한다. 그리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을 전한다.
[출판사 리뷰]왕의 사랑을 만나 보았는가?옥성석 목사는 매년 5월이면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매년 이렇게 출간하는 이유는 이 책의 이익금으로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서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책의 출간을 미뤘지만 아이들을 돕는 일을 멈출 수 없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 책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다. 포도원지기에 불과한 여인에게 왕이 찾아왔다. 둘은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고 지극한 사랑을 나눈다. 이 책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영적 술람미인 우리가 찾아오신 예수님과 어떤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을지 달달한 이야기로 펼쳐 보인다.
이 달달한 이야기는 코로나 19로 주변 사람들과의 교제를 멈춘 채 움츠려 있는 모든 성도에게 잔잔한 미소와 자신감을 선물로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영적 신부인 우리가 어떻게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을지 명쾌하게 제시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인가? 바로 예수님의 품이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우리는 안식을 얻고, 보호받고, 참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왕의 사랑을 받아 보았는가? 어서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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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거룩에 이르는 길로마 교회는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니며 체계적으로 복음을 전해 세운 교회가 아니었다. 바울은 서바나로 선교를 가기 위해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고 싶었고, 또한 로마 교회의 이방인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체계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서 편지를 썼고, 이것이 성경 로마서가 되었다. 로마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에 있다는 것과 이방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강한 신앙인이 감당할 일들을 들려준다.
로마서에 대해 많은 주석과 강해가 있지만 70세 인생을 사는 동안 어떻게 복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설교한 저자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한 복음이 어떻게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에 작동되는지, 우리가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적용한다.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판단을 멈추고, 죄의 끊임없는 유혹과 사람의 약함에 탄식하지만 그럼에도 죄와 거리 두기를 말하며, 복음을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는 누구도 예수님 안에서 정죄함 당하지 않음을 이야기해 준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려져 거룩에 이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의 심판대에 설 것임과 바로 오늘이 그 심판의 날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참된 신앙의 영적 뿌리를 발견하라고 말한다. 복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 받은 자는 로마서를 읽으며 의와 거룩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며, 남은 일생 복음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진정한 영적 떨림이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 리뷰]복음은 삶으로 나타난다!잡힐 듯하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델타(Delta)에서 오미크론(Omicron)으로 슈퍼 변이를 일으켰다. 언제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나올지 몰라 근심하는 이때 저자는 이런 바이러스의 변이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죄성’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 안에 침투한 죄성은 지금까지 수많은 변이로 모든 인간을 집어삼키고 있다.
이런 슈퍼 변이 죄성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것은 복음이다. 복음만이 우리 안에 침투한 죄성을 해결할 수 있다. 죽일 수 있다. 그 복음을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는 책이 로마서다. 저자는 이 로마서를 읽으며 지식의 축적이 아닌 삶의 변화를 경험하길 바란다. 성 어거스틴처럼 회심과 회개의 역사를, 마르틴 루터처럼 불꽃같은 믿음의 역사를, 존 웨슬리처럼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일생에 한 번쯤 로마서를 깊이 읽고, 깨달아 삶으로 살아내기를 바란다.
2천 년 전 바울이 내 삶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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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 야곱,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었나? 야곱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과 다퉜다.
호시탐탐 형의 장자권을 욕심내다 결국 빼앗는다.
축복에 눈이 먼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해
나이 든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돌아갈 뻔한 축복을 가로챈다.
그러고는 형의 복수가 두려워 멀리 달아났다.
도망가서도 삼촌에게 속고 속이면서 소유를 늘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14년을 수일같이 여겼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재산과 부인, 그리고 심지어 자식들까지 앞세웠다.
人間的인, 가장 인간적인 야곱, 욕망에 가득한 인간 냄새가 풀풀 난다.
하지만 이런 人間 야곱을 하나님은 선택하셨다.
뿐만 아니라 얍복 강가에 내려와 져주는 씨름을 하심으로써
그를 이스라엘 되게 하시고 인류구원의 큰 도구로 우뚝 세우신다.
人間의 악행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삶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 숨은 ‘축복의 유전자’를 발견해야 한다!
▒ 출판사 리뷰 ▒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어떤 삶의 원리를 배우는가?왜 우리는 야곱의 삶에 공감할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말씀할 만큼 세 사람을 생각하셨다. 그런데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같은 신실한 믿음을 보여 주었던 사람이었나? 그는 보잘 것 없었고, 남을 속이고 빼앗았으며, 지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이 요셉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면 뭔가 감동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공감을 자아낸다. 너무 인간적인, 욕망에 충실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 끈질기고 집요하고,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에 공감한다. 아니 공감하면서도 나와 닮아서, 나의 민낯을 다 드러내는 것 같아서 밉다. 그리고 그런 모습조차 붙잡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 흘린다.
바로 여기에 야곱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성화의 단계를 거쳐야 하고, 나약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꼭 잡은 두 손을 펴야 하나님의 은혜를 잡을 수 있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실패하고 바닥을 쳐봐야 하나님의 기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하찮은 우리를 보석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일상 속에 축복을 숨겨 놓으셔서 그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소유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붙잡으며, 중간이 아닌 벧엘까지, 우리를 기다리는 면류관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야곱의 인생에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악도 막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우리 人間의 약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야곱이 감당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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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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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큰 한 개의 문 대신 좁고 작은 ‘두 개의 문’을 만들었다.
시대의 과제였던 항일정신이 배어있는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 이 문에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이 책은 조선시대에 시작된 초기 조선 선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근대교육, 근대의료, 기독교를 내세우며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조선 사회 전체가 유교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상황에서 매우 낯설고 새로운 사상들이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고, 교회를 지어서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조선 선교는 이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라는 또 다른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기존의 것을 부인하거나 말살하며 새로운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유교문화를 존중하여 교회로서는 유일하게 두 개의 문을 만들어 남녀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금했던 조선 사람을 배려했다. 장로교회·감리교회·성결교회 3대 교단 모두 남녀 출입문을 달리했다.
또한 초기 한국 교회의 역사는 항일 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초기 한국인 목사들의 활동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군위성결교회 최현 목사는 일제 패망에 대한 설교를 하고 조선말로 합창하는 등 독립사상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수감된다. 이후 천세광 목사의 항일 활동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청년운동 등 사회운동 전반에 결쳐 한국 교회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왔다.
<왜 조선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는 초기 한국 교회 건축에 나타난 한국 선교의 특징과 초기 조선 선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투쟁까지 한국 역사에서 가장 굴곡진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으며 교회 100년사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 교회의 두 개의 문군위성결교회는 예배당에 두 개의 정문을 만들었고, 오른쪽 정문은 여자가, 왼쪽 정문은 남자가 사용했다.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을 중심으로 왼쪽의 배재학당 학생들은 왼쪽 문으로, 오른쪽의 이화학당 학생들은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네모난 벽돌 건물인 광주 오웬기념각엔 유난히 문이 많다. 정방형건물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누어 남녀 출입문을 달리해, 숭일학교 남학생들은 왼쪽 문, 수피아여학교 여학생들은 오른쪽 문을 사용했다. 주일이면 남녀가 교회로 몰려드니 ‘연애당’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예배당 중앙에 장막을 쳐서 정작 당사자들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강한 유교윤리로 인해 남녀를 엄격히 구별했던 조선 사람을 배려한 초기 조선 선교 정신이 이렇듯 예배당 건축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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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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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요한계시록
죽음의 땅에서 새 노래를 부르다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대접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144,000명, 666 등 우리가 익히 들은 상징과 징조, 숫자들은 많은 억측, 불안, 공포 등을 만들면서 수많은 이단의 교리 등에 인용되었다. 그럼으로써 많은 교회나 신학자가 무시하거나 기피하는 성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는 우리가 모른 척하거나 피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이다. 그것은 이 죽음의 땅에 수많은 재앙을 미리 알려 주시고 믿는 자가 멸망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재앙과 고난에서 피할 길과 시간을 주시기 위함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그래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 고난의 시간을 십 일 동안만 허락하셨고, 벌거벗은 우리를 위해 이마에 인을 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셨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세상의 소리를 다 멈추셨다. 그리고 주를 믿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얻게 될 최후 승리를 분명히 선포하셨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면 세상의 끝에 펼쳐질 재앙과 심판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상징도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대신 깨진 유리 틈 사이로 희망의 빛이 들어온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읽기를 포기한다면 이 모든 희망의 메시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이 총정리되어 있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알려 준다. 비록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죽음으로 향하는 땅이지만 이곳에서 두려움 없이 힘차게 나아갈 방향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래서 책은 소망의 책이다. 죽음의 땅에서 새 노래를 부르길 권고하며 땅에 앉아 하늘을 사는 기쁨을 누리기를 선포한다.
[출판사 리뷰]이미 알려진 미래
어린양을 따르는 자가 오늘을 사는 방식요한계시록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 미래는 이미 알려졌다. 그동안 모른 척하거나 피했을 뿐이다. 이 책은 이미 알려진 미래 가운데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어린양을 따르며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이제 70인생 맞은 저자는 그가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가졌던 꿈을 기억했다. “요한계시록을 성도와 함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은퇴를 앞둔 시점에 그 꿈의 열매를 맺는다.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떨리는 책이 아니다. 내가 144,000명에 들지 안 들지를 놓고 논쟁하거나 심판하거나 등을 돌리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숫자에 들었고, 앞으로 닥칠 재앙에서 피하고 돌아올 시간을 알려 주시는 희망과 소망의 책이다. 저자의 독법은 요한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이제는 끝이다.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미래와 소망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밧모섬’으로 유배된 것처럼 가시밭길을 통과하는 이 시대의 모든 ‘요한’들이 미래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으면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향해 향기로운 새 노래를 올리길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