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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지기 시작하니까 성경을 읽게 되고 큐티를 하게 됐지요. 성경 자체만으로 하루에 한 문단씩, 매일의 큐티 속에서 하나님을 기적적으로 많이 체험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티가 한계에 부딪힌 것을 느꼈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97년 초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나,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나,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는 나,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오신 성령님을 체험하고, 내가 보좌에 앉아 있다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내가 생각과 지식으로 구하기 이전에 (주님이 그 지성을 사용하긴 하시지만) 우선 내가 보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성령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새롭게 깨달아진 십자가에 대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성경에서 십자가의 도와 관련한 말씀을 뽑아 성경암송을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채우려는 게 아니라, 말씀이 그냥 좋았던 것입니다. 즉, 성경암송과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라는 두 가지 차원의 개인 영성훈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2006년, 성경암송과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9년째 하던 어느 날 성령님께서 성경암송을 성령님을 바라보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아를 부인하는 차원 즉, 어린아이 같은 맑고 순수한 머리로 만들기 위해 성경을 암송하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소리 내어 성경을 암송하면서 옛 부대 차원의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나 어떤 성경 지식까지도 내려놓으며 성령님을 향하면서 놀라운 생수의 강을 체험했고, 그것이 세계선교로 부르시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섬기던 교회를 내려놓고 열방을 품고 거리에서 전도하며 하나님 주시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 말씀을 암송하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어 그것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를 하고는 있었습니다. 뉴욕의 거리전도 사역이 알려지면서 규장에서 <나는 뉴욕의 거리전도자> 책이 나오게 되었고, 그 후 다니는 곳마다 십자가 복음과 전도의 메시지와 더불어 제가 하게 된 성경암송기도를 통해 성령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많은 성도들의 성경암송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암송은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아니고 기도의 본질이라고 믿고 생각하는 가운데, 헬라적 큐티 문화가 본질적인 성경암송기도를 대체해버린 것 같아 교회사 속에서 성경암송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유대적 문화 가운데 성경 암송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지를 보게 되면서 모든 크리스천에게 알려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하던 중에 규장에서 두 번째 책을 제안할 때 이 책을 준비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 책의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세상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보좌에 연합된 진리에 대한 말씀들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정말 성령님이 클라이맥스시죠. 우리를 온전한 진리로 이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14)라는 말씀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이신데, 요한일서 5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오신, 우리 속의 말씀을 먹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쓰신 것입니다. 성령님을 바라보는 최고의 도구는 성령님께서 쓰신 성경인 거죠. 기도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 자아부인입니다. 즉, 우리가 주 안에서 죽었고(갈 2:20) 부활하였고 보좌에 앉아 있기 때문에(엡 2:5,6) 보좌에서 기도하는 차원에서 기도가 이뤄지려면 주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선 주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적 생각과 옛지식을 내려놓는 자아부인이 필요한데 성경암송이 자아부인을 하도록 해줍니다. 즉, 성경암송의 목적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성령을 어린아이같이 바라보기 위한 것이 될 때 죽은 글씨인 성경글씨를 살아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지식적 차원에서 암송을 하게 되면 자기를 채우기 위한 독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암송을 하는 것으로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여 어린아이처럼 성령님을 바라보게 되면 살리는 영의 양식으로 먹게 됩니다. 이렇게 암송한 말씀은 암송한 자신을 살리고 주변도 살리게 됩니다. 큐티는 귀납법적 접근입니다. 관찰, 해석, 적용을 앞세우면 다분히 브레인, 지성이 먼저 돌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물론 유익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옛 부대를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좌에 앉은 믿음으로 보좌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곳이므로 , 옛 부대를 가지고 답을 찾으려는 이성 자체를 내려놓고 (눈을 가린) 수건을 벗고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고후 3:18)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나의 옛 부대 차원의 지식이 성령님을 향하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성경을 암송하면서 옛 부대로서의 자아를 젖혀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묵상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요 우선순위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이 시편 1편 2절 말씀인데요, “복 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묵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가 ‘하가’인데요, “소리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잠잠할 묵(黙), 생각할 상(想)은 왜곡된 번역이지요. 제가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오갈 때 만나는 유대인들을 보면 뭔가 외우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며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모차를 모는 부인들도 입은 계속 웅얼거립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것이죠. 정말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은 바로 끊임없이 성경을 소리 내어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이성이 점점 순수해지면서 옛 부대가 새 부대가 되어지면서 영적인 기름부으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고, 그런 다음에야 영적인 이성으로 날카롭게, 귀납법적으로 관찰, 해석,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삶에 가장 모토가 되는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97년부터 계속 암송하면서 단순화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속에 죽음 연합과 성령연합(내안의 그리스도)의 사이에 두 연합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을 보충해주는 구절이 에베소서 2장 5,6절입니다. 그래서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에베소서 2장 5,6절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보좌 내 보좌, 주의 성령 내 안에, 다시 오실 주 예수!” 저는 암송하며 기도할 때, 일상생활에서 자고 일어날 때도 이 선언을 먼저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내가 믿음으로 연합되었다는 걸 먼저 선포하는 것이지요. 회당장 야이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아이가 죽지 않고 잠을 잔다고 표현하신 걸 볼 때 잠은 죽음과 연결되는 상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을 때마다 하루 종일 튀어나와 움직였던 죽은 자아를 자아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 선포하며 그날 있었던 모든 부정적인 결과들을 단 번에 처리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새 날을 맞이하면서 알람 소리 듣고 눈 뜨자마자 자동으로 “예수 부활 내 부활” 하고 선포하고, 그 다음 몸을 일으키면서 “예수 승천 내 승천” 하고 외칩니다. 그런 다음 자연히 앉게 되었을 때 “예수 보좌 내 보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으면서는 성령과 동행한다는 의미로 “주의 성령 내 안에” 합니다. 그런 다음 내가 예수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걸어간다는 의미로 “다시 오실 주 예수”를 외치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암송이죠. 성경의 핵심을 요약해서 암송하며 선포하는 것이기에…. 그런 다음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성경암송으로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16년 전부터 시작한 암송구절이 쌓인 게 한 2000구절쯤 되는데요, 하루에 이걸 다 암송하는 건 아닙니다. 전체 2000구절을 몇 파트로 나누어서 반복하여 암송합니다. 암송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구절을 암송하는 것보다 이미 암송한 구절을 복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빨리 많이 암송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평생 한 구절만 암송해도 괜찮습니다. 주의 기도만 암송하여도 굉장히 강력합니다. 성경이 성령님이 쓰신 영이신 말씀이기 때문에 소리 내 암송함으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성령에 집중하게 되는 원리인 것이죠. 많은 분들이 암송 그러면 (기억력이 부족해)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곤 하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 치료 차원에서 말씀 드리면, 암송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단을 의미 단위로 몇 단어를 짧게 끊어 한 번 읽기만 해도 쉽게 외워집니다. 지금 시험해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한 번 따라 해 보셨습니까? 벌써 외워졌지요? 중요한 건 암기력 문제가 아니라 반복의 횟수에 있습니다. 그리고 암송을 여러 번 시도하지만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권면을 드립니다. 자꾸 까먹어도 상관없습니다. 암송이 목적이 아니고 암송을 통한 자아부인을 하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암송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큰 유익입니다. 암송을 시도할 때야말로 머리가 맑아지며 세상 걱정을 하지 않게 되어 어린아이의 심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짧은 의미단위를 반복해서 암송하고 중얼거리는 건 다른 종교에서 경전을 중얼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들은 비우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채워지신 성령님을 바라보는 게 목적이고, 성령님이 쓰신 세계 최고의 책을 소리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 몇 달간 마가복음 전장을 금식 가운데 암송했는데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라고 짧게 끊어 단순히 반복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반복하는 횟수만큼 누구나 다 암송이 가능합니다. 암송의 중요성 중 하나는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를 비우려고 입술과 혀로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입술과 혀로 외워지면 생각이 잘 비워지고 영으로 (성령님과) 하나가 됩니다. 여기에 성경암송기도의 놀라운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우리의 작은 이해력을 내려놓는 기도가 우선 되어야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생각으로 이해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성령을 바라보는 차원에서 입술과 혀로 외우면 혼적인 생각을 급속도로 통과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반복할 때 생각을 맑아져서 새 부대가 되고 영의 말씀이 영과 육에 새겨집니다. 말씀이 육체에 새겨진 훈련이 된 사람은 그 말씀을 손과 발로 행동하기가 쉬워집니다. 보좌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개념을 생각합시다. 보좌는 이미 모든 주의 뜻이 다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침에 기도할 때 지식으로 먼저 주님 앞에 나간다기보다, (성경암송기도로) 주의 영광, 주의 얼굴만을 구하는 기도로 나아갈 때, 보좌로 깊이 나아가는 만큼 우리의 이성은 영적 이성으로 변화되어져 그 날카로운 영적 이성으로 새로운 말씀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암송은 기도의 좋은 도구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성령님에게 더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상처나 현재 당면한 문제에 잡혀 있다든지 다가올 미래에 대해 두려워한다든지 합니다. 우리 생각이 자꾸 그런 감정을 불러내거든요. 기도할 때 이런 것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기도할 때는 그런 감정을 젖혀버려야 합니다. 그런 걸 젖히는 것이 기도거든요. 젖히는 도구가 또한 암송입니다. 그래서 저는 암송할 때 그 뜻이 무엇인지, 깊은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내 안에 연합하신 성령님을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바라는 차원에서 암송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을 암송하다가도 며칠 전 누구에게 들은 말이 상처가 돼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걸 또 젖히며 계속 암송을 합니다. 말씀암송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는 기도가 훈련된다면 삶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환경에 빨려 들어가 그 문제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도록 생각을 젖히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이것이 성경암송으로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암송하다가 방언을 하고 싶으면 방언하시고요, “예수님, 성령님, 아버지” 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암송을 계속 하세요. 암송이라는 기도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하는 기도의 훈련 자체가 또한 기도의 실전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기도, 찬양, 예배, 중보기도, 영적 전쟁 같은 것들이지요. 이 모든 것의 기초가 성경암송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선 기도는 주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뜻은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다 이해하진 못해도 말씀을 소리 내어 선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주의 뜻을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는 것이기도 하지요.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자아가 부인되는 것인데 말씀암송으로 선포하면서 자아를 부인하니까 기도의 기초가 형성되면서 주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소리 내 선포하는 것 자체가 주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를 표현하고 있는 글씨이므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 자체가 찬양인 것입니다. 말씀선포 가운데 기도와 찬양의 의미가 다 있으니 말씀선포 자체가 예배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그 말씀에서 뭔가 취하여 살아갈 때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선포할 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죠. 나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나라와 열방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말씀 자체를 선포했다면 그것 자체가 중보기도의 모습이 되고, 그 말씀이 선포되는 그 기도의 대상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또 말씀을 선포할 때 듣는 존재가 있는데, 하나님이 들으시고 내가 듣고 천사들이 듣고 마귀와 악한 영도 듣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암송으로) 선포하는 순간 영적 전쟁이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말씀을 소리 내어 암송함으로 선포할 때, 기도, 찬양, 예배, 하나님나라 임재를 위한 중보기도,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신앙의 기초가 모두 이뤄지는 것입니다. 다들 “말씀 없인 안 돼”라는 말은 하시는데, 사실 문자적인 것에만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글씨(로고스)인 성경은 영이신 말씀(레마)으로 인도하는 도구일 뿐이죠. 고행이나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자아를 부인하는 도구로써,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도구로써 성경을 암송하며 선포할 때, 즉 말씀으로 기도할 때 신앙의 기초가 닦여질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라 (2013 올해의 신앙도서) -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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