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권 이야기는
창세기 1-11장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쓰신 말씀이랍니다. 이해하기 쉬운 본문도 있지만 이해는 쉬워도 적용이 어려운 본문이 있고 이해도 어려고 적용은 더 어려운 본문이 많습니다. 왜 이런 내용을 기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에겐 이유가 있습니다. 가인의 족보를 기록한 이유, 누가 몇 해를 살다 죽었는지를 기록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우리느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창세기를 읽어야 하는 겁니다. 숫자까지 쓰셨어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Bibical Storytelling과 Storytelling에 대하여
설교학에서 말하는 Storytelling은 설고 의 전달에 대한 기법(技法)을 말합니다. 오래 전부터 알려진 내러티브(Narrative)설교 방식과 비슷한 기법입니다. Storytelling설교 기법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설교 방식이 이야기 식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설교자도 예수님처럼 이야기식 설교를 할 때 설교 전달에 효과가 있다고 소개를 하는 겁니다.
-비블리컬 스토리텔링 중에서-
산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산을 올라갈 때는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오는 겁니다.
순종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복의 근원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다운 사람으로 이끌고 만드신 거랍니다.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오신 거지요.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랍니다.
우리의 잘남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큰 신앙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린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랍니다.
-비블리컬 스토리텔링 중에서-
창세기3권 이야기는
"억울한" 야곱의 인생을 그렸습니다.
왜 억울하냐구요?
간사하게 산 것도 아니고 불성실하게 산 것도 아닌데,
사람들로 하여금 간사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간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가 그렇게 살아서 그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태었났을 때, 의식도 없고 아무런 일을 한 적도 없었을 때
그의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겁니다.
그런데 평생 간사한 사람(야곱)이라고 불려야 하니 얼마나 억울한지요!
오히려 야곱을 말한다면 성경에서 야곱만큼
성실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간사한 사람이아니라 성실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하나님도 그 억울함을 아셨는지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그래서 억울한 야곱을 헤아리면서 창세기 3권을 썼습니다.
[서문]
야곱을 간사한 사람 혹은 교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린 성경을 알기도 전에 주변으로부터 야곱은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야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라는 밑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인 야곱이 교활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거지요.오히려 야곱을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보되 더욱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야곱은 결코 간사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활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직한 사람이고 술수를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며 자기 관리에 있어서나 남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을 뿐 아니라 인내심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앙 면에서도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던 착실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야곱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인격적인 면에서는 물론 자기관리나 지식, 지혜 혹은 성실성과 같은 면에서 좋은 모델일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델일 것이고 교회에서라면 존경받는 장로일 겁니다. 야곱은 결코 간사하거나 교활한 사람이 아닙니다.야곱은 자신의 이름이 야곱이라고 불리는 걸 이해 못했을 겁니다. 아니면 그 이름이 싫어서 그 이름과 다른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친 것인지도 모르구요. 하여간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이름 때문에 역사 속에서 간사한 사람, 교활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 25장에서부터 나옵니다. 태어나기 전, 태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요. 태 속에서 싸웠답니다. 태어날 때는 형의 발꿈치를 잡았답니다. 그래서 간사하다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지요. 아무 것도 모르던 핏덩이인 자신이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하면서 간사한 녀석이라는 이름을 붙혔다는 게 억울한 거지요.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샀습니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교활하다고 말합니다.정말 그게 교활한 것일까요?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 에서는 엄청난 부잣집의 장남으로 집안일을 돌보고 관리하면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들판에 나가 사냥을 하면서 자기 인생을 즐기는 겁니다. 그 본분을 야곱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장남 에서가 자기 책임을 하지 않았을 때 야곱이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장남이란 태어난 순서가 아닙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먼저 태어난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야곱은 그 책임을 다합니다. 야곱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거부 이삭의 재산은 어떻게 되었겠는지요? 리브가는 그걸 알았기에 야곱을 기특해 하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놀다 들어온 에서는 장자의 명분같은 건 필요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내던진 겁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거저 장자 명분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정당한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간사하다고 한다면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은 사건도 그렇습니다. 야곱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강권에 못이겨 하기 껄끄러운 일을 한 겁니다. 리브가의 강제적인 행동에 떠밀린 겁니다. 혹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축복을 받고 싶어서 거짓을 행한 교활한 사람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적 장자 명분은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정당한 거래를 통해 장자 명분을 얻었었거든요. 오히려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 한 것이 사기 행위였던 거지요.
에서는 이삭이 장자이기에 축복을 줄 것이라 할 때 자신은 장자가 아니라 야곱이 장자라고 말했어야 바른 겁니다. 야곱은 이 면에서 있어서도 간사함 사람이거나 교활한 사람으로 행동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야곱은 아내가 넷이나 됩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본다면 야곱이 아내를 넷 얻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야곱이 마치 교활하여 아내를 넷이나 얻은 것처럼 인식 한답니다. 야곱은 오직 한 여자, 라헬만을 사랑했었잖아요! 다른 세 명이 그의 아내가 된 것에 야곱의 의도적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왜 아내가 넷 된 걸 가지고 야곱을 못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거지요.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삽니다. 그 가운데 14년은 아내들로 인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 살았던 기간입니다. 그것도 마음에도 없는 레아가 아내가 된 것은 삼촌에게 사기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 없이 그녀에 대한 7년 노예 생활을 한 것이지요. 억울해야 할 건 야곱인데도 사람들은 야곱의 이러한 면에는 아주 인색하답니다. 나머지 6년의 세월도 그렇습니다. 라반 집에 있고 싶어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떠나겠다고 할 때 라반이 강제로 붙들어 둔 겁니다. 그리고 노동의 대가를 약속받은 거지요. 그 대가도 라반의 허락을 받은 행동이었습니다. 그 허락 아래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얼룩 무늬 짐승이나 점있는 짐승, 아롱진 짐승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건 도적질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야곱이 간사한 방법, 교활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이라고 몰아치고 있는 겁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면 하나님의 은혜 혹은 지혜라는 말로 포장할텐데도 말입니다. 유독 야곱에게만은 인색한 거지요.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사람들은 야곱의 신앙에도 인색합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친 사람도 아니고 또 그걸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먹은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의 투덜거림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축복을 받고 부자가 된 것에 대한 배경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촌의 집을 떠날 때에도 스스로 결정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인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는 일 또한 아브라함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도 대단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을 위한 애절한 기도가 있었다면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의 처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필자는 이 기도는 오히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는 찾아볼 수없는 대단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가운데서도 매달린 기도니까요. 게다가 숙곳과 세겜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중 하나님을 더 깊이 의식하고 벧엘의 기념 단을 쌓은 신앙의 모델이잖아요.
그는 생각도 주밀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을 보십시오. 대충하는 게 없습니다.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은 조직적이며 짜임새가 있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을 보십시오.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덤벙거리면서 만나지를 않습니다. 예의를 갖추는 사람입니다. 행동을 할 때도 들은 즉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기다리는 성품입니다. 자식들이 그리도 속을 썩인다 하더라도 시간을 갖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슴 찢어지는 사건이 그의 인생을 험난하게 만들었습니다만 잘 참습니다. 그런 그를 간사한 사람, 교활한 사람이라고 말하다니요!. 야곱은 억울한 겁니다.
하나님이 (이름 때문에) 그 억울한 야곱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야곱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으니 그 이름을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시는 게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은혜였던 거지요.
야곱이라는 사람, 괜찮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산 사람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심과 부지런함 또한 실속있는 열심과 부지런함이었구요. 그런데 사람들은 야곱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야곱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야곱에게 배울 게 무척 많답니다.
요셉이나 욥이 고통을 당하면 죄없이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서 편들어 주잖아요. 그런데 왜 야곱이 고통을 당하면 어떻하든지 그걸 대가를 치룬다는 것으로 짜집기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자구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을 누군가가 오래전 지은 죄와 연결시킨다면 기분이 좋겠는지요? 그렇지 않잖아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리도 성실히 살지만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시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규정해놓은 울타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소신껏 살라는 강권함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야곱이 잘 참고 인내한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라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험악한 인생이지만 그 험악함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고 있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이 살아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걸 말씀하고 있는 거지요.
페르시아 땅에서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식민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게 야곱이라는 이름은 위안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고통은 자신들의 고통이지요. 험악한 삶을 산 야곱이 자신들인 겁니다. 그러나 야곱처럼 억울한 운명으로 규정지어진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상관없이 야곱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기에 바꿔주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억울한 운명은 사람들이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을 읽으면 그가 많이 가엽습니다. 하나님도 야곱을 보시면서 많이 마음 아파하셨겠지요.그렇기에 그가 알지 못할지라도 그를 따라 다니시면서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가 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야곱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를 가엽게 여기시겠지요? 내 뒤에 따라 오시면서 나를 보호하시고 내 앞길을 예비하시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얻는 답니다. 하나님은 멋진 분이시랍니다.
-캘리포니아, 바람 많이 부는 마을에서
조 관 호 목사
창세기4권 이야기는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성공을 말합니다.
혹 성공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건 내가 원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성공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요셉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총리라는 관직으로의 櫓茱속를 한 것 때문이지요.
요셉이 자신을 그렇게 해석한 것을 기뻐할까요?
마치 자신을 출세에 미친 사람처럼 만들고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모델로 설교하는 걸 말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공주의의 희생물로 만들어
천박한 인생으로 만든 걸 역겨워 할 겁니다.
요셉의 목표는 출세도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총리라고 하는 출세를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게 요셉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치 요셉을 말할 때는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모델로 인용하고 있으니
요셉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서문]
사람들은 성공이나 형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성공과 형통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번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권력을 쥔 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학위를 가진 것을 성공이라고 봅니다. 어떤 이는 인기를 누리는 걸 성공했다고 보기도 하지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만 이러한 성공에 대한 개념이 교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곧 성공으로 연결이 된 거지요. 예수 잘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물질의 축복, 권세를 얻는 축복, 건강의 축복,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합한 것이 점점 커짐으로 인해 더 위대한(?) 성공자가 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된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어려운 일도 잘 견뎠으며 유혹도 이겨냈고 결국 30세의 어린 나이에 그 꿈을 이룬 사람으로 소개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의 총리됨을 모델 삼아서 사람들에게 요셉처럼 꿈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꿈을 가지라는둥, 총리되는 꿈을 가지라는둥, 대법관 되라는 꿈을 가지라는둥, 세계최고의 갑부가 되는 꿈을 가지라는둥, 최고의 연예인이나 최고의 운동 선수가 되는 꿈, 최고 미인이 되라는 꿈을 가지라고 하지요.
물론 그 말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성공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는 말을 빼놓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공과 하나님의 영광의 모델인 요셉을 인용할 때 힘이 있습니다. 논리도 맞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요셉은 억울합니다. 자신은 성공에 대한 꿈을 단 한번도 꾼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총리가 되어 세계를 다스리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단 한번도 그는 성공에 대한 야심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꿈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요셉인데 사람들은 요셉처럼 꿈을 가지라고 하니 얼마나 억울하겠는지요.
어떤 사람은 요셉이 가나안에 있을 때 두 번 꾼 꿈(한번은 형제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와 달, 그리고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했다는 꿈)을 가지고 형들을 다스릴 꿈과 부모에게까지도 절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 야심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성경도 모르고 요셉도 모르는 해석일 뿐입니다. 그 꿈을 꾼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런 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던 중에 꾸게 된 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겁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요셉을 인용하는 건 죄악입니다. 요셉은 성공에 대한 꿈은 커녕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소원이 있었다면 아버지와 형제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었지요.(창45:10)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게 그가 소원한 꿈인 겁니다.(창50:25)
요셉 이야기를 성공의 모델로 인용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성공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요셉 못지않은 성공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요셉을 그렇게 인용한다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면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비실비실한 사람은 절대로 요셉 이야기를 할 때 성공 논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공한사람이 될 자신이 없는 사람도 요셉을 성공의 모델로 말하지 않지요. 더 중요한 건 생명에 관심을 둔 사람은 요셉의 인생, 총리됨을 성공의 논리로 보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부분에서 끝이 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형들에게 팔린 그 때,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던 그 때,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을 그 때, 바로 그 때 그의 인생이 끝났다면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을까 하는 짓궂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런 삶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요셉의 그때의 삶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있습니다. '요셉은 성공중'이라는 표현입니다. 성경대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통하였더라'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요셉에 대한 생각 속에서 그의 총리됨을 지워버려야 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입은 옷과 그의 화려한 정치적 지위를 지워버려야 그의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려 할 때, 읽기도 전에 그려진 요셉의 세계 통치의 모습을 깨끗하게 잊어야 요셉의 진실한 소원과 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요셉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너무도 좋았던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그렇게 구박을 받아도 형들과 어우러져 사는 게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요셉의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요셉이 총리가 되어 세계를 다스리는 훌륭한 사람(?) 되는 게 꿈이었고 그걸 위해서 열심히 살았고 그걸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하면 요셉의 마음을 모르는 겁니다.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총리됨을 뿌듯해 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자기처럼 성공(?)하라고 말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있는 게 그의 행복인 거지요. 그리고 죽으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동경하던 애굽의 화려함을 떠나 가나안에서 만날 것을 소원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입니다. 성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정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눠 형제자매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거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은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세속적이고 사탄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과의 동행을 형통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노예로 팔려 짐승처럼 사는 게 실패가 아닙니다. 노예로 살던 사람이 졸지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 형통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노예로 산다 하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성공자입니다. 자유자로 산다 하더라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실패자이지요. 억울하게 죄인이 되고 그 억울함을 해명하지 못한 채 죽는 게 실패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알고 계신지 모르고 계신지가 그가 성공한 사람인지 실패한 사람인지를 평가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진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죄로 풀려나 떵떵거리면서 살면 복받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건 실패의 삶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학위를 받지 못하는 게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공부한 것을 하나님이 알고 있다면 그게 성공자인 겁니다.그러나 엉터리로 공부하고 남의 것을 베껴 자기 것인 것처럼 속여 학위를 받았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성공했다고 할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이름을 실패한 명단에 적어 놓을 것이지요.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걸 아는 사람은 요셉을 천박한 성공의 모델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80년의 최고위 공직자로서 천하를 쥐고 살았던 요셉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을 보게 할 것이지요. 천하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갖지 않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 요셉의 중심을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성공이라는 독약에 취해 있습니다. 모두가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성공하면 죄도 용서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거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위험한 겁니다.
목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망치게 하는 가장 강한 독이 만들어졌습니다.'성공 목회'입니다. 그 말이 복음적이면 모릅니다만(성공 목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복음적 성공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만) 실제 사용되는 성공 목회는 복음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기준의 말인 건 누구나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으면서 무슨 복음적 성공이냐고 비웃는 시대입니다. 먹고 살 만한 헌금도 걷히지 않는 목회를 하면서 무슨 복음적 성공을 운운하느냐고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아이들 학교도 보내지 못해 선교비를 구걸(?)하는 주제에 복음적 성공을 말하는 건 자기 교만이라고 무시합니다. 사회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무슨 복음적 성공이라는 말을 하느냐고 손가락질 합니다. 게다가 당신들이 말하는 복음적 성공이 진짜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두실 리가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공격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 하나님이 먹고 입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사람도 붙여 주고 교회도 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면서 복음적 성공을 외치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성공과 비례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어느 경우는 성공이 꼭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합니다만 행동하는 걸 보면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끼리 어울리고 있는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걸 알겠는 겁니다.
이미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는 사탄이 뿌려놓은 성공이라는 독약에 취해 살고 있습입니다. 요셉의 삶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성공의 모델로 인용하고 있으니 말 다한 거지요.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루터기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의 성도들 가운데 성공이라는 독약을 거부한 존귀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목사인 자신의 아버지가 50명 이상의 성도를 앉혀 놓고 설교하는 걸 본 적이 없답니다. 자신이 목사가 되어 뒤 늦게 깨달은 건 자신의 아버지는 섞지 않고 목회를 했기 때문이라는 거랍니다. 섞지 않으면 커질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네요. 그런데 자신이 큰 교회를 목회하는 건 섞어서(?) 목회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자신은 섞어서 목회를 한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고백하는 선배 목사님이 존경스러웠구요.) 그 말이 늘 생각이 납니다. 섞어서 하는 목회와 섞지 않은 목회,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 성공했느니 실패했느니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성공에 대한 평가는 다른 데 있잖아요.
오늘도 죽어라고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고 애를 써도 사람이 모이지를 않는 것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동역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사람들은 은혜가 없다는둥, 설교를 못한다는둥, 목회를 못한다는둥, 실력이 없다는둥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동역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섞지(?) 않는 목회를 하고 있다 인정받기만을 소원하십시오.
요셉, 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총리였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그가 총리였기 때문에 좋아하신 게 아닙니다. 그 마음이 주님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신 거랍니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기에 공자인 겁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성공자인 겁니다. 당신과 내 마음 속이 주님으로 풍성하다면 주님은 우릴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천사들 앞에서 자랑하고 계신답니다.
-캘리포니아 바람 많이 부는 마을에서
조 관 호 목사
「사무엘상 이야기」는
마지막 사사라고 하는 사무엘의 출생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이야기,
그리고 사울 왕 아래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 다윗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신앙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혼란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 받지 못하는
외진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보석 같이 존귀한 사람들이었답니다.
시골 제사장 엘가나...
아픔 있는 여인 한나...
짓밟히던 사무엘...
예수께서 그러셨던가요?
복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맥을 이어가는 보석들이랍니다.
그분들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마지막 「사무엘상 이야기」는...
마지막 사사라고 하는 사무엘의 출생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이야기, 그리고 사울 왕 아래서
혹독한 훈련(?)받는 다윗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사무엘상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을 「훈련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만
바로 왕좌에 앉아 왕으로서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왕으로서 일을 잘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의 자리에 앉히기 전에 훈련시키신 겁니다.
훈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군인이 되려면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구요,
자동차 정비공이 되려면 그에 합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왕이 되려면 그에 적합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훈련 시키셨습니다.
아무 훈련이 아닙니다.
왕 수업이었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표가 있는 훈련입니다.
「사무엘상 이야기」는
마지막 사사라고 하는 사무엘의 출생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이야기,
그리고 사울 왕 아래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 다윗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사무엘상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을「훈련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만
바로 왕좌에 앉아 왕으로서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왕으로서 일을 잘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의 자리에 앉히기 전에
훈련시키신 겁니다.
훈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군인이 되려면 군인이 되 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구요,
자동차 정비공이 되려면 그에 합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왕이 되려면 그에 적합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훈련 시키셨습니다.
아무 훈련이 아닙니다.
왕 수업이었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묵표가 있는 훈련입니다.
사무엘하 1권 이야기는
다윗을 미워하고 괴롭힌 사울 왕의 죽음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에겐 큰 부담이 사라진 겁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부담이 사라진 것일 뿐
그 자리에 또 다른 부담이 채워졌답니다.
인생은 그런 겁니다.
왕이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울만 없어지면 그 자리가 자연스럽게 주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정이 필요했던 겁니다.
인생은 그런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잘 견디었답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편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올랐답니다.
사무엘하 1권은 정상으로 올라간 다윗을 그려보았습니다.
비블리컬 스토리텔링은 우선적으로,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성경 본문에 대한 흐름을 연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본문의 상황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교육학적인 접근 혹은 철학적인 배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만을 나열해 놓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속 인물들의 심리적 움직임에 대한 다방면의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목회자나 독자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학문과 관계를 무척이나 친숙하게 만들 것입니다. 특히 성경 주석의 필요성과 신학자들에 대한 고마움 내지는 친밀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혼탁하고 예측 할 수 없는 사회 심장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은 물론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가 발견되면서 하나님 앞에 모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답니다.
- 서문에서
재미, 감동! 그리고 변화!
혼란이 문제가 아닙니다.
혼란은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혼란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상황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사사입니다.
그 사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시대...혼란이 있습니다.
문제는 혼란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혼란을 해결하라고 보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이 보여지는 겁니다.
삿 3:14-17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재미, 감동! 그리고 변화!
혼란이 문제가 아닙니다.
혼란은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혼란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상황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사사입니다.
그 사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시대...혼란이 있습니다.
문제는 혼란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혼란을 해결하라고 보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이 보여지는 겁니다.
삿 3:14-17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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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비블리컬 스토리텔링 시리즈 세트(전16권) |
저자 | 조관호 |
출판사 | 도서출판 그리심 |
크기 | SET |
쪽수 | |
제품구성 | 상품설명 참조 |
발행일 | 2020-08-29 |
목차 또는 책소개 | 상품설명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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