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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보기]
교회생활을 오래할수록
더욱 고민되는 12가지 주제
-복에서 상급까지 성경·신학적으로 짚어 준다!
“예수 잘 믿으면 물질적 복은 거저 온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므로 집을 팔아서라도 지어야 한다?”
“목사는 제사장이므로 성도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십일조는 성경이 정한 법이니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경제적 어려움이 따른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새신자를 비롯해 아직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혹은 이성적 질문 없이 믿기만 하는 신자들은 별 의심 없이 “아멘” 하겠지만, 본인이 믿는 바가 정말 성경적인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석연치 않은 주장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느냐고,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느냐고 물을 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거나, 심지어 두 가지가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작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거나 틀리게 알거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어떤 주제에 관해 내용을 꼼꼼히 기술하고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신앙적 앎을 추구하는 작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에 꼭 필요한 것이다.
신학자로서 평신도를 위한 대중적 글쓰기를 꾸준히 해 온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송인규 교수는 이번에 펴낸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의 관계를 규명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란이 되거나 오해와 편견을 틈타 혼란을 끼치는 신앙적 주제 12가지―복, 성전, 제사장, 십일조, 안수, 영성, 거짓말, 고난, 선행, 예정, 심판, 상급―를 선별하여 성경·신학적으로 명료하게 짚어 준다.
전체 3부 가운데 1부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 즉 복, 성전, 제사장, 십일조는 ‘구속사적 발전’이라는 신학적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는데, 이를 읽고 나면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새로이 깨달아 현재 교회 안에서 그릇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주제들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알 수 있다.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은 ‘송인규 교수의 신앙카페’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첫 권은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이다) 저자와 출판사가 협의하여 2007년 5월부터 2008년 7월까지 <복음과상황>에 12회에 걸쳐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뒤 여러 차례 수정 보완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저자 인터뷰]
1. ‘송인규 교수의 신앙카페’ 1권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가 나온 지 꼭 6년 만에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이 출간되었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뭐, 사실 제 삶에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학기 중에는 강의에 전념하고, 방학에는 글쓰기나 외부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제 생활 패턴입니다. 2008년에 «자아가 자아를 엿보다»(생명의말씀사)와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IVP)을 출간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간 사별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2007년 2월 한 달 동안에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미국에 계신 빙장 어른과 한국에서 가료 중이던 어머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참, 아들 녀석이 2008년 8월 말에 입대해서 군복무 중이네요. 그리고 최근(2월)에 책을 따로 보관하고 있는 제 책집을 옮겼습니다. 집주인이 급작스레 집을 빼 달라고 해 부랴부랴 새로운 셋집을 찾아야 했는데, 번거롭긴 했지만 오히려 더 적절하고 넓은 장소를 찾아 다행입니다.
2. 이 책에서 다루는 열두 가지 주제는, 새신자보다는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더 고민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주제 가운데 이것을 택한 이유는?
제가 고민하든,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든, 저는 여러 질문이나 궁금한 주제들을 모아놓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열두 주제는 그 여러 가지 사안 가운데 상당히 골치 아프다고 여겨지는 주제를 고른 것입니다. 꼭 열두 개일 필요는 없지만, <복음과상황>에 12개월 동안 기고하다 보니 열두 개가 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번에 택한 주제들은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있는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 신앙의 의문은 초신자의 것이 다르고,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분들의 것이 또 다르지 않습니까? 전자에 대해서는 최근 어느 정도 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준의 주제를 택한 것입니다.
3. 믿음에도 두 종류가 있는 듯합니다.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 머리말에서도 언급하셨는데,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서 지적인 요소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앎의 측면을 배제하면, 우리의 신앙은 유약한 가운데 병들거나, 그저 미숙한 상태에 머물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실상은 앎에 의해 심화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머리말에서 ‘매개적 믿음’과 ‘실증적 믿음’을 구별하여 설명했는데, 매개적 믿음은 어떤 진술(성경의 진술도 포함)을 화자의 권위에 의거해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권위가 매개로 작용하기 때문에 매개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와 달리 실증적 믿음은 믿는 바에 대해 증거를 찾고 근거를 밝힘으로써 무언가 자기 나름대로 정당화 작업을 시도해 본 후에 갖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검증 작업을 간단히 말해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여러 주제나 교리 등이 어떤 근거에 기초하여 형성되었는지, 그렇게 형성된 내용이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또 그러한 교리에 대한 반론이나 이견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런 작업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음으로써 매개적 믿음은 실증적 믿음으로 심화되지요.
4. 열두 가지 주제 모두 알아 삶에 적용해야 할 것들이지만, 한국 교회가 특히 주의해야 할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쓴 열두 가지 주제 가운데 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1부에 나타난 네 가지 항목, 즉 복, 성전, 제사장, 십일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심한 것이 1장의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걸려 있는 것이 바로 기복 신앙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복 신앙을 근절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성경적인 것으로서, 구약의 가르침에 물질적 복이 상당히 큰 비중으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본문들을 구속사적 발전에 비춰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해야만 그릇된 복관(福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2장 ‘성전’ 역시 꽤 심한 혼동과 빗나간 적용을 많이 일으키는 사안입니다. 이 주제도 처음 것과 마찬가지로 구속사적 발전이라는 신학 원리를 지침으로 삼지 않으면, 심중팔구 매우 조야하고 무속적인 성전관을 배태하게 될 것입니다.
3장인 ‘제사장’은 오늘날 목회자와 ‘평신도’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썼습니다. 종래의 많은 부흥사들이 자신을 가리켜 구약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고 주장하곤 했는데, 과연 이런 명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와 같은 장이 마련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다룬 4장도 예상 외로 복잡한 이슈입니다. 그것은 이 주제가 율법의 신약적 적용이라는 심층적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십일조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헌금이라는 민감한 사안과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에, 성경적 실상을 솔직히 밝히기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외에 여덟 가지 주제도 교회 내에서 부분적으로 문제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앞의 네 주제보다는 덜한 것 같습니다.
5.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은?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쉽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시리즈의 첫 권인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보다 글의 구성도 좀더 복잡하고 까다롭죠. 따라서 이 책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같은 장을 적어도 두 번은 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각 장의 주요 논지를 정리해 가면서 읽는 것도 고생스럽겠지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방식입니다. 만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고생한 것 이상의 커다란 유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열두 주제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1장과 2장만큼은 순서대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 장이 다 구속사적 발전이라는 원리에 입각해 쓰였지만, 1장의 부록에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집필 계획과 관련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신학 전문 도서를 쓸 생각입니다. 또 교리적 주제 열두 가지를 뽑아 자세히 해설하는 ‘조직신학 개요’를 쓰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2010년 후반기부터 2011년 전반기 사이에 완성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홍성사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 시리즈의 3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내용을 쓰고 싶습니다. ‘아는 만큼 보람찬 생활’―아마도 이런 식의 제목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 맛보기]
기복 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있다. 이러한 신앙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주시고자 했던 복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게 된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다른 신앙적 면모들 또한 우리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여기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없다(약 1:17 참조). 하지만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40~41쪽)
나는 오늘날 유행하는 성전 신앙을 비판함으로써 교회당의 필요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교회당의 종교 심리적 요인을 긍정적으로―아니면 최소한 중립적으로―취급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 심리적 요인이 더욱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이 되려면 그리스도인 사이에 참된 의미의 성전 신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 건축’은 본질상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신앙을 강화해 주는 일―‘덕 세움’(롬 14:19; 고전 8:1; 10:23; 14:3; 엡 4:29)―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고전 14:4-5)과 연관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듯 개인의 체면이나 위신을 높여 준다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오이코도메(oijkodomhv)로, 집이나 권속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와 짓는다(to build)라는 의미의 데모(devmw)에서 유래한 단어다. 다시 말하면,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운다는 것이 ‘덕을 세움’의 원래 의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개인을 세우는 일, 곧 개인의 신앙을 강화해 주는 일이 성전 건축이다. (61~62쪽)
지금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점은 두 계층 모두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신분을 보유하고 있고, 제사·축복·중보 기도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목회자에게는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과 신앙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기능이 있는 반면, 평신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자신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처럼 일반 그리스도인과 신분조차 다른 것처럼 잘못 생각하여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또 자신만이 제사·축복·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양 오해해서도 안 된다.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신앙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면에서는 경험을 쌓고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여 일반 그리스도인과 차별되어야 하고, 이로써 다른 일반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85~86쪽)
20세기 후반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교우들의 헌금 생활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과 그 헌금 명목 가운데 십일조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십일조에 대한 이러한 열심이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이렇게 비관적 태도를 표명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 십일조의 헌납과 관련하여 강조된 캐치프레이즈, 즉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교우들에게 더 이상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십일조를 장려하기 위해 사용된 방식들, 예를 들어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싣는다든지 예배 때 공개한다든지 하는 일이 전에 비해 점차 구속력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나 도전이 공공연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규례냐 하는 점에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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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ㆍ직분자ㆍ청년 모두를 위한 예배 교육 교재! 이 책은 예배학 입문서나 예전(禮典,liturgy)에 대한 해설서가 아닙니다. 또 전통적 의미에서의 예배 갱신을 위한 안내서도 아닙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예배 때 행하거나 이루어지는 여러 순서와 활동에 대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거지?' '성시교독은 뭐야?' '사도신경은 꼭 외워야 하나?' '대표기도 때 나머지 교인들은 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헌금을 꼭 예배 시간에 하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장로 친구에게 찾아가 궁금한 점들을 하나하나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로 친구는 머뭇거리고만 있지 한마디도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지 이 말만 되뇌었습니다. "이런 것을 드러내 놓고 질문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인 것 같군. 실은 나도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었지. 하지만 다 그냥 그렇게 하는가보다 하고 지금까지 지냈어. 자네도 금방 익숙해질걸세." 이러한 반응이 단지 장로 한 사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보에 적혀 있는 현재의 예배 순서가 어떻게 하여, 무슨 목적으로 정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일반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직분자들까지, 심지어 목회자들조차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보고자 이 책을 마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