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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이후 25년 만에 새로 쓴
송인규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강론!
이 책은「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를 통해 1980년대 한국 기독교계에 기독교 세계관 개념을 소개하면서 왜 기독교 세계관이 중요하고 절실한지를 갈파한 저자가 최근의 묵상과 연구를 통해 25년여 만에 내놓는 ‘통합적, 성경적, 반성적 기독교 세계관 성찰’이다. 이 책이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철저히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성경 본문을 따라 만물의 범주를 ‘자연, 인간, 문화, 사회’로 구분하고, 또 그 만물을 ‘창조-보존-화목’이라는 일련의 과정 안에 담아내어 ‘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하게 함으로써 경건을 깊게 하고, 조각나고 분리된 가치와 관점을 통합하여 통전성을 회복시켜 주며, 일상의 곤혹스러운 상황에 판단 기준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통합적 기독교 세계관 이해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적인’ 성찰을 담은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함으로 국내 실정에 맞지 않거나 견해 차이가 있는 기독교 세계관 관련 번역서들을 그대로 적용해오던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이 퇴조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렵다는 인상을 풍겨 왔습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을 언급하거나 그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삶의 문제를 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독교 세계관의 존속론과 폐기론이 팽팽히 맞섬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가 더 깊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저는 성경이 명쾌하게 지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 2장 중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제임스 사이어, 미들턴과 월쉬, 그리고 알버트 월터스 등의 저술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모두 성경의 교훈을 그들의 상황과 처지에 적용하려는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책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자연히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성경의 교훈뿐 아니라 그들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적용까지 배우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교묘한 문화적 착시 현상이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책을 읽고 가르치다 보면, 어느 새 그 내용에 심취되어 우리가 처한 삶의 정황과 맥락을 잊고 서구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7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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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망 ♡♡ 질투 ▷▶ 경쟁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얄미운 여우들 생포작전!!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본 적 있습니까?‥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성공해도 되는가?
‥섬김을 가르치는 교회가 어떻게 경쟁을 부추길 수 있는가?
‥헌금 · 전도 · 예배 참석에 관한 구역별 통계를 주보에 공개해도 되는가?
‥그리스도인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가?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치밀하고
분석적인 필치로 솔직하게 풀어 온 송인규 교수의 신작
학교와 일터는 물론 소위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야망, 질투, 경쟁은 난처하고 불가피한 문제다.
저자는 이 세가지가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작동 원리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른척 할 수 없는 문제라고 규정하고,
독자들을 흥미진진한 고민과 논쟁의 장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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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서론 중에서]그리스도인으로서 일반 은총에 관해 살피는 일은 왜 필요한가? 일반 은총과 같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 같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보아야 하는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해 세 가지 항목으로 답변하고자 한다.
(1) 첫째, 누구든지 개혁파 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주었지만, 개혁파 신앙과 일반 은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견지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전적 부패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삶과 문화 속에서 적극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발견하다면, 그에게 허락되는 최종 귀결은 하나님의 전(全) 포괄적 호의-이것이 곧 일반 은총인데-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전술한 세 가지 사항-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 부패, 진리, 도덕적 선, 미적 가치의 세상 속 실재-가운데 최소 어느 하나를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실상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일반 은총을 수용하고 배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이상과 같은 논리적 추론 작업 때문은 아니다. 보통은 성경과 개혁 신학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중 이 교리에 접하고 또 그 내용을 파악하는 식이 된다. 그러나 순전히 논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혁파 신앙을 표방하면서 일반 은총에 대해 모른다든지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개혁파 신앙인이라 자처한다면-아니면 개혁파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면-필히 이 주제의 이해와 학습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일반 은총에 관한 성경적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라.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탐구의 정신 가운데 정독해 보라. 일반 은총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자료들(이 책자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을 입수하여 읽도록 하라. 이로 말미암아 당신의 개혁 신앙은 더 깊어지고 더 알차게 영글 것이다.
(2) 둘째,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통해 구속사적 발전의 전반적 흐름을 꿰뚫어 조망하게 되고 이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신학적 이슈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이 주제가 성경의 근본 토대인 구속사적 발전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카이퍼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 카이퍼는 일반 은총의 작동 원리를 하나님의 작정에서부터 찾고, 창조-타락-구속-종말의 구속사적 사건(epoch)과 연관시키며, 문화물이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입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스킬더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비록 그가 일반 은총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반대했고, 문화적 사명의 주체를 그리스도인에게서만 찾았으며, 문화물의 천국 영입이라는 관념을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우는 문화적 사명은 구속사적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스킬더는 창조 이후 주어진 문화 명령을 출발점으로 하여, 타락 전후에 드러난 언약 및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 종말에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사단과의 문화적 쟁투 등을 일관성 있게 엮은 뒤, 천국에서의 안식으로 자신의 이론을 마감한다.
일반 은총을 기독 신앙의 부록이나 미천한 소주제로 여겨 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기대 밖의 신선감을 선사하고 또 크나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들-신앙의 연륜이 짧거나 신학 지식에 대한 경험이 적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풍요로움이 오히려 번쇄하고 현학적인 것으로만 인식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인상이 너무 이 책자를 일단 접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재독을 시도하는 것도 현명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다면, 다소 난삽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일반 은총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작정, 언약, 은혜, 구원, 중보자, 종말, 천국 등-을 곱씹으며 살피는 것도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주제들 역시 개혁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안들이므로, 어차피 그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일반 은총은 결국 기독 신앙의 요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구속사적 발전, 그리스도인의 사명, 종말론적 비전이 담겨 있기에 이 주제에 대한 고찰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3) 셋째,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통찰력과 근원적 지혜를 얻으려면 일반 은총에 대한 성찰이 전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또 문화 사역에 더 열을 올리는 시대인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화적 사명의 신학적 뿌리나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는 무지가 깊다. 심지어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을 끊임없이 운운하면서도 그 용어의 성립 배경이나 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반 은총에 관한 탐구는 이상과 같은 오류나 소홀 행위를 미연에 방지해 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인류 문명의 발전, 이 세상의 문화적 업적과 문화 활동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또 문화적 사명의 본질을 어디에서 찾고 어떤 실행 원리에 착념해야 할지 근본적 안목의 수립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아울러 문화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의 형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문화적 분별력을 함양하는 일 또한 유익의 항목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일반 은총의 내용을 습득하면 이것이 자연스레 대중 문화의 변혁에 대한 적실한 아이디어를 획득하도록 돕는다든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화 사역에 필요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혜택이 일반 은총 (및 문화적 사명) 자체의 가르침으로부터 연유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그런 사항들은 현 시대의 문화적 형편을 잘 알고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의 사역적 경험과 감각에다 기대를 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 은총의 가르침은 우리의 관심사인 바 적실한 지침이나 구체적 사항들의 건전성과 타당성을 가늠하는, 신학적 표준이나 원리를 제시해 준다. 이런 점에서 일반 은총의 도움이 없이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통찰력과 근원적 지혜의 획득이 힘들어질 것이요, 후자가 결여된 시대적 지침이나 구체적 방안들은 까딱 잘못하면 견실한 신학적 닻에서 떨어져 나가 비성경적이고 심지어 비기독교적인 표류를 초래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일반 은총의 내용을 성찰하는 일은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견지하는 바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